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학 열사(학살 당시 광주상고 1학년)의 묘비
문재학 열사(학살 당시 광주상고 1학년)의 묘비
전일빌딩245에 남은 공중 사격의 흔적들.
전일빌딩245에 남은 공중 사격의 흔적들.
윤상원 열사의 동상이 놓인 살레시오 고등학교.
윤상원 열사의 동상이 놓인 살레시오 고등학교.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산화한 시민들의 영정.
반란군에 맞서 싸우다 산화한 시민들의 영정.

노근리 평화공원을 방문하고 3주 뒤, 11월 9일 아침 일찍 열차를 타고 광주역으로 내려갔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급하게 준비를 마치고 달려서 6분을 남기고 도착하여 열차를 탔다. 지난 1부에서도 행운을 말했듯, 이번에도 행운의 순간이었다. 막연한 상상이 구체적인 결심으로 이어지고 그것을 실행하는 매 순간이 하나의 사건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은 필자의 큰 변화이다.

3시간 40분 동안 기차를 타고 광주역에 도착했다. 지도를 보니 해당 지역이 한강 선생의 고향이고, 광주역 북쪽에는 선생이 10세 때까지 다닌 효동초등학교가 있음을 알았다. 낯선 곳을 방문할 때, 특별한 사건을 연상함으로써 그곳에 얽힌 것들을 더 잘 기억한다고 한다. 광주라는 한 지역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고향으로 세계에 알려지니 그렇지 아니한가?

먼 길의 끝에서, 예전에 알게 된 신부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실현했다. 바로 아시아문화전당(ACC)을 찾았다. 이 날은, 선생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발표가 나오고 30일 뒤이다. 아시아문화전당에서 전시 작품을 감상한 뒤 한 청년을 또 만났다. ACC 옆에는 옛 전남도청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참조 1)

필자는 신부 그리고 이날 만나기로 약속한 광주 여성 청년 한 명과 함께 전일빌딩245를 방문했다. 다른 방문자들처럼 1층에서 선생의 책들이 전시되어 있는 공간을 둘러보고, 위층의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10층에 올라, 거울에 비친 총탄 자국을 보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조사로 2016년, 이 건물에서 총탄 245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계엄군이 헬기에서 기관총 사격을 가한 증거이다.

수많은 증거로써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벌어진 계엄군의 만행이 천하에 드러났다. 하지만 아무리 증명하고, 증거를 보강해도, 진실은 저절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도 목도하고 있다. ‘탈진실’의 시대라고 하지 않던가. 거짓을 진실로 믿게 하는 선전의 기술이 가상 세계에 널려 있다. 탈진실의 시대, 정보가 더욱더 빠르게 퍼지는 시기라 참과 거짓을 분별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진실을 부정하려는 시도는, 그런 현실의 빈틈을 노려서 이익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고민할 시간이다.

여성 청년과 작별하고, 신부와 함께 광주 북구 민주 묘지를 방문했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계엄군에 맞서 싸우다 쓰러진 시민들, 그리고 학살에서 살아남았지만 나중에 실상을 알리려고 애쓰다 국가 폭력의 표적이 된 시민들이 묻혀 있었다. 

위령탑 뒤쪽의 묘비들을 하나둘씩 둘러보았다. 시민들의 이름, 출생일, 사망일을 둘러보았다. 선생의 소설 <소년이 온다>의 인물 동호의 모티브가 된 문재학(1964. 06. 05-1980. 05. 27.) 열사의 묘비를 찾았다. 그는 옛 전남도청에 남아 사상자들을 수습하다가, 5월 27일 계엄군에 의해 사살당했다. 그의 묘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유공자들의 영정을 일일이 둘러보며 그들의 이름을 읽었다. 

사망자들을 숫자와 통계로만 나타낸다면 그들은 기억될 수 없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름으로써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해야 그들을 망각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윤상원(개명 전 윤개원), 이한열, 백남기 등… 학살 사건 이후에 세상을 떠난 시민들 또한 잊지 않도록 이름을 읽었다. 열사들의 영정을 둘러보며 파리 코뮌, 베트남과 알제리의 독립 투쟁 등 살육을 자행하는 권력에 맞서 싸운 자들의 역사를 떠올렸다.

민주 묘지를 참배한 후 신부와 함께 담양군으로 이동하여 저녁을 먹고 살레시오 중고등학교를 방문했다. 살레시오 고등학교 교정에서 졸업생 윤상원 열사의 흉상을 찾았다. 피리를 연주하는 열사의 모습이다. 이 동상은 2007년에 세워졌다. (참조 2) 필자는 스스로의 모습을 동상에 투영하였다. 

동상 앞에서 묵념한 후, 신부와 작별하고 저녁 열차를 타기 위해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광주송정역으로 가서 열차에 탑승함으로써, 11월 9일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신부와의 대담은 한강으로 시작해 윤상원으로 끝났다. 하지만 열차 안에서 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방문한 담양에 자리한 육군 특수전사령부 산하 제11공수특전여단(이하 11공수)은 1980년 5월, 광주 금남로에서 자행된 학살에 가담한 부대이다. 이 부대가 2016년, 6.25 기념일 광주에서 시가 행진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그 계획은 취소되었다. (참조 3) 이것으로 보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학살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필자는 2014년 5월부터 2016년 2월까지 육군에 복무하였는데, 필자가 복무한 부대와 같은 울타리 안에 있는 제2기갑여단 16전차대대가 1979년 12월 12일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11공수가 5월 광주 학살에 가담한 부대로서 광주에서 행진을 강행하는 것은 광주 시민들에게 만행을 상기시킴으로써 정신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다. 영원히 작별할 수 없는 근원의 기억을 깨우는 행위이다. 이것이 선생의 소설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2020년 10월 국회 국정감사 중, 당시 육군참모총장 남영신 대장은 육군이 학살을 자행한 사실에 대하여 처음으로 공식 사과를 내놓았다. (참조 4) 남 대장은 육군의 수장으로서 처음으로 책임을 인정하며 사죄했으나, 반란과 학살의 주동자 전두환은 일말의 회개도 사죄도 없이 2021년 사망했다. 책임자들이 자신의 책임을 오롯이 인정하지 않는 한 그들의 만행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고, 피해자들의 고통은 온전히 위로받을 수 없다. 

이제 시민의 사명에 대하여 스스로 물을 시간이다. 작별할 수 없는 근원의 기억인, 학살이 자행된 그날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각자의 생각을,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말과 함께 전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독자들 또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를 바란다.

■ 참조 기사

1. https://m.jnilbo.com/75465649795 옛 전남도청 복원…1980년 5월 모습 그대로 재현 (전남일보) 

2.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09556&isPc=true '윤상원 열사'가 27년 만에 후배들과 만납니다 (오마이뉴스)

3.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38006 "5.18 학살 부대 광주 행진? 정신 나간 국가보훈처" (프레시안)

4. https://imnews.imbc.com/news/2020/politics/article/5942918_32626.html 육군총장 "5.18 희생자에 진심으로 사죄"…첫 공식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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