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니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났다
가장 추운 동짓날에 펼쳐진 대동마당
대체 농민들에게 왜?
2024년 12월 21일, 온라인 커뮤니티 ‘더쿠’ 게시판에는 남태령에서 경찰의 폭력 진압에 맞서 외롭게 싸우고 있는 농민들의 소식이 드문드문 올라오고 있었다. 이날은 광화문 집회, KBS 연예대상, SBS 연기대상이 동시에 열리는 날이라 남태령 상황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해 질 무렵, 경찰이 차벽을 쌓고 방패를 든 채 진압 준비를 한다는 현장 영상이 공유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특히 낮에 경찰이 트랙터 유리창을 깨고 강제로 농민을 끌어내는 영상이 올라오자 충격을 더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 이어졌다. “도대체 고령의 농민들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장갑차와 탱크는 못 막았으면서 트랙터가 뭐길래 막는 걸까?” “행진 신고를 냈는데 경찰은 왜 일부러 교통체증을 일으키는 걸까?” 등과 같은 댓글이 쏟아졌다.
그리고 ‘ㄱㄱ’라는 단호한 댓글이 속속 올라왔다. ‘고고’, 즉 ‘현장으로 간다’는 뜻이었다.
몸은 춥지만 마음은 따뜻하고 강해졌던 밤
현장으로 ‘고고’한 2030 여성들은 칠흑 같던 남태령 고개를 삽시간에 알록달록한 빛으로 물들였다. 광화문 집회를 마치고 돌아가다 발길을 돌린 이들도 많았다. 응원봉을 든 2030 여성들은 경찰이 자신들을 폭력으로 진압하는 모습은 꺼릴 것이라며 한걸음에 달려왔다고 했다. 정오부터 고립되어 있던 농민들은 환한 표정으로 이들을 반기면서 ”2030 여성들이 오니까 경찰이 더 이상 강제 진압을 하지 않는다”며 안도했다. 그러면서도 “시민분들께 집에 돌아가시란 말도, 여기서 이 자리를 계속 지켜달라는 말도 못 드리겠다. 어떻게 해야할지 솔직히 모르겠다”는 막막한 마음을 전했다.
꼬박 6일을 운전해 상경한 이들이 서울 진입을 코앞에 두고 맞닥뜨린 것은 무자비한 공권력이었다. 큰 봉변을 당한 농민분들은 또 다시 홀로 남겨질까 봐 두려워들 하셨다. 현장의 2030 여성들은 “우린 음방 사녹(음악방송, 사전녹화) 밤샘 경력직이고, 이미 차가 끊겨서 집에 못 간다. 우리가 지켜드리겠다”면서 농민들의 손을 맞잡았다. 농민들은 “이런 사랑과 관심 처음이라 행복하다”며, 그동안 경찰이 때리면 맞고 오로지 농민들끼리 아파하고 슬퍼했다고 했다.
농민들이 그동안 공권력에 당한 일들이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해지자 연대하는 사람은 더 늘어났다. 현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유튜브 생중계를 ‘스밍’하며 각자의 자리에서 감시를 이어갔다. 나 역시 전농tv, 제이컴퍼니, 나두잼, 안진걸tv, 황기자tv, 미디어몽구 등 여러 유튜브 채널을 동시에 띄우고 남태령 현장 이곳저곳을 지켜봤다. CCTV 여러 대를 스위칭해서 보는 느낌이었다.
흡사 명박산성을 연상시키는 차 벽 뒤로 방패를 든 경찰 기동대가 진압 준비를 하고 있었고, 많은 경찰이 사람이 다니는 인도를 점령한지라 시민들은 빙판길을 위태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얼음장 같은 아스팔트에서 4시간 넘게 1인 시위하던 시민이 저체온증으로 몸이 굳어 홀로 앉아 있었지만, 경찰은 시민을 돕기는커녕 구급차 진입까지 막았다. 현장 시민들 항의로 가까스로 구급차가 들어와 이송했으니 망정이니 큰일 날 뻔했다.
마치 비상계엄 상황 같았다. 사람들이 남태령으로 모여들자 경찰은 신분증 검사를 하며 현장 접근을 통제하려 했다. 영장 없이 체포할 수 있다는 포고령이 또 내려진 걸까. 경찰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은 외면한 채 여전히 윤석열과 내란 동조자들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듯했다. 강추위 속에 시민들이 지친 틈을 타 농민들을 기습적으로 체포하려는 것 같았다. 아무리 봐도 무력 진압이 예정된 것처럼 느껴졌다. 서울이 어디라고 감히 올라오느냐고, 까불면 맞는다는 보여주기식 진압. 시민 교통 불편을 가중시켰다고 덮어 씌우기 위한, 그동안 공권력이 관행처럼 만들어 온 ‘그림’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과 몇 대의 트랙터를 막기 위해 이토록 많은 경찰 병력을 동원했을 리가 없다.
계엄 같은 상황 속에서도 2030 여성들과 시민들은 행동으로 연대하며 밤새 서로를, 남태령을 지켰다. 집에 있던 사람들은 전국농민총연맹과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후원 인증을 잇따라 올렸고,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보낸 배달음식 인증도 이어졌다.
이 상황을 잘 몰랐던 남태령 집회 사회자는 누군가 보낸 피자 서른 판이 도착하자, “피자 30판을 천 명이 나눠 드시는 기적을 보여주십시오!”라고 외쳤고, 진짜 기적이 일어났다. 뒤이어 전국에서 보내준 죽, 떡볶이, 어묵, 김밥, 우동, 국수, 국밥, 따뜻한 차 등을 실은 배달 오토바이가 남태령에 속속 도착하기 시작한 것. 80년 광주의 주먹밥도 이런 마음으로 뭉쳐졌을 거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연대는 계속 이어졌다. 핫팩, 여성용품, 비상약, 물, 응원봉 건전지, 방한용품 등을 직접 갖고 오는 시민이 있는가하면, 때론 퀵서비스로 전달되기도 했다. 현장에선 자원봉사팀이 자연스레 꾸려져 필요 물품을 밖으로 알리고, 도착 물품을 현장에 배포하는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도 운영되었다. 심지어 대형 리무진 난방 버스를 보내준 시민도 있었다. 고령의 농민들과 저체온증으로 위험 신호가 온 분들을 위해 마련했다는 이 버스는 경찰 차벽에 막혀 한동안 진입이 어려웠지만, 여러 대의 추가적인 난방 버스 후원을 이끌어내 한강진역 윤석열 관저 앞 행군에 큰 역할을 했다.
지방과 해외에 있는 국민들도 국회의원 연락처를 공유하며 릴레이로 연락해 상황의 심각성을 알려 이들이 현장에 오도록 이끌어냈다. 국민신문고와 112에 경찰의 불법 진압에 대해 민원 신청을 하자는 독려도 이어졌다. 국민들을 함부로 대하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민원이 폭주해서였을까. 경찰청은 그 새벽에 국민신문고 교통법규 위반 신고 서비스를 일시 중단한다는 공지를 내기도 했다. 온라인 전투도 그토록 맹렬했다.
묵묵히 도운 사람들도 있었다. 남태령에 가는 택시비를 받지 않은 기사님, 극세사 목도리를 집회 참가자들에게 건네준 근처 세차장 분들, 의료지원단, 민변 집회인권감시단, 현장 영상을 찍어 실시간 방송을 해준 유튜버들은 남태령 밤을 밝게 비춰준 이들이다. 인근 사찰 정각사는 화장실을 개방해주었고, 남태령역도 평소보다 일찍 화장실과 개찰구를 개방해 조용히 시위 참가자들을 배려했다. 한 집회 참가자는 SNS에 “새벽 6시에 몸이 너무 얼어서 남태령역에 들렀는데 엄청 후끈하더라고요. 다른 지하철 역사에 내렸는데 비교될 정도로 추웠어요. 남태령역이 시민들을 위해 히터를 틀어줬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습니다”라며 남태령역 역무원들의 수고를 알렸다. 1일 이용객 2천 명 정도인 자그마한 역에 수천 명이 몰려 당황했을 텐데, 근무자들은 차분하고 따뜻하게 시민들을 안아주고 보호했다.
그동안 관심받지 못하고 공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탄압받아온 농민 집회와는 다른, 참 이상한 집회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은 더 모였고, 경찰의 차벽은 물리적 충돌 없이 무너졌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에, 누군지도 모르는 이름 모를 낯선 이들이 서로의 동지가 되는 기적이 남태령에서 일어났다.
무명 소녀들이 만든 역사, 12.21 남태령 대첩
“나는 소녀들이 오는 걸 봤어. 나와 함께 토요일 밤에 남태령에 도착한 여자들. 미친 계단을 오른 여자들. 계속 증가했던 여자들. 응원봉을 하나둘 밝히던 여자들. 60대가 어린 축이라던 여성 농민 사회자. 어린 목소리로 자유 발언하던 여자들. 무지개 깃발을 흔들던 여자들. 남태령역에 서있을 때 내 앞에서 흔들리던 여대 깃발. 새벽이 올 때까지 끊임이 없던 음식과 핫팩과 방석과 담요를 보내준 사람들. 후원을 쏘는 사람들. 함께 방송으로 지켜봐 준 사람들. 그리고 밝아진 새벽에 지하철 문이 열리고 걸어 나온 여자들. 소녀가 왔어. 왜 소녀냐고 말했냐면, 진짜 다들 소녀였어. 작은 패딩과 담요로 둘둘 말은 모습이 여중,여고생 때의 바이브가 있었어. 그리고 나는 소녀는 걍 어린 사람이 아니라 알 건 엥간 알아서, 두려움도 있지만 용기로 그걸 이기는 존재라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남태령 농민들도 소녀인 거임. 60대 남성 농부 소녀가 지은 쌀로 만든 밥 맛있다”(2024.12.23. 02:13 온라인 커뮤니티 ‘더쿠’에 올라온 무명의 더쿠 글 중)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깜짝 놀랐다. ‘두려움도 용기로 이기는 존재로서 60대 남성 농부 소녀’라는 정의는 그간 지독하게 구별해 왔던 젠더, 세대, 계급의 경계를 가볍게 툭 무너뜨린다. 연대하고 있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낸다. 작고 연약한 존재일지라도 가장 빛나는 때의 모습을 간직한다면,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 낼 수 있음을 소녀들이 알려주고 있다.
전봉준투쟁단 총대장이자 전국농민회총연맹 하원오 의장도 소녀들의 용맹함에 이렇게 화답했다. “역사는 지난 이틀을 ‘남태령 대첩’으로 기록할 것입니다. 그저 이겼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혐오와 차별 속에 주류사회에서 배제되어온 여성, 성소수자, 청소년, 노인, 도시빈민, 농민이 만든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성별도 세대도 지향도 직업도 다른 이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연대를 넘는 ‘대동의 남태령’을 열어냈기 때문입니다”.
1894년 우금티 농민들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조정과 일본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1980년 5월 <소년이 온다>의 동호는 거대한 두려움 속에서도 계엄군에 맞서 광주를 지켰다. 2024년 12월 남태령의 소녀들도 그랬다.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공권력의 폭력에 맞서 끝까지 자리에서 싸웠다. 그곳엔 응원봉을 든 이름 모를 용사들이 있었다.
갈 길은 멀어도 힘이 난다. 참으로 의롭고 용기있는 소녀들이 뚜벅뚜벅 와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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