9월 5일은 120년 전 포츠머스 조약 체결된 날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120년 전 1905년 9월 5일은, 미국 뉴햄프셔주의 포츠머스에서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이 체결된 날입니다.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통해,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고 있는 정치·경제·군사적 우위를 전적으로 인정하였어요. 이로써 일본의 한국 지배를 위한 최후의 장애요인이 제거되었고, 이제 '보호조약'과 식민지화는 기정사실이 되었지요.

이미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한다는 것은 일본과 영국, 미국 사이에서 합의된 내용이었습니다. 영국은 1905년 8월에 영일동맹을 비밀리에 개정하여 일본이 조선에 대한 '지도감리 및 보호 조치'를 인정하였어요. 미국도 그해 7월 27일 윌리엄 태프트 육군장관이 도쿄에서 가쓰라 타로 총리와 필리핀에서의 미국의 이익과 한반도에서의 일본의 이익을 교환한 각서를 비밀리에 작성하였습니다.

 

러·일전쟁 뒤의 포츠머스 강화조약 회담 장면
러·일전쟁 뒤의 포츠머스 강화조약 회담 장면

“한민족은 미개한 인종”이란 기고문에 동감한 친일파 미국 대통령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공공연하게 친일파라고 자처하였으며,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를 열망하였습니다. 그는 그것이 동아시아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길이며 한국인들을 위해서도 나은 선택이라고 믿었어요. 포츠머스 회담에서 그는 일본 대표단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문에 응했으며, 회담이 결렬 위기에 빠졌을 때 중재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조약 체결 후 "나는 이전에도 친일파였지만 앞으로 더 확고한 친일파가 될 것"이라고 공언하였지요.

당시 루스벨트의 한국에 대한 생각은 1905년 언론인 G. 케난의 기고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보낸 편지에 그대로 드러나 있어요. 케난은 ‘조선인은 본래 일본인 또는 중국인과 같은 수준에서 사물을 파악할 능력이 없다. 조선이란 극동의 모든 나라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나라이며, 한민족은 가장 문명이 뒤진 미개한 인종이다. 조선인은 자치에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반면 일본은 입헌정치의 나라이며 일본 민중은 지성과 활력, 활기에 넘치는 문명 국민이다. 조선은 일본의 것이다.'

한국인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조치도 제대로 취할 수 없는'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회담 중재로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어요. 결국 한국의 희생쯤은 세계 평화를 위해 필요한 조치였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그해 11월 17일 '보호조약'이 체결된 바로 다음날, 미국 정부는 열강 가운데 가장 먼저 주한 공사관을 폐쇄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미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26대 미 대통령

미국의 ’거중조정‘ 요청 위해 밀사 이승만을 파견하다

러일전쟁이 2월에 시작되어 한참 진행되던 1904년 8월 민영환과 한규설은 감옥에 있던 이승만을 사면하여 미국에 밀사로 파견했어요.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으로 미국인 더럼 스티븐스를 외교 고문으로 초빙해야 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외교 라인을 활용할 수 없었습니다. 11월에 서울을 출발한 청년 이승만은 그해 12월 31일 워싱턴 D.C에 도착해서 조선 공사를 지낸 휴 딘스모어 상원의원을 찾아가 민영환, 한규설의 서신을 전달했어요.

1905년 2월 20일 이승만은 딘스모어의 주선으로 존 헤이 국무장관을 면담했습니다. 헤이는 30분 정도의 면담 시간을 거의 혼자 발언하면서 주로 한국에서의 선교문제에 대한 언급을 했고, 막상 거중조정에 대한 논의를 회피했지요. 결국 이승만의 임무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1905년 2월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7월 초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열린다는 소식에 재미 한인사회는 고무되었어요.

하와이에서 활동하던 윤병구 목사는 일본으로 가는 윌리엄 태프트 육군장관에게 간청해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날 수 있는 소개장을 입수했습니다. 그는 워싱턴 D.C로 와서 이승만에게 동행을 요청하여, 8월 4일 뉴욕주 오이스터 베이에 있는 루스벨트의 별장으로 찾아갔어요. 그들이 포츠머스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켜 달라는 하와이 동포들의 청원서를 제출하자, 루스벨트는 주미 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포츠머스 협약 당시 서구언론의 만평. 
포츠머스 협약 당시 서구언론의 만평. 

문서 전달 실패하고 일진회 대표라고 밝힌 이승만

민간 차원의 청원서를 미국 대통령이 접수할 수 없다는 이유였는데, 이는 외교적 제스쳐였을 뿐이었어요. 그는 이미 태프트 장관이 일본에서 가쓰라 총리와 교환했던 각서를 재가한 상태였어요. 하지만 윤병구와 이승만은 주미 공사관의 김윤정 대리공사에게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할 것을 요구했지만, 본국 정부의 훈령 없이 제출할 수 없다고 거부했지요. 이승만은 김윤정의 배반으로 자신의 외교적 노력이 실패했다고 인식했습니다.

당시 그들의 활동에 대해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던 박장현은, 1906년 4월 17일자 <황성신문>에 ’사혐으로 국권을 실할 사‘라는 제목으로 기고를 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이승만을 “한국 인민의 대표자요 독립주권의 보존자요 애국열성의 의기남자요 청년지사”라고 치켜 세웠어요. 이로서 이승만이 미국의 대통령을 만나 독립의 보장을 요구했다는 것이 알려져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뉴욕 데일리 트리뷴> 1905년 8월 4일자에는 ‘오이스터 베이의 한국인들’이라는 제목으로 이승만과 인터뷰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요. 그는 기자에게 “우리는 황제의 대표자가 아니라 ‘일진회’라는 단체의 대표자로서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전달할 것을 위임받았다”면서, “황제는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일진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곧 국무를 장악하고 정부 구실을 할 것”이라고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거중조정’ 이용한 이권 사냥꾼 알렌 미국 공사

고종은 여전히 미국이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입각하여 일본의 침략을 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어요. 그로 하여금 그러한 기대를 하게 만든 장본인 가운데에는 당시 주한 미국 공사 호레이스 알렌의 역할이 컸습니다. 선교사 출신의 외교관이었던 그는, ‘이권을 달라. 그러면 미국이 한국을 보호하리라’고 끊임없이 요구했어요. 고종은 그를 ‘가장 깊게 신뢰하는 나와 조선의 소중한 오랜 벗’이라고 했습니다.

 

선교사 출신 호레이스 알렌 주한 미국 공사
선교사 출신 호레이스 알렌 주한 미국 공사

그런데 그가 주력한 것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내세워 조선으로부터 이권을 얻는 것이었어요. 거중조정이란 조선이 제3국에 의해 위협을 당하면, 미국이 나서서 조정해 준다는 내용이지요. 고종은 이 말을 믿고 경인철도부설권, 운산금광채굴권, 전차 및 전기 부설권 등의 핵심 이권을 미국인들에게 넘겼어요. 그 과정에서 막대한 사례비를 챙겼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략하자, 고종이 자의로 이 조항을 해석한다고 발뺌하면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 공사관이 불필요하고 총영사관만 있어도 된다는 아이디어를 제공했어요. 자신이 친러반일 인사로 평가되는 것을 억울해 하면서, 자신은 반일주의자가 아니라 친미주의자일 뿐이라고 변명했습니다. 자신은 늘 일본에 우호적이었고 한국이 혼자 설 수 없으며 일본은 그 정당하고 당연한 주인임을 인정한다고 역설했어요.

미국 국무부는 1905년 3월 알렌의 해임을 통지했어요. 그는 고종과 주한 선교사들을 동원하여 유임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는 친밀하게 지냈던 외교고문 스티븐스에게 자신이 작성한 97명의 한국인 주요인사 프로필을 제공했어요. 친밀했던 한국인 관료들에게는 한국에 미래가 없다며 일본과 친하게 지내라고 조언하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미국 공주’ 앨리스 루스벨트를 환대했던 고종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는 9월 19일 미국 군함을 타고 제물포항에 도착해서 황제전용 철도편으로 서울로 향했어요. 서울역에 도착했을 때엔 대한제국 관리와 황실 근위대, 군악대, 각국 공사들이 환영 나왔습니다. 구경꾼들도 구름같이 몰렸다고 하지요. 거리 곳곳에 성조기를 내걸었고 자신이 타던 황실가마까지 내주었습니다. 그녀가 떠날 때에는 모든 대신들이 역에 나와 배웅했어요.

오찬도 함께 했는데 이는 ‘공식적으로 대한제국 황제가 외국 여성과 처음 식사한 자리’였다고 합니다. 한편 그녀가 입국하기 직전이었던 1905년 9월 17일 <대한매일신보>는 이렇게 소개했어요. “그녀는 세계 최고국 귀한 공주다. 황제 폐하께서는 옥과 비단으로 예우를 베풀고 최고의 집에서 음식을 내고 음악을 베풀어 양국 우호를 달성하고 귀빈을 즐겁게 하여 예의가 굳건하게 된 연후에 너그러움을 베풀지니라.”

그런데 아버지인 루스벨트 대통령도 통제가 불가능했다는 앨리스는 오만방자한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고종 알현 당시 “승마복을 입고 있었고 승마용 채찍을 손에 들고 입에는 시가를 물었다. 명성황후가 묻힌 홍릉을 방문해서는 동물 석상에 관심을 가졌는데, 특히 말을 보고서는 재빨리 올라탔다. 그토록 신성한 곳에서 그토록 무례한 짓을 저지른 것은 한국 외교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앨리스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홍릉의 석수에 올라탄 앨리스 루스벨트
홍릉의 석수에 올라탄 앨리스 루스벨트

이 내용은 대한제국 황실의 외빈 접대를 담당했던 엠마 크뢰벨이 1909년에 발간한 ‘나는 어떻게 조선 황실에 오게 되었나’에 나오는데요, 당시 앨리스를 수행한 주한 미국 부영사 스트레이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하고 있었고, 그들은 앨리스 루스벨트 일행을 마치 생명줄이나 되는 것처럼 붙잡고 매달렸다. … 루스벨트 일행은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정복했노라.”

제국주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노벨 평화상을 받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0년 미국 대선에서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맥킨리는 고율관세와 해외 영토 확장으로 19세기 마지막에 미국을 열강의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로 평가되지요. 1901년 9월 매킨리가 암살되자 루스벨트가 당시 42세로 권력을 승계하여 제26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미국 역대 최연소 대통령이었어요. 그는 먼로 독트린을 폐기하고 공식적으로 팽창적 제국주의를 표방한 매킨리의 정책을 더욱 밀고 나갔습니다.

그는 인종 개량주의와 사회진화론의 철저한 신봉자였는데요. 미국인이야말로 가장 진보한 인종이며, 그러한 미국에 의해 세계가 지배되는 것이 옳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중심제를 확립하고 독점금지법을 만드는가 하면, 개발금지구역을 확대하여 국립공원을 2배로 늘렸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반독점법으로 재벌들을 견제했어요. (참고로 곰 인형 테디 베어(Teddy Bear)는 그의 애칭 테디에서 가져 온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역사학자인 하워드 진은 그를 "진보주의의 탈을 쓴 보수주의자", "전쟁광이자 제국주의자"라고 혹평했어요. 노엄 촘스키는 그를 "악랄한 제국주의자이자 최악의 정신병자"라고 평가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힘을 과시하며 협상하라”는 외교 원칙으로 세계적 분쟁에 개입하려 했습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주선하여 러일전쟁을 끝내게 했다는 공로로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테디’ 복사판 트럼프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 것인가

현재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의 롤 모델은 바로 윌리엄 맥킨리와 시어도어 루스벨트라고 하는데요. 그의 구호인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는 바로 이 시대를 다시 재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열광적인 보수 세력의 지지를 기반으로 미국 산업의 보호와 초강대국의 힘의 과시, 그리고 대중적 카리스마와 국제적 명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트럼프의 행보는 두 전임자의 압축된 모습이라고 하는 겁니다.

 

마가(MAGA) 모자 쓴 트럼프
마가(MAGA) 모자 쓴 트럼프

트럼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이란 충돌을 비롯한 세계적 위기에 개입하려고 합니다. 북핵 문제에도 직접 나서려고 하지요. 지금 그가 원하는 것은 노벨 평화상을 받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미국 제일주의를 바탕으로, 국내에서는 헌정을 무시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게 해내고 국제적으로는 자유무역의 틀을 벗어나려고 하지요. 그에게 동맹관계는 중요치 않고 미국의 국익만이 존재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트럼프의 기대에 적절하게 부응하면서 우리의 국가적 위상을 정립하고 이익을 수호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어요. 한국은 트럼프 행정부와의 관계에서 동맹의 신뢰와 실리적 거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전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한미동맹의 기본 틀은 유지하면서도, 관철할 수 있는 핵심 국익에 대해서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협상해야 하지요.

트럼프와의 외교는 일방적 추종이 아니라,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냉정하게 계산하는 ‘실리적 동맹 관리’가 핵심인데요, 자신들의 이익이라면 동맹관계도 얼마든지 무시하거나 최대한 양보를 요구하는 트럼프를 상대로 국익을 지켜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과제이지요. 120년 전의 고종은 국제 정세에 어두워 속절없이 미국과 일본에 당했지만, 지금은 이재명 대통령의 ‘국민주권정부’여서 다소 안심되는 면이 있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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