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 火가 너무 많다"며 국민들에 훈계

내란 사태, 아직 분노가 필요한 상황에서 '타협' 얘기

조선일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 계속될 이유 보여줘

탄핵이 가결된 뒤 처음 나온 16일 월요일자 신문들은 일제히 1면의 머릿기사를 탄핵 관련 기사들로 내보냈다. <윤석열 1차 소환 불응> <야당의 ’국정안정협의체’ 거부한 여> <“민주주의 살렸다, 이젠 경제 민생 살려야”> 등의 제목들이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신문만은 전혀 다른 내용의 기사를 머릿기사로 올렸다. 바로 <“우리 사회에 火가 너무 많다”>는 기사를 큼지막하게 실은 조선일보다.

‘원로인터뷰 시리즈’의 첫 번째로 조계종 종정 성파 스님을 만난 조선일보 기자는 경남 양산 통도사의 서문암을 찾아 “국회의 대통령 탄핵이라는 격랑 속에 빠진” 속세에서 떨어진 ‘적막한 산사’에서 노스님으로부터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과정에서 분열과 갈등이 염려된다” “타협하고 경청하는 인성교육과 인욕(忍辱)이 절실하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조선일보의 눈에는 대통령과 내란 세력에 의한 위헌 사태를 국민들과 함께 헌법기관인 국회가 바로잡은 것에서 분노와 화에 빠진 우리 사회가 무엇보다 먼저 보이는 듯하다. 그런 국민들에게 분노와 화를 멈추고 평정을 찾으라고 훈계하는 듯하다. 차마 자신들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인지 산사의 종교 지도자를 찾아 그의 권위를 빌어 대신 국민들을 나무라는 듯하다.

조선일보의 이 같은 보도는 우리 사회의 중대한 사태 때마다 이 신문이 보여왔던 태도를 다시 한 번 드러낸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엉뚱한 방향으로 논점을 전환하는 것이다. 그것도 스스로 얘기하듯 ‘세속’의 문제를 ‘산사’로 끌고 들어와서는 노스님의 말까지 이용해 결국 불가의 가르침까지 왜곡하고 있다. 세속의 절실한 문제를 호도하면서 동시에 산사의 ‘청정한 법어(法語)’까지 모독하는 것이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불교에서의 가르침은 분노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일 수 없다. 다만 분노를 제대로 사용하고, 지나친 분노는 억제하라는 것이다. 분노할 일에는 오히려 분노해야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의 교훈일 것이다. 불가에서 지헤를 불에 비유해 ‘혜화(慧火)’라고 한 것도 이와 통하는 이치다. 조선일보의 이 인터뷰에서 성파 스님이 말했듯 '성내는 마음 진심(瞋心)'이 경계해야 할 것인 이유는 그것이 정당한 이유가 아닌 탐(貪)과 어리석음(痴)에서 비롯된 분노이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광장의 국민들의 분노에 대해 이제 타협하고 경청하라면서 분노를 멈추라고 얘기하는 듯하다.  국회에서의 탄핵 가결은 내란 사태 해결의 끝이 아닌 겨우 시작일 뿐인 상황에서 분노와 화를 멈출 때인지는 여기서 짚지 않기로 한다. 다만 조선일보가 먼저 돌아봐야 할 것은 이제 그만 화를 멈추라고 할 만큼 자신들이 그동안 국민들의 정당한 분노와 화를 제대로 봤으며 제대로 보도했는가, 라는 것이다. 

단적인 보도의 하나가 탄핵 표결이 이뤄지던 14일의 탄핵 집회 교통 체증 기사였다. 이날 여의도 국회 앞에 200만 명의 시민들이 모여 탄핵 가결을 요구하며 주권자의 분노를 표출할 때, 조선일보의 인터넷판은 “탄핵 찬반 집회로 서울의 교통체증이 심하다”고, 썼다. 내란 심판 민심의 열기를 교통 체증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이었다.  

조선일보의 계엄 사태 보도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 신문에 대해 우호적인 인물들로 구성된 독자권익보호위원회조차 지적을 했다. 13일 조선일보가 보도한 12월 독자권익위에서 “위헌적 계엄 사태가 급박하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를 전하는 조선일보의 톤이 지나치게 조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계엄 선포는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탄핵안 표결에 집단 불참한 여당 의원들에 대해서는 훨씬 더 날카로운 비판이 있어야 마땅했다”는 평가들이 나왔다.  

이 회의에서 한 위원은 “편집국이나 논설실의 어떤 바이어스(bias·편향)로 인해 조선일보 전체가 일종의 집단 사고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같은 집단 사고의 하나가 성파 스님 인터뷰 기사에서도 보인다. 조선일보의 기자는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심각하다고 걱정한다. 그러나 분열과 갈등 없이는 통합도 평화도 올 수 없다. 언론에 더욱 필요한 것은 분열과 갈등을 제대로 주목하고 그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다. 분열과 갈등을 분노로써 제대로 노출하지 않고는 그 해결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이 인터뷰에서 경청과 타협을 얘기하고, “사회 전체에 분노, 화가 많다”면서 슬그머니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로 몰고 간다. 국민들의 뜻을 받든 국회 탄핵 가결 과정은 ‘정치’의 한 부분이 작동된 것을 보여줬지만 이 신문은 ‘정치인 전체’가 “상대에 대해선 욕심이라 하고 자신은 사명감이라고 한다”며 정치인 모두를 똑같은 집단으로 매도한다.

김상수 작가는 페이스북에서 조선일보 사회부장의 지난 2009년 발언을 소개했다. “조선일보를 대표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우리 조선일보는 정권을 창출할 수도 있고 정권을 퇴출 시킬수도 있습니다.” 김 작가는 "그렇다면 ‘몰상식과 불공정’의 이 불량품을 제조한 조선일보는 이것을 수거 처리하는 데 제대로 일조(一助)해야만 한다"고 질타했다. 

조선일보는 김 작가의 말대로 '내란 사태' 혹은 그 사태의 근본원인인 '윤석열 사태'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있는가. 김민석 민주당 최고위원의 ‘계엄 준비설’을 음모론 취급해온 조선일보는 지난 5일 주필 칼럼 <‘계엄 준비설’ 제기… 김민석이 맞았다>에서 민주당에 사과했다. 이 칼럼이나 자사에 비판적인 독자권익위의 의견을 지면에 실은 것에서 조선일보가 책임 지는 모습을 보인 것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노와 화를 그만 멈추라는 '국민들에 대한 훈계'는 조선일보에 그같은 책임 의식은 장식품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선일보는 여전히 '조선일보'이며, 앞으로도 '조선일보'일 듯하다. 적잖은 국민들이 조선일보에 대해 분노와 화를 멈추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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