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붕괴 뒤 수십 년 간 해온 희생자 명예복권

푸틴 이후 도루묵 '범죄자' '반역자' '나치' 취급

우크라 침공 반대자 향한 공포정치 그 자체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벨랴코프 일리야 수원대 인문사회대 교수

2022년 하반기부터 지금까지 러시아 검찰이 4000개에 달하는 '명예 복권' 결정을 취소했다는 러시아 발 뉴스 하나가 있었다. 여기에 더 해 총 1만 4000건에 대한 재조사 작업을 조용히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해외에서는 그 의미를 잘 알 수 없는 뉴스지만 러시아 사회에서는 매우 중요하고 상징성이 큰 사건이다. 현 러시아의 독재 상황을 이해하려면 꼭 알아야 하는 소식이기도 하다. 이런 검찰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소련의 역사를 알 필요 있다.

의심과 고발만으로 최고 수천 만 명 숙청한 스탈린 만행

스탈린은 1930년대 대숙청 정책을 펼쳤다. 반정부 인사, 해외 간첩 의혹, 반국가 세력으로 의심이 되는 사람을 전부 다 숙청했다. 아직 정확한 숫자를 아무도 모르지만 대략 희생자가 수천 만 명에 이른다는 평가도 있다. 이런 대숙청 정책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이어졌다. 나치 독일에게 국가기밀을 넘겨준 혐의를 받은 이들은 물론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나 소련으로 돌아온 사람 등도 두루 숙청했다. 이런 숙청은 하도 광범위해서 스탈린 시절 숙청을 당하지 않은 집안은 한 군데도 없을 정도였다. 밤중에 KGB에 끌려 간 사람을 그 이후에 아무도 찾지 못했다. 시체도 당연히 영원히 사라졌다. 수천 만 명의 운명은 아무 흔적도 없이 역사 속으로 그냥 잠겨버렸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청 앞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묘사한 설치조각품이 세워져 있다. 이날 시청광장에서는 재독 우크라이나인들의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2024. 10. 11. AP 연합뉴스
독일 프랑크푸르트 시청 앞에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묘사한 설치조각품이 세워져 있다. 이날 시청광장에서는 재독 우크라이나인들의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2024. 10. 11. AP 연합뉴스

여기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대부분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숙청을 당했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누군가가 싫어서 허위 고발하는 경우, 복수심에 허위 고발하는 경우, 자기 지위를 남용해서 허위 고발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대숙청이라는 대혼란 속에서 신중하게 죄의 유무를 가리기보다는 일단 처형부터 해버리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1953년에 스탈린이 사망하고 나서야 이런 국가 폭력 행위의 일각이 폭로되면서 피해자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고 대숙청 비판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991년에 드디어 소련이 붕괴되면서 러시아에서 숙청당한 사람 명단, 구체적인 상황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를 담당하는 국영기관과 시민단체도 많이 생겼다. 한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후 반민특위가 담당했던 업무와 많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 붕괴 후 본격화된 러시아 판 역사 바로잡기 작업

그렇게 1991년부터 2021년까지 수천 만 명의 운명을 조사해서 명예 복권 작업을 실시해 왔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 스탈린을 비판하기는커녕 비판한 적도 없고 비판할 것 같은 사람처럼 생겨서 숙청당한 사람들이나 국가 반역 누명을 쓴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서 문서를 통해 무죄를 입증하고 이를 기록하는 작업이었다. 본인도, 그들의 가족들도 사망한 지 이미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소련 독재시대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면서 사회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새로운 러시아는 소련과 다른 가치를 가진 나라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도 포함되었다.

이런 정책은 러시아뿐 아니라 독재 역사를 가진 많은 나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히틀러 정권이 끝난 전쟁 후의 독일에서도, '죽음의 비행'으로 악명이 높았던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와 칠레에서 아우구스토 피토체트의 정권이 끝난 후에도 그랬다. 예전의 만행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서 이를 반성하는 모습은 사회 정상화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찾아내어 잊지 않도록 기억하고 이런 악행이 다시 일어나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하지만 2022년부터 러시아 정부는 이런 명예 복권 결정을 뒤집고 희생자들을 다시 ‘범죄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인민의 적’ ‘반역자’ ‘정권 반대자’라는 단어도 다시 등장했다. 정부와 정권에 맞선 사람들, 정권의 실수로 찍힌 사람들, 정권이 의도적으로 죽이고자 했던 사람들에게조차 다시 ‘나치’ 라벨을 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진실을 찾아내서 나치를 청산해 온 시민단체를 다 강제 해산시켰다. 이제는 스탈린 손에 당한 사람들은 다 무조건 나치라고 외치고, 이 사람들을 ‘미화’하는 시민단체야말로 ‘나치’라고 부른다. 사실을 정확하게 180도 돌리고 흰색을 검정색이라고 하는 셈이다.

 

재한 러시아인들이 20일 오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서 러시아 전쟁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2024.10.20. 연합뉴스
재한 러시아인들이 20일 오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앞에서 러시아 전쟁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2024.10.20. 연합뉴스

‘우크라는 나치국가’ 프레임으로 전쟁 반대자도 나치로 몰 의도?

러시아 정부의 의도는 뻔하다. 우크라이나를 ‘나치국가’라고 선전해 온 것을 국민에게 입증하기 위해서다. 정부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거나 지지하지 않으면 강력하게 처벌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공포정치 그 자체다.

한없이 안타깝다. 내가 아는 러시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믿고 싶다. 언젠가는 내가 알던, 개방되어 있고 외국인을 환영하는, 자기 국민을 보호하는 그런 러시아가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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