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권은 내선일체 정권인가?
진정한 광복 위한 구국, 독립투쟁 벌여야
2024년 8월 15일 광복의 날, 식민지 지배를 찬양하는 자들의 등장
광복절을 맞으면서 우리는 기가 찬 현실과 마주하고 있다. 친일매국 세력의 활보가 백주대낮에 아무렇지도 않게 이뤄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독립투쟁의 역사 위에 걸터앉아 민족사를 조롱하고 농간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덕에 우리가 근대화의 초석을 놓게 되었다는 주장은 이른바 뉴라이트의 신조다. 이렇게 되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은혜로운 것이 되며, 그 불법성 문제는 애초 따질 수 없게 된다. 그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셈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은혜를 지극 정성으로 갚겠다고 하는 건지 윤석열 정권은 한국학 중앙연구원, 동북아재단, 그리고 급기야는 독립기념관 관장에 이런 류의 인사들을 수장으로 앉혔다. 광복절 전야(前夜)에 일어난 일들이다. 격분해야 할 바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버젓이 이야기하는 김형석이라는 자를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들이댄 것은 대체 어쩌자는 것일까? 그런데 이 사안에 대해 왜 그게 문제가 되는 것인지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고 기분만 나쁜 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국적, 일본?
1910년 한일합병으로 조선은 사라졌고 모든 체제는 일본의 국가적 지배로 들어갔다. 따라서 식민지 조선사람들의 국적은 졸지에 일본이 되는 상황이 벌어졌으니, “일제 강점기 조선사람의 국적은 일본”이라고 대답한 김형석 친일기념관장의 대답은 문제가 없다고 여길 수 있다.
이 대답은 조선사람의 국적이 일본 국적이 된 것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우선 그 문제성이 심각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어느 때에도, 이를 인정하고 승인한 바 없다. 침략으로 주어지는 국적은 국적이 아니라 노예증서일 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비록 나라를 잃었어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조선사람, 한국사람이었습니다. 일본이 강제화한 일본국적을 결코 인정한 바 없습니다”였어야 한다.
이 사안은 또한 일본의 조선 지배와 통치의 합법, 불법성을 가르는 문제다. 1965년 한일협정은 일본의 한국지배에 대한 역사적 규정에 대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라고 타협, 정리했는데 이 해석은 한국과 일본이 완전히 달랐다. 우리는 1910년 그 당시 이미 무효라는 쪽이었으나 일본은 1945년 패전으로 식민지 총독부 체제가 무너지면서 그때 무효가 되었다는 식이다. 김형석은 일본의 해석을 따른 것이다.
합법적 지배에 대한 보상과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은 전혀 다르다. 사도광산에서 조선사람들의 강제노역은 국가의 합법적 통치행위의 결과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국가가 부과한 의무를 행하다 입은 손해 정도가 된다. 위안부 문제는 또 어떻게 되는가? 국가의 총동원령에 따른 복무가 된다.
한일협정 회담 당시 일본은 일본이 조선에 해준 혜택을 함께 계산하면 도리어 일본이 받아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논지로 이른바 “역청구권” 논쟁을 벌였다. 강도들이 더 많은 강탈을 해도 잔소리 말라는 식이다.
어디 그뿐인가. 일본 국적문제로 관점을 세우면 우리의 독립투쟁은 일본 정부에 대한 불법적 저항과 반발, 반란이 된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이 바로 그런 규정이다. 따라서 일본의 독립투쟁 탄압과 토벌은 합법적 국가행위가 된다. 이에 맞서는 것은 불법적인 국가변란을 꾀하는 것이 되며 이들을 감옥에 넣고 처형하는 일체의 행위는 법에 따른 정당한 행위가 된다.
더군다나 일본국적 답변은 일본의 조선식민지 통치의 논리인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지지하는 논법이다. 문제는 윤석열 정권 자체가 내놓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본 국적의 정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밀정의 소굴 수준을 넘어 신판 총독정치를 통해 21세기 내선일체를 추구하는 자들의 본거지가 바로 윤석열 정권이다. 마땅히 민족반역자들이고 매국세력들이다. 침략자들과 함께하는 자들이다.
출발부터 조선침략을 갈망한 일본의 명치유신
일본의 조선침략은 1910년 그 해 비로소 시작되고 완료된 것이 결코 아니다. 일본의 명치유신, 그 뿌리가 바로 제국주의다. 명치유신 정부를 움직인 자들의 머리 속에는 그 목표만이 온통 가득 찼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 또는 신(神)으로 떠받들리는 인물이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1838-1922)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 명치유신 2세대, 조슈(長州) 출신의 3존(尊)이라 불리던 자로서 1869년 독일의 전신 프러시아에 가 군사체체를 배우고 돌아온다. 이후 그의 뇌리에는 독일의 군사전략이 각인되었다. 1890년 제국회의 개원에서 이른바 “이익선, 주권선”의 개념을 내놓은 것도 독일의 로렌츠 폰 스타인의 영향이다.
주권선은 일본 본토, 이익선은 주변지역에 속한 나라, 응당 당시 조선이 이에 해당했다. 주권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이익선부터 방어해야 한다는 논리가 이어지면서 조선침략이 정당화되어간다. 1890년은 이미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군사력이 세계에 입증된 시기였다.
그런데 일본의 침략주의를 이론화시키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다름 아닌 “조선 반도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단도(短刀)”라는 관점이다. 이 말은 1880년대에 일본의 군사고문으로 있던 독일의 야콥 멕켈 소령의 지론이었다.
이 단도가 조선이 위약할 경우 다른 패권국가가 쥐고 일본을 향해 위협하는 무기가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일본의 방파제가 되리라는 논법이었다. 이 개념과 주권선/이익선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전쟁을 옹호하는 기본개념이 확정된 것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조선의 내정개혁론”이었다. 이는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일관된 대(對)조선 입장과 전략이었고 이걸 내세워 일본의 선의에 따른 조선의 문명화, 근대화가 가능해지고 자주 독립도 보장된다는 식이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의 역사는 이리 오래이자 깊다.
1894년 청일전쟁의 시기에 일본 언론들은 “조선의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의 증진, 농업의 개선, 상업의 발전, 군사체제의 재편, 법의 공정한 체제 완비가 필요하다”며 “이는 일본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할 것”이라고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식민지 지배체제를 위한 명분을 이런 식으로 기만했던 것이다.
조선은 타율적 역사의 연속이고, 일본의 내정개혁 지원을 통해서야 비로소 독립국가의 면모를 세울 수 있다는 이 주장은 일제 강점기 식민사학의 기본이 되었고, 일본의 조선지배는 선의에 의한 조선발전 지원책이며 훗날 대동아 공영권의 정당화를 위한 뿌리가 되었다.
조선의 근대는 타율적으로 강제화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사냥터가 되기 위한 방식으로 구조화되어갔다. 교육에서 철도 등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식민통치와 착취수탈의 도구를 만드는 과정이 그 최대의 목표이자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이 제국주의의 범죄를 은폐하는 논리일 뿐이다. 매국 행위다.
피터 두우스(Peter Duus)는 미국의 사학자로서 스탠포드에서 가르쳤던 일본 전문가다. 그의 책 <일본 근대사>는 오래 전 번역되어 나와 있고, <주판과 칼 : 일본의 한국 침범 1895-1910/The Abacus and the Sword : The Japanese Penetraion of Korea 18895-1910>은 일본의 조선침략사와 일본제국주의의 기원과 전개에 대한 책이다.
이 책은 일본의 명치유신 이후 그 국가적 정체성을 철저하게 제국주의 체제로 잡아 조선에 대한 침략을 그 국가적 정체성의 본질로 만든 과정을 폭로, 분석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명치유신을 이끈 사상가로 떠받들리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해야 한다며 일본은 군함을 파견, 그 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동아시아는 이런 과정을 통해 이후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비참한 재앙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미국의 한 일본역사 전문학자의 육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경고를 발하고 있다. 피터 두우스는 미국과 영국이 일본의 대만점령 이후 일본은 대만쪽보다는 조선에 주력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끌면서 러시아와의 대치에서 일본을 앞세우는 작전을 폈던 것도 자료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합병과 식민지 정책에는 이 시기 미국과 영국의 농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그 시기 앞에 일어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일본의 조선침략을 위한 기반구축이었다.
청일전쟁은 우리 근현대사의 운명을 가르는 전쟁이었다. 이로써 중화체제의 지배질서는 일대 타격을 입고 무너졌으며 일본의 조선 지배를 위한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의 관여는 일본의 조선지배 전략에 중대한 장애가 되었고 결국 러일전쟁이라는 또 하나의 고비를 기다려야 했다.
청일전쟁, 일본의 조선지배 전략 : 동학농민혁명을 궤멸시키다
특히 청일전쟁은 동학농민전쟁의 진압과 토벌로 직결되고 조선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근본적으로 좌절시킨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후 한일합병의 토대가 마련된 의미를 갖는다.
이를 집중적으로 다룬 후지무라 미치오(藤村道生)의 <청일전쟁>은 그야말로 역작이다. 그의 스승이 되는 시노부 세이자부로(信夫淸三郞)의 <청일전쟁>은 일본군부의 내부를 추적하고 파헤친 중요한 학문적 성과다. 일본의 군부는 개전의 이유를 조선의 내정개혁 등 이것 저것으로 둘러댔으나 근본적 목표는 조선에 대한 지배였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 연구는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시노부 세이자부로의 책이 1934년에 나왔는데 발매 금지처분이 되고 1970년이 돼서야 후지무라 미치오가 그 책의 주석과 함께 재발간을 했을 정도였다. 청일전쟁은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의 논지를 여지없이 파산시킨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지배와 착취, 수탈 동아시아 전쟁기지화 등의 역사가 가진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재일 사학자 박종근(朴宗根) 선생의 <청일전쟁과 조선>의 초판은 1982년에 나왔으며 1999년에 3쇄를 찍었다. 이 책은 국내에서도 오래 전 번역되어 나온 바 있는 박경식(朴慶植) 선생의 1973년 출간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지배>와 더불어 재일사학의 너무나 소중한 성과다. 모두 일본의 침략전쟁과 식민지 통치의 본질을 파헤쳤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외상 무쓰 무네미스(陸奧宗光)가 어떤 식견과 역사적 인식을 가지고 조선 지배에 대해 임했는지를 알면 통탄할 지경이다. 그의 비망록 <건건록(蹇蹇錄)>은 일본이 조선 정세를 어떻게 파악하고 국제정세를 조정했는지 그대로 보여준다. 그 내용의 치밀함은 소름이 끼칠 정도다.
일본은 여전히 조선침략과 지배를 꿈꾼다. 윤석열 정권은 이들을 끌여들여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려든다. 민족반역 세력이다. 일본이 저질렀고 여전히 기획하고 있는 조선침략의 뿌리를 완전히 드러내야 한다.
친일매국 세력의 타도와 자주의 길을 촛불로 밝혀야 한다
답은 분명하다. 친일매국 세력을 타도하는 것이 우리의 자주와 독립의 기본적 요구다. 친일매국세력을 죄다 쓸어모아 자신의 권력체로 만들고 있는 윤석열 정권을 몰아내는 것은 민주화 운동의 차원을 넘어, 진정한 광복을 위한 구국, 독립투쟁이다. 오는 8월 17일 촛불행동의 전국집중은 그 의지를 모아 윤석열 탄핵과 자주독립의 길을 함께 여는 뜨거운 항쟁의 현장이 될 것이라 믿는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