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에게 총 겨눈 자들의 역겨운 거짓말과 변명

고상만 인권운동가(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사무국장)
고상만 인권운동가(전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 사무국장)

윤석열의 12.3 친위 쿠데타 당시 동원된 일부 군인의 처지를 두고 여러 말이 많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으로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항변하는 군인도 있다. 또 계엄사령관 박안수 육참총장의 명령으로 계룡대에서 ‘행선지도 모른 채’ 서울로 출발했던 군인들은 처벌에서 배제한다는 공조수사본부의 결론도 들려온다. 그야말로 한 순간의 시비로 누군가는 살고, 또 누군가는 ‘감옥에 갇혀’ 사회적 명성과 명예가 끝장나는 등 갈림길이 뚜렷해지고 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동원된 보통의 군인과 달리 장성급 사령관까지도 황당한 변명과 거짓말로 처벌을 회피하려는 여러 수작을 보니, 기가 막힐 일이다. 대표적인 인사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다. 그는 국회 국방위와 법사위 증인으로 출석하여 위원들의 질문에 “군인으로서 명령을 받았으며 그 과정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없었다”며 비겁한 변명으로 일관했다. 이전에 기세등등했던 충암파 일원의 모습은 오간 데 없다.

‘국민의 국군’을 부정한 장군들

함께 구속된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의 경우는 더욱 놀랍다. 그는 노상원 전임 정보사령관과 함께 롯데리아에서 수차례 내란 기획 회의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최초로 회동한 11월 17일 모임 당시 노상원은 ‘자신이 직접’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족쳐서’ 부정선거 전모를 밝히겠다며 야구방망이·니퍼·케이블타이 등을 준비하라고 지시 내렸다고 한다. 그러자 문 전 사령관은 동행한 정보사 대령 2인에게 “(국방)장관님의 지시, 명령이 있으면 군인으로서 따라야 하지 않겠냐”며 설득한 것으로 전해졌다.

 

왼쪽부터 박안수, 문상호, 여인형
왼쪽부터 박안수, 문상호, 여인형

그야말로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과거 연이은 군사 쿠데타로 헌정질서가 유린되었던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된 가해자 처벌이 없었으니 아무런 교훈도, 깨달음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된다. 하물며 이런 자들이 이 나라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지는 막중한 지위에 있었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언급한 이 자들만 문제가 아니다.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관을 비롯하여 곽종근 전 특수전사령관, 그리고 그 아래 일일이 거명하기 힘들 만큼의 최고위급 장성과 간부들이 대동소이한 잘못을 저질렀다. 그중에는 내란 혐의 수사가 진전되면서 내란 당일의 본인 언행이 ‘사실과 다른’ 의혹도 드러나고 있다. 국민을 두 번, 세 번 속이고 있는 것이다. 육사 생도 시절부터 장군이 된 지금까지 국민의 세금으로 의식주 일체를 사실상 제공받으며 살아온 군인들이 이럴 수 있는가.

목숨 바쳐 반란군 막아섰던 일개 병장

이런 비겁한 장군들의 언행 앞에서 나는 지난 1979년 12.12 군사반란 당시 전두환의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잃은 고 정선엽 병장의 최후를 떠올린다.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정선엽 병장은 군사반란 당시 국방부장관마저 도망친 국방부 B-2 벙커를 홀로 지켰다. B-2 벙커는 유사시 전쟁이 발발하면 전투를 지휘하는 중요 시설이다.

 

영화 '서울의 봄' 속 한 장면.
영화 '서울의 봄' 속 한 장면.

정선엽 병장은 그 벙커를 지키고자 자원하여 배치되었다. 그리고 운명의 시각인 12월 13일 새벽 1시경, 실탄 장전된 총을 들고 반란군들이 국방부로 몰려왔다. 이어 총을 내려놓고 투항하라는 지시에 국방부 내 다른 군인들이 순순히 따를 때 그는 혼자서 저항했다. 사건 당시 숨어서 이 장면을 목격한 방위병의 증언에 의하면 정 병장은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중대장님밖에 없다”고 말한 후 반란군과 격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것이 그의 최후였다.

정선엽 병장이 정말 뭘 몰라서 그랬을까? 아니다. 정 병장은 그날 밤, 어떤 게 국민의 군대이며, 누가 반란군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는 정 병장이 B-2 벙커 근무를 자원했다는 사실 앞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제대 3개월을 앞둔 말년의 정 병장이 애초에 배치된 경계 근무지는 국방부 건물 내 보안실이었다. 매우 안전한 곳이었다. 하지만 정 병장은 B-2 벙커에 이제 막 전입온 이등병을 배치하자 자기 대신 안보실로 이등병을 보낸 후 자원하여 벙커로 갔다. 중요 시설인 벙커를 반란군들에게 빼앗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반란군이 몰려왔지만 정 병장은 투항 강요에 따르지 않았다. 그 밤에 반란군에 맞섰던 군인 중 목숨을 잃은 군인은 두 명뿐이었다. 정선엽 병장, 특전사령관을 지키려 했던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이 그 두 명이었다. 그 반란의 밤에 국민의 군대로서 본분을 다한 군인이었다. 나는 두 군인의 이름을 잊지 않고 그 공적을 알리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이 시대의 또 다른 의무라고 늘 생각한다.

 

고 김오랑 중령(추서) 묘소
고 김오랑 중령(추서) 묘소

생각하지 않고 추종만 한 자들의 업보

1958년 8월, 장준하 선생이 발행했던 <사상계>에 함석헌 선생이 기고한 글이 필화 사건으로 번졌다. 이승만 독재의 말기적 증세가 심화되어가던 그때, 이를 비판하는 함 선생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이었다. 이승만 독재에 비관 대신, 백성이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이 글이 그들은 무서웠던 것이다. 결국 함석헌 선생은 이 필화 사건으로 감옥에 끌려가 고초를 겪는다. 하지만 그런다고 진실마저 갇힐 수는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도 글의 감동이 살아 있는 이유다.

12.3 윤석열의 내란 후 어느덧 한 달여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드러나는 진실 앞에서 관여된 자들의 실체는 참으로 초라하다. 길게는 2022년 3월 윤석열 대선 캠프 때부터 김용현은 ‘정치적 반대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계엄을 언급했다는 증언도 나오고 있다. 또한 구속된 이들은 물론이고 현재 수사 대상인 군인 다수가 윤석열의 내란 발표 전 이미 계획을 구체적으로 듣거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윤석열의 대국민 반란 획책을 국민에게 알린 자가 아무도 없다. 나는 그 점이 놀랍고 또한 충격적이다.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도 사건에 연루된 군인들 중 상당수는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고 한다. 군인으로서 대통령 명령을 수행했을 뿐인데 왜 우리가 영화 <서울의 봄> 속 전두광을 따른 반란군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투다. 하지만 자업자득이다. 생각 없이 추종한 업보다.

국민에게 총 겨눈 당신들, 억울해 할 자격도 없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1조도 모르면서 내란 수괴범 윤석열과 그를 추종하는 김용현 따위의 명령만 따랐는데 뭐가 억울할까. 국민의 군대가 왜 국민에게 총을 겨누나, 왜 반역을 하나. 이런 것도 몰랐나.

생각하는 군인이라야 산다.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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