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신고하며 “죄 많은 사람”이라던 할머니
“다른 사람들보다 늦어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 위한 치열했던 삶
활동가들에게 치유, 아픈 이들에게 사랑의 손길
손영미 소장과 김복동 할머니 만나 평안하소서
길원옥 할머니를 처음 만난 것은 23년 전 이맘때였습니다. 남들보다 뒤늦은 1998년에 피해자로 신고를 하셨음에도 2002년 그때까지 할머니는 두문불출,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용기 내어 할머니께 전화를 걸었습니다.
“정대협에서 일하는 사무처장 윤미향인데요, 할머니 만나러 가도 돼요?”
“네. 오세요.”
그렇게 길원옥 할머니와 첫 번째 만남 약속을 잡았습니다. 바로 다음 날, 인천 연수동 10여 평 남짓 되는 영구임대아파트에서 할머니를 처음 만났습니다. 할머니는 말씀 내내 자신은 “부끄러운 사람” “죄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계속하셨습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이에요.”
다른 피해자들보다 10년을 늦게 얼굴을 내밀기까지, 가슴 속에 꼭꼭 숨겨놓은 이야기를 풀어내기 너무 힘들어 이야기의 주제가 과거로 들어가면, 할머니는 ‘기억이 안 난다’는 한마디로 장막을 쳤습니다.
“그걸 다 기억하면 살아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좁은 아파트 안에 가둬뒀던 역사를 밖으로 끄집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큼성큼 광장을 향해 걸어와 주셨어요. ‘기억 안 난다’는 말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말과도 같았습니다.
할머니의 기억은 활동 속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말씀 속에서, 당신도 아픔을 겪었으면서 또 다른 아픈 사람을 향해 힘내라고 응원하는 그 연대의 손길에서 사람을 향한 애정으로 피어났습니다. 할머니의 미소는 우리 활동가들에게 치유였고, 쉼 없는 노동, 지쳐 녹초가 된 고단한 몸에 보상이었습니다.
그렇게 길원옥 할머니는 침묵을 깨고, 세상을 향해 해방을 외치며, 피해자의 삶을 마주하는 우리의 생각도 해방시키며 함께 걸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니와 함께 걷는 걸음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이 참 행복했습니다.
평택 기지촌 할머니들을 향해 한 손에 마이크를 쥐고, 다른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며 “여러분 나서세요. 여러분이 부끄러운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을 그렇게 만든 정부가 나쁜 겁니다. 입 닫고 가만히 있는다고 부끄러움이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싸우세요. 그래야 부끄러움이 없어집니다. 언니인 내가 도울게요.” 그렇게 말씀하시던 할머니의 모습은 참으로 거룩하고 고귀했습니다. ‘나는 부끄러운 사람’이라는 첫 만남에서의 고백은 이미 달라져 있었습니다.
일본 전국 각 지역으로, 캐나다 여러 도시로, 호주 캔버라로, 멜버른으로, 시드니로, 네덜란드로, 독일로, 벨기에로, 스위스, 미국 여러 도시로, 프랑스까지, 지구를 여러 바퀴 돌면서 할머니는 “내가 너무나 많이 아팠기에, 다시는 그 누구도 이런 아픔 겪지 말라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시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할머니와 손잡게 하셨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늦게 나왔으니까.”
“다른 피해자들이 고생할 때 나는 편하게 지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다녀야 한다고, ‘왜 이렇게 다니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답하셔서 기자도 저도 놀라게 했습니다. 실상은 얼마나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시차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정부도 없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아흔이 넘어서까지 나그네처럼, 세계를 돌아다니며 ‘사죄하라, 배상하라, 전쟁을 하지 마라’ 그러고 외치며 사셨으니 얼마나 어깨가 무거웠을까요?
하지만, 할머니 우리 힘들었지만 또 그만큼 참 많이 행복했었죠? 함께 세상을 터벅터벅 걸으며, 함께 울며, 함께 웃으며,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나쁜 사람들을 향해서는 웃음으로 화살을 날리고, 아픈 사람들을 향해서는 사랑의 손길이 되며, 우리 그렇게 기쁘게 함께 걸어왔죠. 할머니 웃는 모습 보며 저도 덩달아 웃었고, 행복감에 기뻐하는 모습 보며 저도 덩달아 기뻤습니다.
2008년 평양에서의 할머니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열세 살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며 고향을 떠났던 길원옥, 67년 만인 팔순을 넘긴 할머니가 돼서야 다시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지요. 가는 곳마다, 만나는 이북 사람들에게 “혹시 성이 뭐예요?" ”길 씨 성을 가진 사람 없나요?“ 무리들 속으로 들어가 소맷자락 붙잡던 할머니의 모습이 참 슬프고 아팠습니다.
가끔 할머니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 고물상 하시던 아버지 이야기, 아버지보다 더 무서웠던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죠. 손가락 끝에서 평양 시내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눈동자에 고인 눈물 속에 그리움이 가득 차 있었지요. “다른 나라들은 자유롭게 올 수 있는데, 왜 내 고향에는 마음대로 갈 수가 없는가?” 하셨던 말씀이 잊히지 않습니다.
할머니께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할머니 살아계실 때 일본 정부에게 사죄 받아내겠다 한 약속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에게 성폭력 피해를 당했던 베트남 여성들에게 ”베트남 여성들은 낮아질 대로 낮아졌으니, 이제 높아지는 일만 남았다.“ 하시던 할머니, 한국 정부가 사죄하도록 애쓰겠다 하셨던 약속도 아직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아파요. 우리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차별을 하나요?“ ”우리 동포들이 왜 여기 일본에 남아 살게 되었어요? 일본 때문이잖아요. 오히려 특별대우를 하지는 못할망정 왜 차별을 합니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참의원 부의장을 면담한 길에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런데, 그렇게 열어놓은 길, 여전히 우리 아이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차별과 탄압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죠? 우리, 포기하지 않고 있어요. 지금도 매주 수요일이면 일본대사관 근처에서 수요시위를 하며 할머니가 부르셨던, 바위처럼 흔들리지 말자고 노래하며 외치고 있어요.
2012년에 할머니와 김복동 할머니가 시작한 날갯짓 따라 만들어진 나비기금은 베트남과 세계 전시 성폭력 피해자들의 정의 회복을 위해 지속적으로 날아가고 있어요. 재일 조선학교 아이들에게, 대학생들에게 김복동 언니와 함께 찾아가 “너희들에게 조국이 있다. 할미들이 도울 테니 공부 열심히 하라” 하셨던 그 약속을 ‘김복동의 희망’ 회원들이 꾸준히 지켜나가고 있어요.
할머니, 손영미 소장님과 김복동 할머니 만나서 얼마나 좋을까요. 그 모습,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 손영미 소장님의 할머니를 바라보는 눈빛, 할머니를 꼬옥 안고 우는 울음도 들리네요. 그래요 할머니, 보고 싶었던 우리 소장님 맘껏 보시고 예전에 그랬듯이 소장님께 “내 꺼 내 꺼” “내 꺼 만나서 너무 좋다” 어리광도 부리세요.
우리 김복동 할머니, “원옥아 왕대포 남겨두고 너도 왔니?” 하시네요. 손 꼭 잡고 걸어가는 세 여자의 뒷모습이, 왜 이렇게 부럽고 샘이 날까요?
사랑하는 길원옥 할머니, 할머니 떠나신 이 땅은 마지막 추위가 가기 싫다고 이번 주에 기승을 부리네요. 아마도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봅니다.
봄이 오는 저 언덕 너머에 모란봉 을밀대가 보입니다. 할머니 열 살 때 자주 놀았다던 보통강도 보여요. 할머니 눈에 선하게 새겨져 있던 평양시 서성리 76번지 26호 고향 집도 보이네요.
혼자가 아니어서 안심입니다. 손영미 소장님과 김복동 할머니와 손잡고 고향 가시는 모습, 상상만 해도 기쁩니다.
“우리 대장! 대장!” 부르시던 할머니 목소리가 들립니다.
“네 할머니, 저는 여기 이곳에서 할머니 뜻 기리고 이어가고자 하는 동지들과 함께 길원옥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다가 갈게요. 할머니 뜨겁게 뜨겁게 사랑합니다. 평안하소서.
2025. 2. 19.
윤미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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