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한국의 공직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청년이자 여성이며 학생이자 한때 노동자였던 나는 참사 이후 한동안 참사의 원인을 밝혀 권력층을 단죄하고 싶었다.
중독된 듯이 사건의 경과를 지켜보며 책임자들의 무책임함과 실언에 치를 떨었다.
그런데 이들은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었다."
나는 이태원을 친근하게 느끼는 사람이다. 이태원이 집과 학교에 가까운 곳이었고, 20대 내내 노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끔 클럽을 가고, 놀고 싶은 날이면 이태원에 나가 술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 먹으러 다녔다. 나에게 이태원은 그냥 일상의 공간이었다.
할로윈이 되면 많은 친구들이 코스튬을 하고 이태원으로 놀러 나갔다. 한국에는 이웃의 집 문을 두드리고 사탕을 받는 문화가 없다. 2010년대 중반쯤부터 20대에게 할로윈은 놀 수 있는 날이 되었고, 할로윈을 즐기는 사진들이 SNS에 올라왔다. 물론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최근 언론을 통해 전달되었던 기성세대의 목소리처럼 “할로윈이 클럽 가는 변질된 날”이라거나 “상업주의에 점철되어 남의 나라 문화를 떠받들기” 때문은 아니었다.
바로 그날 10월 29일, 나는 이태원 거리에 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친구들 중에는 근처에 들렀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아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일찍 도착해서 가게에 자리를 잡아둔 친구들이 있었다. 나 또한 코로나 재난 이후 오래간만에 할로윈을 챙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와 꺼두었던 휴대폰을 켰을 때 마주한 것은 수많은 카카오 메시지였다. “이태원 골목에서 압사 사고가 났다”, “너 혹시 거기 갔니?” 하는 친구들이나 가족들의 메시지였다. 깜짝 놀라 포털사이트와 SNS를 통해 무슨 일인지 확인해보니 참담하고 노골적인 사고영상들이 넘쳐흘렀다. 다음 날 아침에도 안위를 묻는 메시지가 계속 이어졌고, 나도 친구와 지인들의 ‘이태원 부재 증명’을 위해 휴대폰을 붙잡고 있어야 했다.
문득 고3이었던 2014년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핸드폰을 켰을 때 내 또래의 아이들이 바닷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후 몇 달 동안을 언론의 조급한 보도와 혼란스러운 정보에 내 눈과 귀를 맡겨 놓을 수밖에 없었다. 수능을 보아야 하는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었고, 참사 앞에서도 해야 할 일을 계속해야만 하는 나의 삶에 대해 죄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10월 29일의 이태원 또한 그러했다. 여전히 세상은 돌아가고 있고, 나의 일상도 계속되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했다. 이태원 참사 후 한 달이 더 지나 월드컵 소식으로 이미 뒤로 밀려나 있었고 대화를 나누기에 무겁고 낯선 주제처럼 느껴지던 이태원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우리는 가장 먼저 ‘분노’했다. 정말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측된 현장에서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았고, 급박한 신고 전화가 무시되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참사 앞에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공직자들의 모습에 분노했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었는데 국가가 책임지지 않으니 나라 잃은 난민이 된 느낌이다”는 친구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게 들려온다. 참사의 발생 원인을 찾고 재발방지를 위한 사회적 노력에 대해 말하기보다 서로를 공격하기 바쁜 정치와 언론에 분노했다. “오늘도 살아남았다”거나 “운 좋게 생존했다”는 표현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는 친구의 말이 큰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분노’는 곧 ‘무력감’으로 이어졌다. 압사에 대한 위협감,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것 같은 재난에 대한 불안감은 곧바로 우리 사회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으로 대체되었다.
정부에 의해 강요된 애도가 싫었다. 애도는 수채화처럼 자연스럽게 번져들어 각자의 방식으로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부는 애도 기간을 정했다. 자신의 책임을 유예한 채 침울함과 애도를 강요했다. 바람직한 애도가 무엇일지 각자가 답을 내리기도 전에 정부가 감정을 정리해 버렸다. 국가애도기간 동안 공연이 취소되었다. 예술은 유흥과 등치되어 애도의 반대항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한 친구는 “추모는 반드시 정치적인 행동으로 이어져야 하고 엄숙하고 숭고해야 한다는 정언명령과 트라우마를 다루는 방식이 정형화되는 흐름이 자신을 더 괴롭힌다”고 말했다. 또 한 친구는 참사의 비통함으로 잠이 안 오는 사람들을 위해 새벽에 줌으로 모여 각자 평화롭게 밥을 짓는 ‘밥짓기 모임’이 가장 큰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다.
언론과 정보는 얼마나 충격적이었나. 참사의 참혹한 이미지, 사람들이 끼어 있고 소리를 지르는 모습,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를 타인들의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었다. 이태원은 두려움의 감정이 결부된 공간이 되어버렸다. 여기에 언제든 이태원을 문제시되는 공간으로 딱지를 붙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더 강력한 혐오의 대상이 될지 모를 일이다.
이런 생각과 감정의 골들을 지나 결국 우리는 어처구니없는 한국의 공직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청년이자 여성이며 학생이자 한때 노동자였던 나는 참사 이후 한동안 참사의 원인을 밝혀 권력층을 단죄하고 싶었다. 중독된 듯이 사건의 경과를 지켜보며 책임자들의 무책임함과 실언에 치를 떨었다. 그런데 이들은 교묘하게 피해가고 있었다. ‘거기’에 ‘왜’ 갔는지를 묻는 일부 사람들의 여론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책임자들은 책임 회피를 위한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할로윈은 비행의 날이 아니다. 몇년 간 바깥활동을 금지당하거나 자제해야 했던 청년들이 야외로 나와 즐거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할로윈의 축제 분위기가 더 반가웠다. 그런데 누군가는 할로윈을 비행이 의심되는, 가지 말아야 할 것으로 공격했다. 정부나 책임자들이 할로윈과 이태원을 딱 이 정도로 여기며 각자의 책임을 회피하고 숨기려는 꼼수가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공부하고 일하고 보람을 느끼면서 성취를 당연하게 욕망한다. 한국 사회의 청년의 이상향과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길들여졌기에 삶 전반에 성적표가 꼬리표처럼 따라온다는 사실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삶의 온전한 즐거움과 죽음에 대한 슬픔까지 꼬리표가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더욱 비참하다. 이태원에 따라 붙을 꼬리표와 이태원을 향한 불온한 시선이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볼 일이다. 어처구니없는 정부와 공직자들이 강요한 애도 속에 묻혀버린 시민 각자의 진심어린 애도와 추모의 마음이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가 닿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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