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변하는 세계 속 트럼프의 딜레마 ➀
‘최강미군’ 망상과 천문학적 국가채무란 현타
국방개혁, 정부개혁은 핵심 못 건드리고 모순적
관세폭탄, 감세정책은 오히려 마이너스 불 보듯
신뢰도나 일관성 없는 언행 또한 큰 장애물
격변의 현장치고 사진의 분위기는 차분하기 그지없다. 참석자는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S. 위트코프 중동특사, 국무장관 M. 루비오, 대통령 안보보좌관 M. 월츠, 사우디아라비아 외무장관과 국가안보보좌관, 러시아 대통령 외교자문관 Y. 유사코프, 마지막 러시아 외무장관 S. 라브로프. 지난 2월 18일, 리야드에 차려진 러시아-미국 간의 고위급 협상 테이블이다. 흔히 우크라이나 종전 협상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이 자리에 오른 하나의 의제일 뿐, 주제는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 재정립이다.
이를 세계질서가 ‘일극 체제(unipolar world)’에서 ‘다극 체제(multipolar world)’로 전환됐음을 보여주는 공식적 현장이라고 평가하는 전문가도 있다. 전환의 결정적 요인은 우크라이나 전쟁이다. 미국이 중심이 된 소위 집단서방은 러시아에 패배했다. 불과 두 달여 전인 작년 12월까지만 해도, 당시 바이든 안보보좌관이었던 J. 설리반은 “러시아가 패배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 발언이 있은 지 고작 한 달, 트럼프 정부는 미국 패배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종전 의제를 포함한 러시아-미국 관계 재정립 협상은 그렇게 시작됐다.
유행하는 말로 미국에 현실자각타임(현타)이 온 것이다. 러시아를 인정하지 않고 전쟁 패배를 속여왔듯, 바이든의 미국은 그동안 국내외의 난제들을 사실상 외면해왔다. 패전은 그 외면의 결과물이다. 팀 트럼프는 패전이 상징하는 바, 미국이 직면한 현실의 난제들을 직시하고자 노력한다. 긍정적이다. 문제는 과제의 무게가 막중하고, 트럼프가 취하는 정책이 상호모순적이라는 점이다. 딜레마다.
트럼프 미국이 자각한 현실의 가장 큰 문제는, 최강미군이라는 망상, 천문학적 규모의 국가채무, 두 가지다.
트럼프의 현실자각 하나, 최강미군이라는 망상
에피소드 1. 막대한 국방예산과 최첨단의 무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러시아와 중국을 상대로 한 전쟁게임에서 늘 패한다(사진 4 참조). 왜? 오바마 정부 국방차관 R. 워크. “미 공군기지나 항공모함은 장거리-정밀 타격 미사일을 당해내지 못한다. 그 때문에 첨단 전투기 F-35도 먹잇감으로 함께 당한다. 러시아나 중국은 그 같은 스마트 무기에서 훨씬 앞서 있다.”
에피소드 2. 국방장관 지명자 P. 헤그세스. 작년 11월, 군사전문 유튜브 채널인 ‘Shawn Ryan Show’에 출연, “중국의 극초음속 미사일은 미국의 모든 항공모함을 20분 안에 파괴할 수 있다”라고 발언. 작년 5월, 중국군은 남중국해를 배경으로 미 항모전단과 20여 차례 모의 전쟁게임을 벌였다. 그때마다 항모전단은 중국의 초음속 미사일 24발로 모두 격파됐다(사진 2 참조).
미군은 세계 최강이다. 널리 퍼져있는 상식이지만 사실은 매우 다르다. 이번의 우크라이나 전쟁 포함, 2차 대전 이후 벌어진 대규모 전쟁에서 미군은 1991년 1차 이라크 전쟁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런데 국방비는 정작 러시아, 중국, 영국, 독일, 인도, 일본 등을 다 합한 것보다도 훨씬 많다. 이런 사실을 미국 주류사회는 잘 모르고, 또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서 패한 이유도 이런 현실과 이어져 있다.
미국은 현실의 눈이 아니라 선과 악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자신과 우크라이나는 선, 러시아는 악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미국의 선택지는 러시아를 몰아낼 때까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일종의 영구전쟁뿐이다. 그러나 미국의 부실한 군수역량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
두 번째는 망상장애다. 선이 패배하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허위·왜곡의 내러티브를 만든다. 러시아 사상자 숫자를 왜곡하는 건 약과다. CIA는 우크라이나군과 함께 십수 년 전부터 러시아 국경 지역에서 비밀 작전을 벌여왔다. 러시아를 ‘불법 침략자’라고 할 근거는 박약하다. 이분법적 사고와 망상장애 속에서 제대로 된 전략이 만들어질 리 없다. 작년 뮌헨 안보회의에서 J. 밴스 현 부통령(당시 오하이오주 연방 상원의원)은, “미국이 우크라이나 원조액을 아무리 늘려도 현실을 바꾸지는 못한다. 미국이 취할 책임 있는 태도는 협상을 통해 평화를 이룩하는 것이다.”
트럼프의 현실자각 둘, 천문학적 국가채무
에피소드 1. 2024년 기준, 연방 정부 예산 6.75조 달러(이하 달러 생략). 세입의 52%는 개인의 소득세로 가장 많다. 세출 중 60% 정도는 사회복지, 의료보험, 소득보전 등 필수 지출항목에 집중. 남은 40% 중, 교육에는 5%, 그리고 국방과 국가채무 이자 지급에 각각 13%. 즉 정부가 재량으로 지출할 수 있는 예산 중 대부분을 국방과 빚 이자—원금도 아니고—지급에 쓰는 셈.
에피소드 2. 2008년 정부의 채무는 대략 10조 달러(이하 달러 생략)였다. 1900년부터 그때까지 108년 동안 쌓인 빚이 그 정도. 그런데 2024년 그 채무가 35조로 늘었다. 108년 동안의 빚이 10조인데, 불과 16년 사이에 25조의 빚이 증가한 것. 전쟁비용도 비용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2008년 금융공황 지원 그리고 2019-20년의 코로나 사태 재정지출. 그리고 지속적 감세정책으로 인한 세수 결손.
에피소드 1은 예산의 경직성과 늘 지적되는 과도한 국방예산, 그리고 그에 버금가는 국가채무이자 지급의 문제를, 2는 채무 상황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수치다. 35조의 빚이 얼마나 큰 것인지 쉽게 말해, 미국민 모두에게(인구 3억 4천, 2024년 기준) 각 10만씩(우리 돈 약 1억 5천) 나눠주고도 일부가 남을 정도다. 18조인 중국과 4조인 일본의 GDP를 합한 것보다 많고, 30조인 미국 자신의 GDP보다 많다(24년 IMF 기준). GDP 대비 빚의 비율은 대략 120%. 2차대전 이래 최대치다. 문제는 사진 3의 그래프가 보여주듯 국가채무가 줄기는커녕 오히려 증가하는 것이다.
빚이 늘어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감세 때문이다. 민주-공화 가릴 것 없이 감세와 그를 뒷받침하는 적자예산 편성은 하나의 경향으로 굳어졌다. 세금인상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지기 싫어하는 까닭이다. 1990년대 클린턴 시절에는 50년 만에 흑자예산 기록을 남겼다. IT 붐을 비롯한 경제활황과 그에 기초한 증세(소득세율 31%에서 최대 40%까지 인상)로 가능했다. 예산행정의 빼어난 업적이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물론 복지지출 축소와 세금인상 때문에 94년 총선에서 최대의 정치적 패배를 당하지만, 적어도 적자예산과 국가채무 문제에 세금인상이라는 해결책을 남긴 모범사례다. 그러나 그건 예외에 속한다.
트럼프는 이 문제를 정부 조직개편, 인력감축, 예산절감, 지출회계 감독 강화, 무역적자 축소, 미군 주둔비용 인상, 해외 미군기지 축소 등의 경로로 달성하려는 듯하다. E. 머스크가 주도하는 행정 효율화 추진 조직—DOGE(Dep’t of Government Efficiency)라는 부서—의 개혁작업, 그리고 트럼프의 관세폭탄(?) 정책은 그 일환이다.
현타의 무게, 대책의 모순
현타에도 불구하고, 비용 대비 열등한 미국의 군사역량이나 천문학적 국가채무에 대해 트럼프는 아직까지는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으며 내놓는 대책은 모순적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미국에 가르쳐준 것 중 하나는 제조업의 중요성이다. 이것이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미국 군사력을 차이나게 하는 결정적 요소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고려하면, 미국이 취해야 할 첫 번째 안보대책은 국방정책의 수정이라기보다 산업정책의 개혁이다. 관료 조직의 관행상 이는 극히 어려운 작업이다. 대신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종전과 국방예산 절감 방도를 모색하고 있다. 사실 종전은 국방정책의 근본적 방향 전환보다 쉬운 선택이다. 한편, 국방예산 절감 방안 중 하나는 동맹국에 미군 주둔 비용부담을 압박하는 것이다. 나아가 러시아, 중국과의 핵무기 감축 협상, 심지어 일각에서는 아이디어 수준이지만 해외 미군기지 축소 방안도—이 중에 주한미군과 오키나와 해병대 철수(2월 20일, 유튜브 채널 저징 프리덤, J. 맥그리거 전 미 육군 대령의 발언)까지도 논의되고 있다. 그간 미국의 외교·안보 행태에 비춰볼 때 이는 커다란 변화다. 전향적이지만, 이것이 전쟁국가 미국에서 어느 만큼 가능할지는 두고 봐야 한다.
국가채무와 관련해서는 관세 정도를 빼고 뾰족한 것이 없다. 오히려 2025년도 예산안의 감세액이 무려 4.5조에 달한다. 통상 관행인 2조 정도의 적자예산에 감세로 더 큰 적자를 덧씌우는 것이다. 사실 관세로 무역적자를 해소한다거나, 달러 체제에서 벗어나는 브릭스 국가에 100% 관세를 매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협박이다. 트럼프 1기 때 이미 겪은 실책이기도 하다.
더 큰 문제는 전쟁 수준의 관세는 오히려 상대국이 미국, 즉 달러를 회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막대한 국가채무는 달러에 대한 신뢰를 떨어트리고 있고 국채발행도 여의치 않다. 탈달러 경향이 강해지면, 달러 기축통화 체제가 약해진다. 그렇게 되면 국가채무 문제는 더 악화한다. 악순환이다. 무역적자는 국내 제조업이 활성화되지 않는 한 해소하기 어렵다. 다른 나라의 것을 빼앗아 오는 방식(예: 삼성, TSMC 등의 미국 투자 압박)은 실효성이 낮다. 기술봉쇄 전략은 19세기적 방안이다. 중국의 AI 딥시크는 쇄국정책이 얼마나 무용한 것인지를 역대급으로 입증해 주었다. 무엇보다 금융자본주의 국가화한 미국이 제조업을 부활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꿈이다.
미국을 바꾸려는 트럼프의 노력은 가상하지만, 현타의 무게는 압도적이고, 그가 내건 해결책은 모순의 딜레마다. 또 신뢰도나 일관성 없는 그의 언행 또한 큰 장애물이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제국 미국의 관성, 그리고 개혁에 대한 딥스테이트의 저항이라는 만만찮은 과제가 또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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