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이 6·25 전부 아닌데 백선엽 콕 집어 영웅화

기념 영상서 민족 비극은 빠지고 특정 인물만 강조

하필 백선엽 동상 30분 거리에서 6·25전쟁 기념식

대통령, 한반도 위기 상승…"비열한 북한, 단호한 대응"

미 항공모함까지 승선해 장병들에게 "적 물리쳐 승리"

정작 조용한 북한…예년처럼 주민들 반미의식 고취

25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6·25전쟁 74주년 행사에서 '우리는 전진한다' 헌정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2024.6.25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25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6·25전쟁 74주년 행사에서 '우리는 전진한다' 헌정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2024.6.25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백선엽으로 시작한 6·25전쟁 기념식

올해 처음 대구에서 개최된 6·25전쟁 제74주년 기념식은 시작부터 '간도 특설대' 출신 퇴역 육군대장 백선엽(1920~2020)으로 문을 열었다.

25일 대구 북구 엑스코(오디토리움)에서 열린 6·25전쟁 기념식은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씨가 입장해 내외 귀빈과 인사한 뒤, 사회자 진유현 아나운서의 개식 선언으로 막을 올렸다.

첫 순서는 약 1분 30초짜리 6·25전쟁 기념식 영상 시청이었다.

웅장한 음악이 깔린 영상은 3일 만에 서울이 함락 당하고 국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났다는 설명을 하면서, 단 2명의 인물만 조명했다. 첫 번째는 6·25전쟁 당시 미 8군사령관이자 낙동강 방어선을 전투 지휘한 월튼 해리스 워커. 그의 생전 모습과 함께 영상에 "Stand or Die(필사의 각오로 지켜라!)"라는 영문 자막이 올랐다. 'Stand or Die'는 낙동강 방어 당시 워커가 경북 상주에 주둔했던 미 25보병사단에 내린 명령으로 알려져 있다(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 미 25사단 보고서).

 

6·25전쟁 제74주년 기념식 영상 갈무리. 2024.6.25. 윤석열 유튜브 공식채널, KTV
6·25전쟁 제74주년 기념식 영상 갈무리. 2024.6.25. 윤석열 유튜브 공식채널, KTV

이어 두 번째, 백선엽이 나온다. 영상 자막에는 "백선엽 사단장은 제11연대 제1대대 병력을 수습한 다음 장병들에게 훈시하였다"라며 "우리는 한 치의 땅도 적에게 허용할 수 없으며 죽음으로써 이곳을 사수하여야 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영상은 낙동강 전선의 여러 전투를 짧게 설명하며 '죽음을 불사한 대혈전!' '시산혈해(屍山血海·사람의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피가 바다같이 흐름)의 낙동강 전선' 등의 자막과 함께 끝났다.

 

6·25전쟁 제74주년 기념식 영상 갈무리. 2024.6.25. 윤석열 유튜브 공식채널, KTV
6·25전쟁 제74주년 기념식 영상 갈무리. 2024.6.25. 윤석열 유튜브 공식채널, KTV

영상은 워커와 백선엽, 오직 두 인물만 강조했다. 6·25전쟁사에서 낙동강 방어 전투의 비중은 크지만, 전쟁 자체는 낙동강이 아닌 한반도 전 국토에서 일어났고 남북한 300만 명이 희생된 민족의 비극으로 끝났다.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휴전 중인) 전쟁을 두고, 외국 군인을 영웅으로 전면에 내세우면서 친일 문제가 있는 특정 인물을 함께 띄우는 게 정부 공식행사 영상으로 바람직한지 의문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은 해당 영상에 대해 "한국전쟁 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작전 지휘권 마저 넘겨준 장본인들에 대한 과대평가"라며 "6·25전쟁 당시 전사한 수많은 국군 장병에 대한 애도보다는 미국 장군에 대한 과한 칭송은 마치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와 의병보다 명나라 원군을 더욱 칭송하는 것 같아 불편하다"고 평가했다.

백선엽의 공적만 지나치게 강조된 점도 문제다. 240㎞에 달하는 낙동강 방어선엔 한·미 8개 사단이 있었다. 백선엽의 공적으로 알려진 다부동 전투 외에도 △군위·의흥 전투 △영천 전투 △형산강 전투 △포항전투 △기계 전투 △보현산 전투 등이 있었다. 참전 군인이자 퇴역 준장인 박경석 씨도 2020년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백선엽의 제1사단은 8개 사단 가운데 하나였는데 공적이 부풀려졌다"고 말한 바 있다.(2020년 7월 20일, 한겨레, <“백선엽은 조작된 영웅” 참전군인이 말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5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6·25전쟁 제74주년 행사'에서 6·25의 노래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2024.6.25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25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6·25전쟁 제74주년 행사'에서 6·25의 노래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2024.6.25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윤석열 정부에서 '홍범도 죽이기'와 동시에 '백선엽 띄우기'를 추진해 온 점을 고려하면 모종의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된다. 지방에서 개최한 첫 6·25전쟁 기념식을 백선엽 동상(경북 칠곡 소재)과 차로 30분 거리인 대구에서 열고, 시작부터 백선엽을 띄운 점을 우연으로만 보긴 어렵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부 관계자는 "올해부터 지방에 거주하는 참전 유공자를 위해 광역벌 순회 행사로 기념식을 치른다"며 "첫 지역으로 6·25격전지가 다수 있는 대구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비열한 북한, 단호하게 대응"

백선엽으로 시작한 기념식은 한반도 위기 고조로 절정을 이뤘다. 윤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6·25전쟁에 대해 "북한 정권이, 적화통일의 야욕에 사로잡혀 일으킨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이라고 표현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이 있었던 이명박 정부의 6·25전쟁 60주년 기념사나 61주년 기념사, 박근혜 정부의 기념사에서도 북한에 대한 경고 메시지는 있었지만, 6·25전쟁 개념 자체를 민족사의 비극에 초점을 맞췄지 북한 정권에 맞추지는 않았다. 그만큼 호전적인 내용이었다.

윤 대통령은 더 나아가 "북한은 퇴행의 길을 고집하며 지구상 마지막 동토로 남아 있다"면서 "주민들의 참혹한 삶을 외면하고 동포들의 인권을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정권의 안위에만 골몰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국제사회의 거듭된 경고에도 여전히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하여 끊임없이 도발을 획책하고 있다"며 "최근에는 오물풍선 살포와 같이 비열하고 비이성적인 도발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아울러 "지난주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조약'을 맺고, 유엔 안보리 결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군사, 경제적 협력 강화마저 약속했다"며 "역사의 진보에 역행하는 시대착오적 행동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군은 어떠한 경우라도 북한이 대한민국을 감히 넘보지 못하도록 확고한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북한의 도발에 압도적으로,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6·25 참전영웅 초청 위로연'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4.6.25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6·25 참전영웅 초청 위로연'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24.6.25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그의 기념사에는 최근 고조되는 한반도 위기를 '상승'시키는 내용만 담겨 있었고 출구는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한·미동맹 및 한·미·일 군사협력에 대응해 북한 김정은 정권은 최근 러시아 푸틴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 조약을 하면서 한반도는 미·러 강대국 대치의 한복판으로 들어갔다(☞관련 기사). 윤 대통령은 북·러간 조약을 문제 삼았지만, 대통령실 역시 이에 대응해 "우크라에 대한 무기 지원 문제를 재검토할 예정"이라고 맞섰다(장호진 국가안보실장). 자칫 러시아가 설정한 한러 관계의 '레드 라인'을 넘는다면 한반도도 얼마든지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있는 상태다(☞관련 기사).

하지만 대통령이 기념사에서 제시한 해법은 단순했다. 취임 이후 지금까지 반복해온 한·미동맹과 가치 연대였다. "70주년을 맞아 더욱 굳건하고 강력해진 한·미동맹을 토대로,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연대하여 우리의 자유와 평화를 더욱 단단하게 지켜나갈 것입니다. 평화는 말로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강력한 힘과 철통같은 안보태세야말로 나라와 국민을 지키고,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이룩하는 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부산 해군작전기지에서 미 해군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함에 승선해 비행 갑판을 시찰하고 있다. 루즈벨트함은 한국·미국·일본의 첫 다영역 군사훈련인 '프리덤 에지' 참여를 위해 지난 22일 부산 해군작전기지에 입항했다.앞줄 왼쪽부터 크리스토퍼 라네브 미8군 사령관, 최병옥 국방비서관, 윤 대통령, 양용모 해군참모총장, 로즈 드레닝 11항모 비행단장, 미 해군 제9항모강습단장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준장. 2024.6.25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부산 해군작전기지에서 미 해군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함에 승선해 비행 갑판을 시찰하고 있다. 루즈벨트함은 한국·미국·일본의 첫 다영역 군사훈련인 '프리덤 에지' 참여를 위해 지난 22일 부산 해군작전기지에 입항했다.앞줄 왼쪽부터 크리스토퍼 라네브 미8군 사령관, 최병옥 국방비서관, 윤 대통령, 양용모 해군참모총장, 로즈 드레닝 11항모 비행단장, 미 해군 제9항모강습단장인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준장. 2024.6.25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미 항공모함까지 승선해 "적 물리쳐 승리"

메시지에 이어 직접 행동에도 나섰다. 윤 대통령은 대구에서 6·25전쟁 기념식과 참전 유공자 위로연을 마친 뒤, 오후 부산 해군작전기지로 넘어가 정박 중인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항공모함을 방문했다. 미국 항공모함에 승선한 현직 대통령은 1974년 박정희 전 대통령, 1994년 김영삼 전 대통령에 이어 윤 대통령이 세 번째다. 대통령이 기념사에 이어 항공모함 승선으로 북한 군부를 자극할 메시지를 직접 낸 것이다.

윤 대통령이 승선한 루스벨트함은 이달 말 열리는 한·미·일의 첫 다영역 군사훈련 '프리덤 에지'에 참가하기 위해 입항했다. 미국은 북러 정상회담과 이번 훈련이 별개라고 선을 그었지만, 북한은 반발하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윤 대통령은 루스벨트함에 승선해 맞이 나온 한·미 장병 300여 명과 만난 뒤, 항공기 이동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비행갑판으로 이동, 항모의 주력 전투기인 F/A-18 등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이후 시찰을 마치고 격납고로 이동해 한·미 장병들과 만났다.

윤 대통령은 장병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강한 메시지를 냈다. 그는 "이번 루스벨트 항모의 방한은 지난해 4월 저와 조 바이든 대통령이 채택한 '워싱턴선언'의 이행 조치"라며 "강력한 확장억제를 포함한 미국의 철통같은 대한 방위공약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은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하면서 핵 선제 사용 가능성을 공언하며 한반도와 역내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며 "한·미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하며,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우리의 동맹은 그 어떠한 적도 물리쳐 승리할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부산 해군작전기지에서 미 해군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함에 승선해 비행갑판 통제실에서 브라이언 스크럼 루즈벨트 함장으로부터 항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루즈벨트함은 한국·미국·일본의 첫 다영역 군사훈련인 '프리덤 에지' 참여를 위해 지난 22일 부산 해군작전기지에 입항했다. 2024.6.25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25일 부산 해군작전기지에서 미 해군 항공모함 시어도어 루즈벨트함에 승선해 비행갑판 통제실에서 브라이언 스크럼 루즈벨트 함장으로부터 항모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루즈벨트함은 한국·미국·일본의 첫 다영역 군사훈련인 '프리덤 에지' 참여를 위해 지난 22일 부산 해군작전기지에 입항했다. 2024.6.25 [대통령실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연합뉴스

대통령의 항모 방문 행사에는 신원식 국방부 장관, 양용모 해군참모총장, 강신철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 최성혁 해군작전사령관 등이 참석했으며, 대통령실에서는 장호진 국가안보실장, 인성환 안보실 제2차장 등이 동행했다. 미국 쪽에서는 크리스토퍼 라네브 미8군사령관, 닐 코프라스키 주한미해군사령관, 크리스토퍼 알렉산더 제9항모강습단장 등이 참석했다.

대통령실은 "격려사를 마친 대통령은 한미 장병들과 일일이 악수하고 등을 두드려 주며 격려했다"며 "한미 장병들은 대통령이 격납고를 떠날 때까지 환호성을 보냈다"고 홍보했다.

한편 북한은 6·25전쟁 발발 74주년인 이날 평이한 분위기였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950년대 조국수호 정신을 필승의 무기로 틀어쥐고 우리 국가의 존엄과 국익을 억척같이 수호하자'는 제목의 1면 사설에서 "전화의 나날로부터 장장 70여년의 세월이 흘러 많은 것이 변하였지만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적 본성과 야망은 추호도 변하지 않았다"며, 주민들을 상대로 반미 의식을 고취했다. 

북한은 매년 전쟁 발발 당일인 6월 25일부터 정전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까지를 '반미 공동투쟁 월간'으로 지정하고 한·미를 성토해왔다. 6·25는 '미제 반대투쟁의 날'로 기념하고, 정전협정 체결일인 7·27은 전승절로 크게 기념한다. 올해도 6·25를 앞두고 청년학생들과 여맹(조선사회주의여성동맹)원들의 복수결의 모임, 노동계급과 직맹(조선직업총동맹)원들의 웅변모임, 미국의 '만행' 체험자들과 농민들의 상봉모임 등이 열렸다고 노동신문은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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