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 조 혈세 축내는 '허가받은 도둑' 넘어
'조직 배신의 원리'까지 장착한 검찰 조직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경영학이나 행정학 이론 중에 ‘파킨슨의 법칙’이란 게 있다. 주로 인사(人事)관리와 연관된 내용인데, 인사관리란 말 그대로 일과 사람, 조직 간 관계를 다룬다. 여기에 나오는 파킨슨의 법칙이란, 관리를 해야 하는 대상은 줄어드는데 관리자의 수는 늘어나는 역설적인 현상을 지적한다. 한마디로, 관료화한 거대조직의 비효율이 문제의 핵심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살다 보면 그런 일이 제법 많다. 일례로, 군대에서 병사들의 숫자는 줄어드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장교의 수가 이상하게 늘어난다든지, 아니면 사회복지 수혜 대상은 줄어드는데, 복지 담당 공무원의 수만 증가하는 경우가 있다.
관리 대상은 줄어드는데 관리자는 늘어나는 ‘웃기는’ 법칙
실제로 ‘파킨슨의 법칙’을 1958년에 책(Parkinson's Law: The Pursuit of Progress, London: John Murray)을 통해 처음 제시한 영국의 시릴 노스코트 파킨슨(Cyril Northcote Parkinson, 1909~1993) 박사는 1930년대 자신의 해군 근무 경험을 그 근거로 삼았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기원이 된 영국 해군의 역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나중엔 영국 해군 장교 생활도 했다. 심지어 그 분야의 교관 내지 교수 생활도 했다. 그러던 중 파킨슨은 특히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영국 해군 조직을 살피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1914년부터 1928년까지 해군 함정의 수는 67%, 장병의 수는 31.5%나 감소했으나, 행정인력이 오히려 78%나 증가한 사실이 실제 자료로 확인된 것이다. 즉 영국해군의 조직 크기나 업무량이 줄어든 것에 비해 관리 인력은 매년 평균 5.75%씩 증가했던 것!
이 ‘웃기는’ 현실을 비꼬듯 고발하기 위해 그는 처음으로 이 이상한 법칙을 1955년에 저명 잡지 <이코노미스트>에 짧은 글로 발표했다. 이 글에 많은 이들이 주목했고 그는 이를 기반으로 3년 뒤에 앞의 저서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오늘날까지 학계에서는 상당히 많이 읽힌다. 파킨슨의 법칙을 일명 ‘치솟는 피라미드 법칙(the law of rising pyramid)’이라 하는 것도, 일과 조직은 줄어드는 데 관리 인력만 피라미드처럼 불어나는 역설적 현상을 비꼬기 때문이다.
물론, 현상을 서술하는 것만으로는 ‘법칙’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 현상이 나오게 된 원인과 메커니즘을 해명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크게 두 가지가 주효했다. 첫째, ‘부하 배증의 원리’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어떤 (고위) 공무원은 업무량이 급증할 때 유능한 인력을 보충하기보다 ‘말 잘 듣는’ 순종형의 부하들로만 자리를 채우다 보니 전체 인력만 증가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동료나 더 유능한 사람을 채용하면 자신의 지위가 불안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작동한 결과다. 둘째, ‘업무 배증의 원리’라 불리는 것으로, (의도와 무관하게) 갈수록 무능한 인력이 늘어남에 따라 지시, 감시, 통제, 보고 등 관리 업무가 부수적으로 더 늘어나게 되어 있다. 게다가 조직 전체의 무능이나 ‘하는 일 없음’이 폭로될까 두려워 조직 구성원들끼리 서로 앞을 다투듯 ‘쓸데없는’ 일거리를 만들어내는 경향성까지 생긴다. 결과적으로 업무량이 배증하니 조직이 비대해진다. 부하 배증과 업무 배증이 상호 상승 작용을 하면서 조직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만 상태가 되는 것이다. 사람 같으면 엄청난 수술을 해야 할 판이다.
수백 조 국민 세금을 ‘눈먼 돈’ 취급하는 ‘허가받은 도둑놈들’
물론 이 이론은 치열한 경쟁과 효율을 지상명령으로 여기는 자본주의 민간기업보다는 국민의 세금(‘눈먼 돈’)을 기반으로 작동하는 공공 관료조직에 더 잘 들어맞는다. 가난한 나라 인도 출신으로 영국 유학까지 해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자격까지 취득해 남아프리카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의 선구자, “인도의 미래를 위해서는 70만 개의 마을공화국이 필요하다”고 주창한 마하트마 간디(1869~1948)의 철학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각국의 대통령을 비롯한 수많은 정치‧행정 공무원들은 (수억 내지 수천 만 국민의) 혈세만 축내고 있는지 모른다. 파킨슨 박사보다 10년 뒤에 태어나 초등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던 내 아버지는 아무 학식이 없이도 막걸리만 몇 잔 걸치면 “허가받은 도둑놈들이 나랏돈을 다 빼먹는다”고 한탄하시기도 했다. 아버지의 ‘공인절도사’ 이론이라 해야 할까? 오늘날 수천 억에 이르는 ‘특수활동비’만이 아니라 수백 조에 이르는 국민 세금 전체(심지어 국가 부채까지)가 ‘눈먼 돈’ 아니던가?
그러나 설사 그 정도(간디 식의 ‘무용지물’ 내지 내 아버지 식의 ‘공인절도사’)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파킨슨 박사는 영국 해군 조직의 예를 통해 사람이 만든 조직이 그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현실을 정직하게 비판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내용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일부 이론적 한계나 모순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파킨슨 법칙은 오늘날에도 거대 정부나 공공 조직, 대기업병, 관료 조직이나 역기능 조직, 중독 조직 등의 비효율과 내부 문제를 비판할 때 종종 인용된다.
역사적 실증에 따르면, 10명 이하로 출발한 오늘의 영국 상원 조직도 1600년경에는 50명으로까지 확대되었는데 그와 더불어 오히려 힘이 약해졌고 170명이 넘자 오히려 회의조차 열리지 않는 조직이 되었다. 물론, 조직의 규모는 그 임무의 성격이나 상황의 복잡성 등을 반영, 얼마든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그 어떤 경우에도 통용되는 단일 해법이란 없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 그 중에서도 검찰 조직을 보면, ‘파킨슨의 법칙’을 그저 영국 해군이나 정부 조직의 현상이라고 쉽게 넘길 문제가 아님을 느낀다. 특히 한국의 검찰 조직은 ‘부하 배증의 원리’와 ‘업무 배증의 원리’라는 파킨슨 법칙의 기본을 훨씬 넘어 ‘조직 배신의 원리’까지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이렇다.
‘허가받은 도둑놈’ 넘어 ‘조직 배신의 원리’까지 장착한 검찰 조직
첫째, 검찰 조직의 존재 이유, 그것도 그 직업윤리의 기초인 ‘검사 선서’마저 배신했다. 모든 검사가 첫 출발할 때 태극기 앞에 엄숙히 맹세하는 ‘검사 선서’를 보자. 모든 검사들이 “국가와 국민의 부름을 받고 영광스러운 대한민국 검사의 직”에 나설 때 하는 진지한 다짐이다.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정의와 인권을 바로 세우고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라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은” 공직자다. 검사의 지향점은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 있는 검사,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따뜻한 검사,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한 검사,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바른 검사”다. 이런 이가 모범 검사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나의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하는 것이 검사 선서다. 과연 현재 대한민국 검사 약 2천 명 중 이 선서 앞에 떳떳한 이가 몇이나 될까? ‘검사 동일체 원칙’이라는 기괴한 논리 아래 ‘강자 동일시’를 하면서 비굴한 생존과 출세를 도모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물론, 좀도둑이나 단순 폭행범 같은 사건이야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잘 처리하겠지만,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힌 사안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하기란 ‘가뭄에 콩 나듯’ 한다.
둘째, 검찰의 사회적 신뢰가 땅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지하세계에서 헤맨다. 한국행정연구원 주관의 사회통합실태조사 결과(KOSIS 참고),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맡은 일을 잘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 지에 대해 ‘약간 믿는다’ 및 ‘매우 믿는다’고 응답한 자의 비율 총합)는 최근 10년 이상(2013년부터 2023년까지) 50%를 넘지 못했다. 그나마 문재인 정부 때인 2021년에만 50.1%였지, 박근혜 정부 때인 2016년엔 27.5%, 현 윤석열 정부 때인 2023년엔 44.5%에 불과했다. 역으로 말하면, 검찰에 대한 불신도가 60%에서 70% 이상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솔직히, 이것조차 과대평가의 결과로 보인다. 원래 신뢰도(Reliability)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위 ‘검사 선서’에 나오듯 “정의와 인권”을 수호하고 “오로지 진실만을 따라가는 공평(성)”을 지켜 “공익의 대표자”라는 본연의 사명에 타당성(Validity)을 지닐 것, 다른 하나는 (내 편은 봐주고 아니면 ‘먼지까지 탈탈 터는’ 이중잣대 없이) “범죄로부터 내 이웃과 공동체를 지키”며 “불의의 어둠을 걷어내는 용기”와 함께 “스스로에게 더 엄격한” 모습을 보일 정도로 일관성(Consistency)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숱한 ‘특수부’ 사건(정치경제적 큰 이슈)들에서 보듯, 검찰은 ‘내로남불’의 전형이었고, 공익의 대표자 내지 정의의 수호자라는 국민적 기대를 철저히 저버렸다. 2014년 세월호 직후에 보인 박근혜 정부 대처법(해경 해체) 식으로 말하면 “당장 검찰을 해체해야 할 판”이다.
균형과 견제의 정치를 잡아먹은 ‘검찰 쿠데타’
셋째, 검찰은 국민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데, 검찰이 스스로 국가 경영에 나섬으로써 사실상 본분을 망각했다. 어떤 이들은 이를 ‘검찰 쿠데타’라 하기도 한다. 따지고 보면, 검찰은 법원이나 경찰과 함께 ‘사법 정의’를 세움으로써 진실과 거짓을 가리고, 벌을 줄 자에게 벌 주는 일을 해야 한다. 또 국민들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 그 억울함을 폭력 없이 합법적으로 해결하는 마지막 통로가 검찰과 법원이 아니던가? 그래서 모든 검사는 처음에 “국민을 섬기고 국가에 봉사할 것을 명예를 걸고 굳게 다짐”하지 않던가? 그런데 비록 합법적인 형식의 절차를 밟았지만 검사가 직접 국가 통치에 나선 것은 본분 망각이자 조직 배신이다. 그 결과 정부와 국회 간 균형과 견제의 정치가 사라지고 편법적인 ‘시행령 정치’만 난무한다. 원래 정치란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절하면서도 바람직한 국정 운영을 하는 것이다. 모두, 국민의 행복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검찰공화국’은 검찰의 논리, 검찰 출신 대통령의 논리, 그리고 그 가족들의 이해관계(예, 300억 이상의 가짜 은행잔고증명서, 22억 이상 도이치 모터스 주가조작 이득, 수백 만 원 상당의 디올백 등 수수 의혹, 처갓집 명의의 땅 인근으로 고속도로를 끌어당긴 ‘양평 고속도로’ 건 등)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의 종합이 지난 4월의 총선 결과로 나타난 게 아니던가?
바로 이런 이유들로 인해 나는 원래 영국 해군 조직에서 출발했던 ‘파킨슨의 법칙’이 대한민국 검찰 조직으로 건너와서는 ‘파계승의 법칙’이 되었다고 본다. 이것은 이태 전에 유행했던, ‘바이든’=‘날리면’ 현상, 그리고 최근의 ‘위례 신도시’=‘윗 어르신’ 현상을 빗대어 하는 소리다. 어째 ‘파킨슨의 법칙’=‘파계승의 법칙’이 비슷하게 들리지 않는가? 자꾸 반복해서 들어 보시라. 특히, ‘바이든’=‘날리면’이라 했던 자들이나 일부 음성 분석가들, 그리고 ‘위례 신도시’=‘윗 어르신’이라 했던 검사들에게 ‘파계승의 법칙’을 반복해 들려주고 어떻게 들리는지 물어보고 싶다.
22대 국회에서는 ‘정의가 반드시 이루어지는 날’ 기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앞서 말한 세 가지 근거에서 영국의 ‘파킨슨의 법칙’이 한국에 와서는 ‘파계승의 법칙’으로 변질되었다고 하는 것이니, 단순한 착각(환청)이나 억지, 속임수가 아니다. 게다가 ‘파계승’이란 속세를 떠나 부처의 길을 걷던 스님이 (무슨 이유에서건) 다시 속세로 내려온 것에 불과하니, 뭐가 그리 문제인가? 차라리 파계승으로 정직하게 산다면 아무 문제없다. 그러나 원래의 ‘파킨슨의 법칙’이 한국의 검찰 조직에 와서 여러모로 ‘조직 배반’을 한 결과 (초등생도 아는 ‘바이든=날리면’ 식으로) ‘파계승의 법칙’이 된 것이라면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어디, 내 얘기에 합리적으로 또는 법리적으로 반박할 자 있으면 나서보시라! 그러나 이런 ‘쓸데없는’ 언쟁에서 이기면 뭐하고 지면 뭐하랴? 이겨도 지독히 서글플 것이고, 지면 서글프다 못해 슬프기까지 할 텐데!
그러니, 오호 통재라,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고 외쳤던 도산 안창호 선생(1878~1938)의 목소리는 과연 언제쯤 이 땅에서 거침없이 구현될 것인가? 오는 22대 국회부터는 신바람 나는 정치가 실현되어, 법과 정의, 진실이 바로 서기를 바란다. 죄 지은 자 벌 받고, 죄 없는 자, 저 푸른 숲을 노니는 샛노란 꾀꼬리들처럼 훌훌 나는 새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빌고 또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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