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반란은 지식인들의 결탁이 원인
100만명 모인 광장의 직접 민주주의 교훈
민주 진영 정치인과 사회 단체가 담아내야
요즘 숨가뿐 탄핵 정국을 겪으면서 가장 뼈아픈 점은 지식인 사회의 비도덕성이다. 윤석열의 반란이 어찌 당사자 한 사람의 작품이겠는가? 그랬다면 마땅히 진작 단죄되었을 일이다. 헌법재판소에 나와서 계몽령이니 뭐니 하며 국민을 우롱하는 말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는데, 그게 마치 사실인 것처럼 진지한 모습으로 지지하는 지식인이 어찌 있을 수 있는가? 그건 그동안 눈치보며 숨죽이고 있었거나, 적당한 기회가 없어서 침묵하던 그들의 자연스런 커밍아웃에 불과하다.
지식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나 어느 역사 강사도 그랬고, 어느 사회단체 출신 정치인도 그랬다. 그건 그들이 비록 우리 사회의 다수는 아니지만 숫자에 비해 영향력이 큰 권력과 부를 가진 우군을 갖고 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됐다. 그러니 언제라도 발호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 전반기를 휩쓴 나치의 역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암울했던 박정희 독재 시절 우리 지식인 사회가 열광했던 독일 실존주의 철학의 거두 하이데거는 적극적인 나치주의자였다. 또한 그의 철학이 본질적으로 파시스트적이었다. 그의 제자였던 빅토르 파리아스(Victor Farias)의 고발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 질서의 집행을 지식인에게 전적으로 맏겨서는 안된다. 지식인들을 제어할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를 가져야 한다.
3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선고를 하루 앞두고 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기각은 너무 끔찍해서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하지만 탄핵이 인용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선동정치에 시달릴 것만 같다. 지식인 일부의 부패를 단죄해 그들이 가진 무기의 위력이 어느 정도 약해질 수는 있어도,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우리 정치에는 희망이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100만 명에 가까운 시민이 주말마다 자발적으로 모여 탄핵을 외치고, 음식과 차를 서로 나누며, 심지어 그중 일부는 추운 날씨에도 밤을 새운다. 국토가 좁고 인구밀도가 높다고 해서 꼭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까지 독재와의 투쟁의 역사를 경험하며 극복해온 시민의 민주의식이 그만큼 성숙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탄핵의 실현은 그런 직접 민주주의의 결정체다. 민주주의를 우리보다 훨씬 앞서 실현한 나라들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의 이런 위대한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역사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추후 적절한 시기에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현재까지의 경험을 헌법과 법률에 담아 더욱 확산시킬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예를 들면 대통령 탄핵에 대한 최종 결정을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아닌 국민의 직접 투표의 결과로 결정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물론 직접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방법은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유럽이나 미국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 질서를 스스로 배우고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서, 민주진영의 정치인과 사회 단체의 보다 적극적인 노력을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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