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미국과 마주 앉기를 바란 푸틴
우크라전으로 고립되며 최빈국에 포탄 SOS
무기 필요성 없어지면 위선적 관계 끊을 것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북한 방문은 이번이 두번째다. 첫 방문은 2000년 7월 그의 첫 임기 때에 이루어졌고 지난 6월 19일 24년 만에 두번째 방문한 것이다. 두 정상회담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다. 24년 전에 북한은 몰라도 러시아는 전혀 다른 나라였다. 그때의 방북 목적도, 목표도, 결과도, 분위기도 이번 방북과는 180도 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지난 24년간 러시아는 어떤 여정을 밟아 왔을까?
서방과 북한의 중간에서 평화중재자 꿈꿨던 푸틴
푸틴은 2000년 5월에 공식적으로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첫 임기 임무 수행에 착수했다. 그 당시 러시아 분위기는 어두웠다. 2차 체첸 전쟁이 한창이었고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도시에서 여기저기 극우 이슬람 단체들이 테러를 저지르고 있었다. 1998년 금융위기 후폭풍도 여전히 경제를 괴롭혔다. 이런 상황에서, 관저에서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술꾼 옐친 대신 젊고 말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는 KGB 출신자가 통수권자가 된 것이다. 기대가 컸다. 전 세계가 러시아에 시선을 돌려 지켜 보고 있었다. 구 소련에서도 가장 크고 전 세계에서 탑10에 들어가는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에 민주화가 계속 되면 국제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고 중요한 세계 일원이 될 수 있는 시기였다. 푸틴은 이를 잘 인지했다. 그래서 서방과 친해지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지속적인 미국과의 회담, 끊임 없는 유럽 방문 등 임기 초부터 매우 활발하게 외교를 펼쳤다.
취임 후 석달도 안 된 2000년 7월에는 중국, 북한, 일본을 각각 이틀씩 일정으로 차례대로 방문했다. 중국과 일본 방문은 러시아의 새 외교 컨셉트에 잘 맞았고 전문가들에게 별다른 의문을 일으키지 않았지만 북한은 조금 의외였다. 그 이전에는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한 적도 없었고 북한 지도자가 러시아를 방문한 적도 없었다. 두 나라 정상들이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86년 김일성 주석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를 만났을 때였다. 1991년에 소련이 붕괴한 이후에 러시아와 북한 관계가 악화되면서 두 나라는 서로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다. 그나마 연해주 쪽에서 40킬로미터에 가까운 국경이 맞닿아 있어 단교를 안 한 것뿐이지,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서구와 친하게 지내겠다는 러시아는 북한을 아예 관심사에서 지워버렸다. 1992년에 있었던 옐친 당시 대통령의 서울 방문은 그것을 더욱 확인시켰다.
하지만 러시아를 완전히 개방하고 모든 나라와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던 푸틴은 중국과 일본에 가는 길에 북한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북한 방문 후 유럽 지도자와의 회동에서 북한 지도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자기에게 핵과 탄도미사일 개발 프로젝트를 완전 포기하겠다고 약속했노라고 과감하게 전했다. 푸틴은 이제 새 친구가 된 서방과 왕따인 북한 사이에 자신이 위치하게 된 것을 엄청 좋아했다. 전 세계의 악동(Enfant terrible 앙팡 테리블)인 북한과 친근감을 과시하면서 평화중재자(peace maker) 역할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의 ‘거짓말’로 소원해진 두 나라 관계
하지만 김정일이 푸틴에게 건넨 말은 거짓말로 드러났다. 그때 단순한 통역 실수였는지, 푸틴이 상대방의 말을 잘못 이해했는지, 아니면 정말 김정일 위원장이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했는지 우리가 지금 알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푸틴이 북한에 대해 화가 났다는 것이다. 비밀경찰 출신인 푸틴은 법과 원칙보다 범죄조직에서 흔한 비공식적인 구두 약속을 더 믿는 사람이다. 법은 얼마든지 위반해도 되지만 구두로 한 약속을 안 지키면 사람 사이의 신뢰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타입이다. 마음 속에서 원한을 품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두 정상의 관계가 거의 끊어진 듯한 정도로 멀어졌고, 유엔에서도 러시아가 항상 북한에 대한 모든 제재를 지지하는 상황으로까지 악화됐다. 2020년대까지만 해도 러시아와 북한 간 경제적 인간적 교류는 매우 미미했고 별다른 관계를 유지한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2022년 2월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벌어지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전 세계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나라는 북한뿐이다. 한순간에 세계로부터 고립된 푸틴은 이를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전에 북한을 향해 가졌던 모든 적대적인 감정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잊고 방북을 한 것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3년차 들어 자신의 군사 창고가 텅 비게됐다. 물론 국내 생산에 박차를 가하지만 당장 무기 공급이 시급한 상황이다. 소련식 무기를 아직 많이 보유하고 있는 북한은 러시아 입장에서 당연히 첫 손가락 꼽는 대화 상대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핵개발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북한 노동자를 안 받겠다던 푸틴이 이번에 평양에 가서 태연하게 김정은을 만나 무기를 구걸하는 모습은 러시아 진보 언론들의 비꼼과 조롱 대상이 되어 버렸다.
다급해진 러시아, ‘무기 달라’ 손 내밀었으나…
2000년 방북 때의 푸틴은 서방의 대사였다. 러시아가 소련의 족쇄를 버린 것처럼 북한도 그렇게 하면 훨씬 더 높은 이득을 볼 수 있다고 말했던 푸틴은 24년 후에 김정은보다 더 고립된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미국과 같은 테이블에서 세계 문제를 푸는 나라, 전 세계가 함께 사업 하기를 원하는 나라, 20세기 냉전시대의 막을 걷어내린 나라의 대통령은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가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위선적으로 선포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정세판이 이렇게 180도로 바뀐 것은 장차 외교 교과서에 들어갈 만하지 않은가. 러시아 국영 언론에서는 푸틴의 현명함과 위대함에 대한 칭찬을 끝도 안 보일 정도로 늘어놓지만 인터넷은 조롱과 비꼬는 글들로 가득 찼다.
러시아 내 전문가나 러시아 전문 싱크탱크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한결같이 이 ‘동맹’의 수명이 길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당분간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양쪽이 서로에 대한 무한 칭찬과 보여주기식 교류를 계속할 것이다. 최소한 현 러시아 정부가 국가 고립 정책을 포기하기까지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가 더 이상 무기가 필요 없는 상황이 되면 바로 북한과 관계를 끊을 거라고 예견하고 있다. 지금 러시아와 북한의 상대방에 대한 입장과 태도는 당장의 필요 때문인 것이지, 기본적으로는 러시아와 북한의 국익이 서로 전혀 다른 데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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