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풀어간다. 올해 여름부터, 은둔 청년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광주에 사는 한 사람이 있어서 막연히, 2024년이 가기 전에 광주에 한 번 가겠다고 밝혔다. 언제 갈지 결정하지 못했는데 지난 10월 10일 저녁, 한강 작가가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결심했다. 은둔 생활을 하면서, 학생 시절에는 볼 여유조차 없었던 역사, 철학 책들을 간간이 읽었는데 이를 계기로 한강 선생(이하 선생)의 소설을 읽기로 결심했다. 책 두 권을 사고는, 일주일 뒤, 우선 영동으로 홀로 떠났다. 비록 영동에서 일어난 사건은 선생이 소설을 통해 직접 다루지는 않았지만 선생이 다루었던 것들 외에도 더 조명되어야 할 것들을 찾아보기 위해서,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일을 실천하였다.
경부선 열차 안에서 선생의 <소년이 온다>를 꺼내 읽었다. 5월, 광주에서 계엄군이 시민들을 총으로, 몽둥이로 폭행하고 학살하던 그날의 이야기를 살아남은 사람들의 시점으로, 그리고 망령의 시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한 장씩 빠르게 넘겼지만 한 장을 넘길 때마다 모골이 송연했다. 화면으로만 보고 읽은 것을 두 눈으로 가까이에서 보기 전이었지만. 어떤 계기였는지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알게 된 노근리 학살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영동역에 도착하여 지도를 보며 황간면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길에는 감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고 코스모스를 비롯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빠르게 갔다면 놓쳤을 것들을 담으려고 애썼다. 적막하고 한산한 길, 비가 내릴 것 같은 하늘은 사색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한 시간 반을 천천히 걸어, 노근리 평화공원을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나고, 마침내 공원에 도착했다. 앉아서 쉬다가 장미 덩굴이 휘감은 아치 밑을 지나 사건의 현장, 쌍굴다리 앞으로 갔다. 한쪽은 1차선 도로가 지나고 반대쪽은 시냇물이 흐른다. 이 위로 경부선 기찻길이 지나간다. 화면에서만 보았던, 벽에 가득한 총탄의 흔적들을 두 눈으로 보았다. 1950년 7월, 6.25 전쟁 개전 한 달이 지나, 노근리 마을을 떠나게 된 피란민들을 공중 폭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광주의 참상이 벌어지기 30년 전. 전란의 시기이지만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만행의 현장이었다. 빗속에서 쌍굴다리를 통과했다. 반대쪽 출구에서도, 벽에 총탄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이것들을 모두 화면에 담아보고, 다른 쪽 터널에 들어가기 위해 멀리 뛰어서, 시냇물이 흐르는 쪽으로 갔다. 그곳으로 피했던 사람들이 무참히 학살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니 위령비가 있었다. 그 앞에서 학살당한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고, 혼잣말로 다짐하고, 등산로 끝까지 올라가 정자에서 공원을 바라보았다. 공원은 꽃과 나무가 뒤덮은 평화로워 보이는 공간이다. 아름다운 풍경에 억울하게 쓰러져 간 사람들의 넋이 깃들어 있고 아직 풀지 못한 한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면, 코스모스와 감나무의 옆을 지나면서도 잠깐이라도 경건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언덕에서 공원을 향해 다시 내려가니, 위령탑 아래에서는 위패 봉안각이 공사 중이었다. 비 오는 날 홀로 위령탑 앞에서 혼잣말로 기도했다. “아프고 슬프고 부끄러운 역사를 엎어 버리려는 자들이 다시는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끝까지 싸우겠습니다.”라고. 지금도 갖은 만행의 역사를 지우려고 하는 자들이 버젓이 준동하고 있다. 자칭(?) 작가, 선거방송심의위원, 스웨덴 대사관 앞에서 규탄 시위를 벌이는 자들 그리고 최근 선생의 삼촌이라고 하면서 조언으로 가장한 궤변을 늘어놓은 자까지, 일일이 열거하기도 버겁다. 이들은 역사를 왜곡하고 지우려는 정권의 광폭 행보에 용기를 얻어서 볕이 드는 곳으로 나왔으리라. 선생에게 그런 현실을 고발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선생의 책 한 권, 한 장, 한 문단, 한 문장을 해체해 가면서 현실을 더 선명하게 자각해 갔다. 선생이 ‘최고의 상’을 받았다고 해서 현실이 하룻밤 사이에 바뀔 리는 없다. 그럼에도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은, 선생은 글을 통해 인간 근원의 기억을 짚음으로써 부끄러움과 고통과 슬픔을 오롯이 마주하고 극복할 가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은 6.25 전쟁 개전 한 달 뒤에 벌어졌지만 여전히 미완이다. 이승만 정권이 끝나고, 그 이후로 두 번의 군사 반란을 거쳐, 한국은 미국에 ‘올인’하다시피 했다. 그러면서 동맹국 미국에 모든 것을 의탁하려는 태도가 내면화되었을 것이다. 한국 정부는 동맹국 미국을 숭배하여 미국에 우리의 모든 것을 의탁하여 국가(라 쓰고 정권이라 읽는다)를 보위하며, 미국의 만행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모든 행위를 신성 모독으로 간주했을 것이다. 사회적 억압에 진실은 묻힐 뻔했으나, 시민 몇 사람의 노력과 미국 언론인 몇 명의 노력으로 뒤늦게 사건이 조명되어, 단 한 걸음이나마 나아갈 수 있었다. 2001년 1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퇴임을 일주일 앞두고 짧게 유감을 표했을 뿐이지만. 진실을 은폐하고 봉인하려는 국가 권력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파헤치는 것으로 자신의 실존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지금도, 국가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탄압을 목도하고 있다. 기억을 봉인하고, 분별을 마비시키려는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무한한 경쟁에서 뒤쳐질까 두려워 스스로를 착취하고, 쉬고 스스로를 돌아볼 잠깐의 여유조차도 허락하지 않는다. 자신조차 돌아볼 여유가 없는데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인식할 수 있겠는가? 이 또한 억압적 사회 체제가 기여한 바가 크다. 선생은 한없이 연약한 인간 삶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이유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연약한 인간이지만 어떤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자들도 있다. 우리 모두가 그들처럼 목숨까지도 걸 만큼 용감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선생은 우리에게 주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기억하기를 멈추지 않아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전해야 하고, 익숙해지기를 거부해야 한다고. 선생도 그런 점에서 최소한의 실천을 했을 것이다.
(2부에 이어집니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