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시차 건너뛰어 겹치는 역사의 한 반복
2025년 새해 첫 날의 아침을 불확실성과 혼돈 속에서 맞는다. 대한민국을 덮고 있는 짙은 안개와 먹구름은 언제나 걷힐 것인가. 시간의 흐름에는 단절과 중단이 없지만 그럼에도 매듭을 짓는 이 시간의 구분 속에서 우리는 해가 바뀌면 뭔가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애써 갖는다. 아니 희망을 만들어보려 한다.
지난해 12월은 잔인한 달이었다. 한국 사회가 ‘지옥’을 경험한 시간이었다. 비상계엄이라는 내란이 덮쳤고, 거기에 1년의 마지막 휴일에 남녘에서의 참사는 200명에 가까운 이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어쩌면 그 죽음은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죽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란이 초래한 지옥의 시간은 또한 단련의 시간이었다. 한국 사회는 일순 나락으로 떨어짐으로써 패배했다. 그러나 또한 승리했다. 패배가 있고 나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패배 속에 승리가 있었고 승리 속에 패배가 있었다. 한 달 새에 벌어진 그 숨 가쁜 사건들, 삶과 죽음의 교차는 한국 사회가 통과하고 있는 초농축의 시간을 보여줬다. 시민들은 무안공항에서의 참사 희생자들을 위해 “우리는 광장에서 함께 애도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 애도는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희생을 애도하는 것과 함께 다른 무엇을 또 애도할 것인지를 또한 묻는 것이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누군가 말했다.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나 역사적 상황은 되풀이된다. 한국인에게는 을사년을 맞는 올해 이 말의 의미가 더욱 절실하다. 을사년을 맞이하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처해 있는 상황은 한편으로 120년 전 을사년으로 돌아간 듯하다. 120년 전 밖으로부터의 괴멸, 그리고 지금의 내란이라는 안으로부터의 궤멸. 지난 을사년의 외환이 120년 뒤인 지금에 내란으로 모습을 바꿔 다시 나타난 듯 그렇게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의 ‘을사년’들은 120년간의 시간을 건너뛰어 겹쳐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 깊게 우리의 지난 100여 년을 돌아다보면 1905년은 과거가 아닌 늘 현재였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실은 지난 120년의 우리 역사의 굴절과 파란은 1905년 을사년이 과거가 아니라 그 연장이 돼 왔음을 깨닫게 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안목이 깊고 넓을수록 ‘현대’의 범위는 확장된다. 역사를 보지 못하면 불과 30년 전의 일도 과거이겠지만 긴 역사의 흐름을 보는 이에게는 100년, 200년 전의 일이라도 현대가 된다. 이런 점에서 을사년은 과거가 아닌 현재다. 과거 그 자체는 아니라도 현재화된 과거다. 우리가 120년 전의 좌절과 실패를 살펴보는 것은 그래서 과거사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우리의 현실과 숙제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 헤르만 헤세는 시 ‘귀향’에서 ‘오너라, 오랜 고통이여’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타향에서 나그네 노릇을 하고는 훨씬 평온해졌지만, 고통을 다시 원한다’고, ‘우리는 다시 싸우려고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돌아가야 할 고향은 ‘고통’이다. 고통과 싸우는 것이 곧 귀향인 것이다.
우리의 삶에 희망이란 게 있다면, 우리가 어떤 희망을 찾으려 한다면, 그건 고통과의 대면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이 없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 고통을 받아내며 고통을 견뎌내며 고통을 이겨내려는 것, 그것이 곧 희망이다. 그것을 ‘빛’이라고 한다면 광화문(光化門)에서 펼쳐지는 촛불의 빛(光)일 것이다.
지난 한 달간 촛불과 응원봉의 드라마는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냈다. 광화문과 전국의 거리에서 수백만 사람들이 펼쳐보이고 있는 것, 그것은 하나의 부활제다. 민주주의의 부활제이며 국민주권의 부활제이며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됨의 부활제다. 그 부활이 더욱 부활제인 것은 이 거대한 축제가 추운 겨울, 동토(凍土)의 계절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고 했지만 실은 빛은 어둠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겨울이 길고 어둠이 깊었기에 촛불과 응원봉의 빛은 더욱 뜨겁고 밝았던 것이다.
촛불 시민들은 머잖아 ‘이겼다’는 환호를 지르게 될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승리의 기쁨을 분출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알고 있다. 그 승리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라는 것을. 승리는 무능하고 타락한 권력자를 끌어내림으로써 이뤄지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가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2년 반 전, 아니 윤석열을 키워 왔던 지난 수십 년간의 그것과는 다른 사회를 만드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광장의 촛불 시민들은 잘 알고 있다.
나라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부숴버린 자신의 혐의에 대해 무례와 파렴치로써 응답하는 그의 행태는 한 권력자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한국사회의 바닥, 우리 사회가 지금 놓여 있는, 그리하여 반드시 그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한 바닥이다. ‘윤석열’을 있게 한 것, 그를 최고 권력으로 올라서게 한 것, 그의 망상과 광란극을 가능케 했던 것,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우리 사회가 지금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윤석열’은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맺으려는 ‘끝’은 시작의 끝이면서 동시에 끝의 시작이어야 한다. 대한민국은 광장에서 순간순간 죽으면서, 순간순간 태어나야 한다는 것, 그 순간순간의 끊임없는 생과 사의 연속이 촛불의 시작이며 끝이다. 영원히 이어지는, 영원히 이어져야 할 시작과 끝이다.
새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고통과 시련의 시간,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더욱 단련시키고 정화시킬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듯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그런 다짐을 우리는 새해의 이 첫날 아침에 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 다짐은 또한 120년 전 을사년의 시간으로 돌아가보는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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