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제도 무시한 결단과 영혼의 통치 맹신
대중의 분노를 끌어올리는 음모론으로 선동
기존 민주주의·자유주의 질서 파괴로 귀결
초월적 결단에 근거한 선전 선동은 거짓말
미국의 계엄사령관, 일론 머스크
하루도 버티지 못할 계엄을 선포한 윤석열은 최근 트럼프 정부의 행정 명령에 의한 통치를 보며 ‘내가 왜 저런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탄식할 만도 하다. 경제가 비상사태라며 의회의 감독과 민주적 규제를 뿌리친 갖가지 행정 명령은 가히 계엄 정국을 방불케 한다. 미국의 경제지 이코노미스트는 3월 27일자 기사 ‘일론 머스크(Elon Musk)가 연방 정부를 통해 파워슬라이딩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통해 트럼프의 행정 명령과 일론 머스크의 정부 기구 초토화 행태를 자세하게 분석했다.
정부효율부(DOGE)를 이끌고 있는 일론 머스크는 핵무기를 비롯한 민감한 정부 데이터를 포함한 정부의 모든 디지털 정보에 무제한 접근권을 확보한 계엄사령관이나 마찬가지다. 3월 17일에 DOGE 요원들은 미국평화연구소(USIP)를 무단으로 진입했다가 이 연구소의 변호사가 이들의 무단 침입을 신고하여 출동한 워싱턴DC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행정부에 속하지도 않는 비영리 독립법인인 미국평화연구소가 3대의 차량으로 들이닥친 DOGE 요원에 저항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저항은 DOGE 요원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월 19일에 이 연구소를 폐쇄하라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제시하자 손쉽게 진압되었다. 대통령의 행정 명령은 미국의 원조 기관인 국제개발처(USAID)도 같은 방법으로 제거해버렸다. 일론 머스크가 그 부하들을 동원하여 정부 기관을 침탈할 수 있었던 것은 트럼프가 미국 디지털서비스(USDS)에 DOGE가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기 때문이다. 이 권한으로 DOGE는 국세청, 사회보장국, 노동부 등을 포함한 다양한 기관에 수시로 접속하여 사냥감을 고른다. 국세청(IRS) 직원들의 해고도 예고되고 있어 세수 시스템에 비상이 걸렸다. 머스크는 과학 연구와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예산도 삭감을 벼르고 있다. 정부 예산만 축내는 연구개발 카르텔을 척결하겠다는 의도다. 한 인터뷰에서 머스크는 “거대한 정부 자금이 좌파 시민단체로 보내지고 시민단체 지도자들은 왕과 왕비처럼 산다”는 음모론을 펼쳤다.
머스크에 따르면 민주당 의원들은 공금을 착복하고 유권자를 매수한 ‘반국가 세력’이다. 뿐만 아니라 선거를 조작하기 경합 지역에 분산된 2000만 명의 유권자는 부정선거 세력이고, 재생 에너지 사업에 투자한 공적 자금을 착복한 민주당 정치인은 파렴치한 세력이다. 이런 음모론은 말이 되지 않지만 시민단체와 민주당에 대해 공금을 착복하거나 외국인 노동자에게 자금을 제공하는 반역 세력으로 매도하는 걸 듣다 보면 기시감이 든다. 한남동 관저에서 나오던 윤석열이 “자유와 주권을 위협하는 세력”과 싸우다가 “이기고 돌아왔다”고 말하는 장면과 기가 막히게 겹치기 때문이다.
윤석열이 국회와 선관위와 법원, 노조에 대한 관점은 일론 머스크와 다를 것이 없다. 서초동 자가로 돌아온 윤석열이 만일 지금의 미국을 본다면 작년 12월 3일의 계엄령처럼 무리하게 군을 국회와 선관위에 투입할 것이 아니라 일론 머스크 같은 행동대장을 임명하여 자신의 행정적 권한을 활용하여 국회와 선관위나 법원을 족치는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한다. 그것이 어설픈 독재자인 윤석열에게 뼈저린 교훈이다. 국가의 긴급조치권을 비틀고 변형하고 요리하는 다른 방법을 찾았어야 한다. 윤석열과 트럼프가 다른 점이 있다면 국정을 혼란에 빠뜨리는데 준비된 철학과 조직과 계획이 있었느냐 여부일 것이다.
주권 결단주의와 영혼의 통치
트럼프 대통령 본인은 부동산 사업가 출신의 선동가이자 엔터테이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2기 트럼프는 기존의 자유주의가 만들어낸 국내외 질서를 전복할 철학과 역량을 주변에 포진시켜 놓았다. 민주적 법과 제도를 우회하여 엘리트들의 음모로 만들어진 정부, 즉 딥스테이트를 전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는 철학과 논리가 있다. 문정인 교수에 따르면 경제가 비상사태라며 헌법과 제도의 기능을 중단시키는 데는 대통령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주권적 결단(sovereign decision)이 트럼프의 기본 행태라고 한다. 대통령의 행정 명령이 초법적이더라도 대통령 자신이 초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인식이다. 1930년대 독일의 철학자 칼 슈미트의 결단주의가 현대적으로 환생한 셈이다. 이 결단주의는 공동체의 적을 설정한다. 외국인, 페미니즘, 노동조합 등 비주류를 배제해야 할 ‘그들’로, 백인 우월주의자와 그 주변세력을 보호해야 할 ‘우리’로 설정한다.
그러나 미국은 민주주의 종주국이며 자유주의 질서와 제도로 운영되는 나라다. 자유주의 제도와 규칙이 건재한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의 결단만 강조하는 것은 왠지 부족해 보인다. 번거롭고 복잡한 민주주의로 정치를 이해하는 것보다 격정적이며 선명하게 세상을 이해시키고, 일시에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더 강력한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하다. 평등, 공정, 연민과 같은 보편적인 자유주의의 가치를 초월하는 행동주의 철학은 없을까? 이 질문에도 준비된 답변이 있다. 소외된 대중의 분노를 한껏 끌어올리는 음모론, 무언가에 소속되고자 하는 열망을 국가와 교회와 극우 대중운동으로 흡수하는 강력한 선동이다.
이는 근대 계몽주의 이래로 발전해 온 인간의 이성을 넘어서는 종교적인 열정에 가깝다. 부통령 J. D. 밴스가 전파하는 그리스도 재림사상은 사회의 폭력을 종식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종교적 교리를 탐색한다. 지금은 사망한 프랑스의 문화철학자인 르네 지라르가 소환된다. 지라르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내전과 같은 폭력을 궁극적으로 막기 어려우며, 모든 사회의 폭력을 해소한 특별한 희생양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구현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의 폭력이 종식된다고 본다. 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가 아닌 영혼이 통치해야 한다.
윤석열의 실패한 꿈을 트럼프가 이룰까?
철학적으로 준비된 극우 사상은 지난날 자유와 평등을 조화시킨 보편적 가치로서의 민주주의, 개방적 체제가 사실은 엘리트의 음모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세계화 과정에서 대다수 미국인을 희생시킨 사악한 엘리트의 음모였다. 따라서 유주의 엘리트 정부를 전복하고 국가, 교회, 지역 공동체의 전통적 가치에 소속되며, 자신의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시켜야 비로소 미국인은 잘 사는 삶을 살 수 있다. 2기 트럼프를 보면서 윤석열은 “그게 바로 내가 계엄령으로 계몽시키려 했던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게다가 윤석열은 자신의 계엄 선포로 분노한 2030년 청년들이 깨어났다고 믿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개꿈’, 즉 견몽령(犬夢令)이다.
자유주의, 또는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인간이 행복해지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시민적 자유와 사회적 권리를 제공한다. 민주주의가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더라도 민주주의 없이는 행복해질 수 없다. 이를 잊고 어떤 종교적 열정이나 초월적 결단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는 선동가의 거짓말을 우리는 숱하게 겪은 바 있다. 그 대부분이 거짓말이라는 걸 그렇게 경험하고도 민주주의를 내버릴 만큼 국민이 어리석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의 비상사태가 길어질수록 그 점은 더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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