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이 이태원 참사에서 일어난 압사라는 죽음의 방식은 전적으로 잔인하다.
아무 원한 관계가 없었던 몸들이 그 시공간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몸들을 깔고 누르며 죽음의 덩어리를 이루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대한 최대의 공포와 모독이 있다면, 이는 내 몸이 다른 몸을 깔려 죽게 만드는 조건에 던져지는 것이다.
살아서 만인이 만인의 적인 신자유주의 원칙이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죽음의 비참으로 나타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다. 한국은 각기 다른 서사로 읽혀지는 여러 개의 나라다. 수많은 숫자와 사건들이 매우 다른 서사를 구성한다. 어떤 숫자와 성과들은 ‘선진국’ 한국의 서사를 구축하는 반면 또 다른 숫자와 사건들은 죽음에 둔감한 한국을 말하도록 한다.
20년째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국가가 한국이다. 매년 1만 3000명 이상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루 평균 37명이 자살한다. 건설 현장이나 공장에서는 매년 1000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산재로 사망한다.
2021년에는 3488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혼자 외롭고 처절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국에서는 이것을 고독사나 무연고 사망자라 부른다. 이들에게 살아 있는 시간은 ‘혼자 죽어가기를 준비하는 시간’이다.
대형참사로 수십 수백 명이 죽는다. 예상하거나 대비할 수 있었던 사고, 위험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충분히 구조하거나 보호 가능했지만 이에 실패한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그 귀한 생명들이 사라진다.
자살과 고독사, 무연고 사망, 산재 사망, 대형 참사, 과로사, 아사 등 계속해서 사람이 죽어간다. 우리는 이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죽지 않아도 되고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죽음’을 이야기할 것이다. 누가, 왜 이런 죽음을 만들어내고 방치하고 있는지를 질문하고 따질 것이다. 죽음을 만들어내는 사회가 아닌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내는 사회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 갈 것이다. 선진국 한국의 서사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재구축되기를 희망한다.
첫 번째 이야기는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에서 시작한다. 할로윈 축제가 열리던 이태원의 좁은 골목길에서 159명의 생명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참사 발생 이후 두 달이 되어 가지만 끔찍하고 처참했던 이태원 참사에 대해 말을 이어 붙이는 것이 당황스럽다. 이 죽음은 한두 마디로 규정될 수 없는 비어 있는 텍스트다. 이 빈 텍스트를 하나씩 채워보려 한다. 텍스트의 완성은 독자와 시민들의 몫이다. (이영주 공공저널리즘센터 대표 주)
10월 15일 한 젊은 노동자가 파리바게트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SPC그룹의 계열사 SPL 제빵공장에서 소스 혼합 과정 중 기계에 끼여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2주 후 10월 29일 할로윈데이에 서울의 번화가인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뒤엉키며 159명이 순전히 숨을 쉬지 못해 죽었다.
거대 사건들 사이에 가려서 우리의 기억에서는 거의 지워진 일도 있었다. 10월 26일에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 아연광산 붕괴 사고로 매몰됐던 작업반장 박정하와 보조작업자 박아무개(56) 등 광부 2명이 붕괴사고 221시간 만에 극적으로 구조되는 다행한 사건이 있었다. 그들은 커피믹스를 먹고 견뎠기에 용감한 삶의 의지로 칭송을 받아 마땅했고, 경북지사로부터 커피믹스 선물이 내려졌다. 죽지 않고 살아 귀환한 노동자에게 주어진 사회의 (얄팍한) 칭찬이다.
지속적인 생사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생존해내는 노동자를 보며 ‘기적’이라고 말하고 커피믹스 선물까지 증정하며 칭찬한다. 그러나 이 선을 조금이라도 넘어 생존을 위한 ‘안전’을 실제로 주장하면 ‘감히’ 귀족이 되려 한다고 화내면서 어서 일하라고 윽박지른다. 누구는 이미 귀족으로 살고 있는데, 다른 누구는 항상 드리워진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꼼짝만 해도 그 건방짐에 대해 처벌받는다. 이 부당함에 대해 정치적 책임과 도덕적 책임을 짊어지는 이는 많지 않다.
지금 한국사회엔 귀족의 삶 아니면 죽음만 편재한다. 죽어야지만 인정되는 삶은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삶은 귀족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이태원 참사는 극단적인 비극성으로 한국사회의 이 모든 진실을 표명한다. 안전의 부재와 옹졸하고 무책임한 행정에 이르기까지 무력하고 간사한 관료제의 한심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게 왜 놀러 갔어”란 대중의 옹졸한 비난이 설득력 없는 이유는 이미 일터에서의 죽음이 차고도 넘쳐서 놀이터로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놀러 갔는데도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일터에서 죽임을 당하던 이전에 비해 더욱더 처참한 현실임을 시사할 따름이다.
더욱이 이태원 참사에서 일어난 압사라는 죽음의 방식은 전적으로 잔인하다. 아무 원한 관계가 없었던 몸들이 그 시공간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몸들을 깔고 누르며 죽음의 덩어리를 이루는 사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SPC 노동자나 세월호를 탄 사람들의 죽음인들 비극적이지 않을까마는 다른 무엇도 아닌, 신체들이 이처럼 서로 눌러 죽이는 잔혹으로 치환된 적은 없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최대의 공포와 모독이 있다면, 이는 내 몸이 다른 몸을 깔려 죽게 만드는 조건에 던져지는 것이다. 살아서 만인이 만인의 적인 신자유주의 원칙이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죽음의 비참으로 나타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일련의 사건들 이후 약 두 달이 지난 지금 우리는 어떤 시간을 살고 있나? 연이은 비극을 ‘뚝심’으로 극복했다고 자부하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상승했다. 그는 책상을 치며 고함치는 한물간 오버액션으로 말단 공무원 몇 명을 구속하는 식으로 자신은 빠져나가는 본능을 손쉽게 발휘했다.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고자 하는 한 언론사의 그나마 갸륵한 특집 연속 기사에선 예쁜 캐리커처로 그려진 젊은 망자의 미담이 실린다.
공동체는 효녀, 효자에다가 취업에 성공한 젊은이의 죽음에 대한 연민을 나누는 것으로 애도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의 가을은 태평성대의 해피엔딩이었다고 믿고 싶기나 한 것일까? 그렇지만 이런 낭만적인 믿음은 실제 한국사회에서 언제나, 어디서나 상존하는 죽음정치의 현실을 은폐하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매일의 일터에서 오로지 죽기 아니면 살기로 바둥대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인간 존엄이 허용되지 않을 때, 일상의 놀이터에서 옆에 있는 타인들의 몸들을 두려워하게 될 때, 타인의 죽음들을 대가로 자신의 승리를 도박 걸 때, 죽음정치는 온몸으로 견고해진다(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이 겨울, 나, 그리고 우리는 죽음정치의 죽음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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