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칼럼] 한국사회, 한 흙수저 여성의 이야기
헬 조선 밖의 또 다른 헬 조선 겪게되는 MZ세대
세대 영합주의, 대중 추수주의 한계도 보여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작가 장강명이 쓴 원작을 독립영화 감독 장건재가 만든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일단 제목이 발칙한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 대놓고 MZ세대를 겨냥한 작품임을 스스럼없이 내세운다. 젊은 세대들 가운데 유행어가 한때 ‘헬 조선’이었고 그들 중에는 실제로 지금의 한국 사회를 ‘극혐’하는 이들이 많으니 이들만 끌어들일 수 있다면 작품의 상업적 성공이 가능할 것으로, 이 영화의 기획자와 제작자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한국이 싫어서 실제로 한국을 떠났거나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이 싫다는 얘기를 굳이 영화로까지 확인하고 싶어 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정서가 작동될 수 있다. 관객 몰이가 꼭 쉽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혹여나 그럴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민족주의적이거나 국가주의적 시각에서 비판할 제목이 아니다. 내용을 들여다 보면 한국이 싫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한국’이 싫다는 것이며 궁극으로는 저급한 ‘한국형 자본주의 체제’가 싫다는 얘기이고 결국은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물질주의적 삶, 그 강고한 경쟁의 가치가 싫어서라는 의미이다. 그러니 제목은 사실 ‘(천박한 자본주의 나라) 한국이 싫어서’라는 의미를 지닌다. 역설적으로 제목만큼은 꽤나 정치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사회주의적 가치를 내세우거나 또 다른 대안의 사회를 꿈꾸는 내용으로 돼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선언적이거나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내세우는 내용은 아니다. 그냥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한 젊은 여성의, 비교적 궁핍하며 비루한 일상을 모티프로 한다. 결국 이 여성은 한국을 떠나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뉴질랜드에 간다. 그 얘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기이하게도 많은 젊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일으킬 공산이 크다.
주인공은 주계나(고아성)이다. 그녀는 홍익대를 나왔는데 이 홍대란 학교는 아주 잘나지도 그렇다고 못나지도 않은 사람들이 가는 학교쯤으로 영화에서는 묘사된다. 반에서 중상급 성적의 학생, 자기 나름대로 열심히, 요즘 애들 얘기로 ‘x나게’ 공부해서 간 학교이다. 과외를 하거나 학원을 다닐 여유가 없는 집안, 동네 재개발로 간신히 18평짜리 자기 집을 꿈꾸는 집안의 아이들이 최선을 다한 결과이다. 아버지는 노동과 건물 경비를 하며 살아가고 엄마도 따로 허드레 일을 하는 집안의 자식들이 홍대를 가고 그래도 꼬박꼬박 월급이 나오는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건 그래도 성공한 케이스이다. 그러나 금수저 출신이 아닌 사람들, 흙수저들 대다수가 그렇듯 어디서나 존재감이 없다. 계나 역시 다니는 회사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기 일쑤이다. 그런 그녀를 과장은 공모 서류를 슬쩍 ‘조율’도 못하는 융통성 하나 없는 여직원쯤으로 취급하고 그 일이 결정적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 한국을 뜨기로 한다.
29살 계나가 한국에서 겪는 일상은 대부분 겨울에 보여진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춥다. 그녀가 살고 있는 인천에서 마을 버스를 타고 아홉 정거장인지 열 다섯 정거장인지를 가서 다시 ‘지옥철’을 타고 출근을 해야 하는 시간은 신새벽일 수밖에 없다. 춥다. 을씨년스럽다. 그녀는 늘 추워한다. 밥상머리에서도 엄마에게 ‘이 집, 보일러 좀 고치자’고 얘기하고 엄마는 ‘새 집으로 이사 갈 때까지 참자’고 말한다. 계나에겐 적금이 3천만 원 가까이 있는데 엄마는 그걸 새집 비용에 보탰으면 바라고 그러다 두 모녀는 식사를 하다 말고 언쟁을 벌인다. 없는 사람들, 중하층 가정들 식탁에서 흔히들 벌어지는 모습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가족 풍경’을 벗어나기 어렵다고 자조한다. 금수저 출신이 아닌 한, 버젓한 내 집에서 산다거나 생활자금 걱정없이 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그 디테일을 잘 살린다. 저지대의 삶과 일상을 잘 꿰뚫고 있는 영화이다.
계나가 뉴질랜드에서 보내는 하루하루는, 적어도 날씨만큼은 따뜻하다. 그러나 그곳도 그다지 녹록한 곳은 아니다. 그녀는 식당 일부터 옷 가게 점원, 한국인 부부의 아이 가정교사 일까지 비교적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헬 조선’을 떠났지만 거기라고 ‘헬 소사이어티’가 아닌 것은 아니다. 게다가 종종 인종차별까지 감내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나는 뉴질랜드에서 조금씩, 그리고 아주 천천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간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주변의 영향이 없지 않은데 어학 강의를 빼먹어 가면서까지 식당 일을 하며 셰프가 되겠다는 두 살 어린 남사친 재인(주종혁) 같은 이에게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동년배쯤으로 나오는 한 마오리족 출신의 여성은 계나를 차별적으로 대하는 의상 숍 주인으로부터 도와준다. 둘은 친해진다. 마오리족 여성은 빌딩 위에서 번지 점프를 하다가 ‘그러다 죽으면 어쩌려구?!’라며 소리치는 계나에게 ‘지금 아니면 이걸 언제 하겠어? 그리고 뭐 이러다 죽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라며 그녀에게 또 다른 삶의 모티프를 준다. 그러나 결국 이 일(번지점프를 하는 걸 동영상으로 찍고 이를 무단으로 배포했다는 이유로, 불법행위를 방조했다는 이유)로 그녀는 귀국길에 오른다.
추운 한국과 따뜻한 뉴질랜드의 풍광이 대조적이다. 적어도 뉴질랜드라는 곳이 상징하는 ‘한국 밖’에서만큼은 젊은이들이 남의 눈치를 보거나 ‘가진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타인을 의식하고 살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한국보다 한국 밖의 자본주의는 조금이라도 더 평평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이방인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착시일 수 있음은 불문가지이다. 계나는 한 인도네시아 유학생을 만나고 잠깐이나마 이 초절정 갑부의 아들과의 삶을 생각하기도 한다. 돈,돈,돈 하는 한국을 떠났지만 결국 돈의 세계로 귀속하려는 자신을 발견한다. 행복은, 그리고 삶의 만족의 일부는 돈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하며 거기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우리 같은 자본주의 체제의 삶에서는 단 한 명도 있을 수 없다. 주인공 계나가 깨닫는 것, 곧 그녀가 덜 신경질을 부리고 비교적 관대한 마음으로 주변 인물들을 바라보게 된 것은 자신이 성숙했기 때문이며 자기 정체성을 찾아 냈기 때문이다. 계나는 뉴질랜드로 떠나기 전까지 7년간 사귄 옛 애인 지명(김우겸)과도 싸우지 않고 따뜻한 하룻밤을 지내고, 남자의 출근길 아침에 그의 넥타이의 매무새를 고쳐준다. 동생 미나(김뜻돌)와 그의 밴드 친구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린다. 이제 그녀는 짜증을 부리지 않는다. 그런 성숙의 과정, 사람이나 사회나 시간이 지나 숙성이 되는 과정의 이야기 구조, 그 주춧돌이 나쁘지 않은 드라마이다. 일견 그런 목격담에 훈훈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 아우라가 좋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완결체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무래도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굳이 나쁜 말로 하면 일종의 ‘세대 영합주의’가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는, 20,30대의 생각과 정서에 너무 따라가는 경향을 보인다. 정치적, 사회구조적 해법의 의지는 거의 담고 있지 않다. ‘요즘 애들’ 말마따나 그딴 거 관심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나 양질 전환의 법칙 같은 얘기는 어느 외계인의 언어일 뿐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오로지 개인의 문제, 개인과 개인의 문제에만 천착해 있는 젊은 세대를 향한 자기 고해서이자 애정 고백서 같은 영화이다. 그 대중 추수주의가 한편으로는 안쓰럽게 느껴진다.
기성 세대 관객들은 다소 거부감을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기성 관객 ’따위’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지나갔거나 지나가고 있는 세대일 뿐이다. 한국이 싫은 젊은이들이 한국 자본주의와 세계 자본주의를 싫어해서 더 좋은 다른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 또 그럴 수 있는 모티브를 찾아 나갈 수 있다면 그게 최고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영화 ‘한국이 싫어서’가 얘기하려는 궁극의 메시지일 것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다. 8월 28일 개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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