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이상학 강의 6] 없음의 가능성과 있음의 우연성
1. 없음의 가능성과 있음의 우연성
지난번 강의에서 우리는 있음이 없음 속에 있음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모든 것은 없음 속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야말로 있음의 가장 근원적인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없음 속에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있으면서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모든 것이 아예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지금 있는 모든 것이 없어질 수 있고 또 없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는 존재자의 비존재의 가능성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비존재의 가능성을 존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그것을 존재의 우연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연성이란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그러니까 모든 존재자가 비존재의 가능성 속에 있다는 것은 모든 존재자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또는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2. 근거에 대한 물음
여러분은 우리가 형이상학 강의를 처음 시작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앎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고찰했던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앎은 감각과 경험에서 시작하여 인식의 단계로 나아갑니다. 같은 앎이라도 경험은 어떤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만, 인식은 그 사실이 왜 그러한지 원인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원인이라도 과학은 개별적 사실이나, 특정한 존재 영역에서 원인을 묻지만, 철학은 존재 전체에 관하여 근거를 묻습니다. 이것이 과학과 철학의 결정적 차이라는 것도 여러분은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인이나 근거를 묻게 되는 까닭은 또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그 강의에서 소개했던 독일의 신비주의자 실레시우스의 “장미는 ‘왜’ 없이 있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핀다”라는 말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말은 그러니까 장미가 왜 피는지 묻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저 시구처럼 우리가 정말로 장미가 그냥 피기 때문에 핀다 생각하고, 그것이 왜 피는지 묻지 않는다면, 과학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을 땅 위의 다른 모든 동물과 구별해주는 학문적 인식의 능력은 이제 처음 말을 배우는 어린아이에게서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저 물음, ‘왜 그래?’라는 물음을 통해 추동됩니다. 멈출 곳을 알지 못하는 이 ‘왜?’라는 물음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그것의 존재 이유, 곧 그 일이 일어나야 할 정당한 권리를 묻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일에 대하여 ‘왜 그래?’라고 물을 수 있는 까닭은 모든 일이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존재의 우연성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존재자들이 없음 속에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우연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반대를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런 까닭에 왜 일어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일어났는지를 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인과 근거에 대한 물음은 존재의 비존재의 가능성 그리고 존재의 우연성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정은 우리가 결코 ‘왜?’라는 물음을 묻지 않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1=1이라는 등식을 보고 ‘아니 왜 1이 1이야?’라고 묻지는 않습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1이 1이 아닌 경우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1이 1이 아닐 수도 있는데, 아니 왜 1이 1인 거야?’라고 묻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모든 것이 자기와 같다는 원리, 즉 자기 동일성의 원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이것을 부정한다면, 내가 하는 모든 말의 의미가 자기부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즉 내가 방금 말했던 것, “내가 하는 모든 말의 의미가...”라는 어구에서 ‘내가’라는 말은 ‘나 아닌 것’과 구별되지 않을 것이고, ‘모든’이라는 말은 ‘어떤’이라는 말과 뒤섞일 것이며, ‘말’이란 말은 ‘말 아닌 것’과 섞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말을 하든, 어떤 말이나 생각도 일정한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혼란에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모든 개념의 자기동일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논리학에서는 동일률 또는 동일성의 원리라고 부릅니다. 이 원리는 논리학 책에 쓰여 있는 추상적 수학 공식 같은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적용하는 생각과 말의 제1법칙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어기고 싶어도 어길 수 없는 이 사유의 법칙 때문에, 누구도 1이 왜 1인지 묻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좀 다릅니다. 물론 여기서도 존재의 자기동일성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성철 스님의 법어처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입니다. 산과 물이 엄연히 구별되는 두 가지 존재인 한에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 산이 동시에 물이고 물이 동시에 산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산이 동시에 물이고 물이 동시에 산이라면, 그리고 다른 모든 것도 동시에 그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기도 하다면, 모든 것은 이것일 수도 저것일 수도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입니다. 세계가 그런 무차별한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한 가지 방식으로 규정되어 있는 한, 동시에 그것 아닌 다른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한에서 자기동일성의 원리는 현실적인 존재자에게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산이 산이지 물이 아니고, 물이 물이지 산이 아닌 한에서, 우리는 산이 왜 물이 아니고 산인지 묻지 않고, 물이 왜 산이 아니고 물인지 묻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아무리 산이 동시에 물일 수 없고 물이 동시에 산일 수 없다 할지라도, 산은 있지 않았을 수 있고, 물도 있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산에 핀 꽃도 있지 않았을 수 있고, 산에 사는 새도 있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아닌 다른 존재자에 대하여 자기 정체성을 지킬 수는 있겠지만, 자기 자신의 있음 자체에 대해서만은 반드시 그래야만 할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도 반드시 있어야만 할 필연성을 담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있지 않고 없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있는 것이 모두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바로 이 존재의 우연성 때문에 우리는 있는 것에 대해 왜 있느냐고 묻게 됩니다. 없을 수도 있는데, 왜 있느냐고 묻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근거 물음의 뿌리입니다. 그러니까 근거에 대한 물음은 반대의 가능성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역사학자가 5·18이 왜 일어났느냐고 물을 수 있는 까닭은 그 비극적이고도 숭고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전 강의에서 소개했던 스피노자의 결정론에 따른다면 5·18이 일어난 것도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이 삼각형의 본질로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영원 전부터 신에 의해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일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습니다. 이런 결정론에 따르면, 20세기 철학자 칼 포퍼가 야유조로 말했듯이, 베토벤이 운명교향곡을 하필이면 왜 C단조로 작곡했는지도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삼각형의 본질로부터 연역되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설령 그런 결정론이 옳다고 우리가 가정한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우리가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그것이 왜 일어났는지 묻지 말아야 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삼각형의 본질로부터 연역되듯이’라는 말은 한갓 비유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삼각형의 개념으로부터 연역됩니다. 삼각형은 세 직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입니다. 이 정의로부터 우리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는 삼각형이 아닙니다.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세계의 필연적 본질로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우리는 먼저 삼각형의 개념이 아니라 세계의 개념을 온전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우리가 삼각형의 개념으로부터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세계의 개념으로부터 왜 5·18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왜 베토벤은 운명교향곡을 A장조가 아니라 C단조로 작곡했는지를 증명해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의 개념을 아무리 분석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로부터 베토벤이 왜 운명교향곡을 C단조로 썼는지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세계 개념은 세계의 본질적 진리를 내포한 참된 개념이 아니고, 한갓 세계라는 이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참된 개념은 한갓 이름이 아니라, 그 사물의 설계도입니다. 이를테면 삼각형의 개념은 우리가 삼각형을 작도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집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집의 개념은 집이라는 이름이 아니고 집의 설계도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집을 설계한 건축가는 집이 지어지기 전에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지 않고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신이 자신의 의지와 계획에 따라 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신이 가지고 있는 세계 개념도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참된 개념이고 세계의 설계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삼각형의 정의로부터 삼각형을 작도할 수 있는 것처럼, 신은 세계에 대한 참된 개념에 기초하여 세계를 설계하고 창조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자기 자신의 설계도에 따라 세계 내의 모든 존재를 속속들이 규정하고 창조했으므로, 신은 세계 내에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경험하지 않고서도 영원 전부터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에 대한 신의 모든 인식은 경험에 앞서는 선험적인 인식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세계의 창조자도 설계자도 아니므로 세계에 대한 본질적으로 참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고, 그런 까닭에 왜 5·18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베토벤이 하필이면 왜 운명교향곡을 C단조로 작곡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설령 신의 정신 속에서 모든 일이 세계의 개념에 의해 결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대해 ‘왜?’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5·18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는 반대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그런 세계 개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반대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5·18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베토벤은 운명교향곡을 C단조로 작곡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반대의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왜?’라고 물을 수 있고, 또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세상 만사가 신의 관점에서는 사물의 본질로부터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이성적 진리라고 생각했던 라이프니츠도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인식은 사실적 진리일 수밖에 없다고 보았고, 그런 까닭에 모순율 또는 동일성의 원리를 진리의 으뜸 원리로 제시한 뒤에 두 번째로는 충분 근거의 원리를 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원리는 충분 근거율인데, 이 원리에 의거하여 우리는, 비록 우리에게 그 근거들이 대부분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것이 왜 이래야 하고 다르게 되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하여 충분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떤 사실도 참된 것으로 또는 존재하는 것으로 증명될 수 없고, 어떠한 명제도 참된 것으로 증명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라이프니츠, 『단자론』, 32절]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겸손하게도 사물의 근거가 우리에게는 대부분 알려질 수 없다는 것을 먼저 고백합니다. 뉴턴과 비슷한 시기에 미적분의 원리를 발견했던 박식한 철학자가 진리 앞에서 이리도 겸손했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보잘것없는 지식으로 모든 것을 아는 듯이 행세하는 얼치기 지식인들이 넘쳐나는 우리 시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시대든, 소크라테스적인 ‘무지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참된 철학자의 징표 가운데 하나라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하면 무지에 대한 자각이야말로 치열한 물음과 탐구의 근거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만하는 사람은 질문하지 않습니다. 오직 무지를 자각하는 사람만이 그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분투하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런 진리에 대한 간절한 동경으로부터 학문의 나무는 싹트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의 으뜸가는 기준은 모든 것이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동일성의 원리(principle of identity) 또는 어떤 것이 동시에 그것이 아닌 것일 수는 없다는 무모순의 원리(principle of non-contradiction)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원리를 거부한다면, 생각 자체가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앞서 소개했듯이 라이프니츠는 이 원리를 모든 진리의 으뜸가는 원리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세계에 대한 인식을 추구할 때, 무모순의 원리, 간단히 줄여 말해 모순율은 언제나 전제되어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통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에 대한 인식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우리가 거기 왜 물이 아니라 산이 있는지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의 원인을 아는 것이 그것에 대한 인식이라면, 우리는 진리를 알기 위해 산은 왜 물이 아니라 산이 되어야 했는지, 그리고 물은 왜 산이 아니라 물이 되어야 했는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을 라이프니츠는 위에서 인용한 『단자론』의 한 구절에서 “어떤 것이 왜 이래야 하고 다르게 되어서는 안 되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연성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지금 그렇게 있는 것과 다르게 존재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것이 왜 다른 식으로가 아니라 바로 그렇게 존재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근거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는 그 근거가 충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정말로 어떤 사실에 대한 참된 인식에 도달하려면 그 사실이 그렇게 일어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근거를 남김없이 철저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실에 대해 우리가 근거를 하나도 남김없이 알 수 있을까요? 라이프니츠가 “우리에게 그 근거들이 대부분 알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사실의 근거를 남김 없이 인식하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사물에 대한 남김 없는 충분한 근거를 알지 못하고, 어떤 것이 왜 그런지에 대한 최소한의 근거를 아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뉴턴은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첫 장에서 가장 중요한 힘의 개념을 동적인 힘(vis motrix)과 가속적인 힘(vis acceleratrix) 그리고 절대적인 힘(vis absoluta)으로 구별하여 정의한 다음, 절대적 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즉, 동적인 힘은 물체와 관련된 것으로, 물체의 전체 혹은 부분의 합이 중심을 향하려는 경향이다. 가속적인 힘은 물체의 위치와 관련된 것으로 물체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중심으로부터 이를 둘러싼 공간으로 발산되는 어떤 효능이다. 절대적인 힘은 중심에 관련된 것으로서, 이 중심은 그것 없이는 주위의 공간을 통해 동적인 힘이 전달될 수 없는 어떤 원인과도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인이 중심에 있는 어떤 물체에 의한 것―예를 들어, 자기력의 중심에 있는 자석이나 중력의 중심에 있는 지구―이든, 아니면 분명하지 않은 다른 원인에 의한 것이든, 크게 상관없다. 나는 여기서 이러한 개념을 순전히 수학적인 것으로 사용하며, 그 힘의 물리적 원인이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인지 고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뉴턴, 홍성욱 편역,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정의 8. 『과학고전선집』,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330쪽 아래]
쉽게 말하자면 동적인 힘[기동력]과 가속적 힘[가속력]은 물체 자체의 질량 및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힘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상대적인 힘인 까닭에 우리는 그 힘을 질량이나 위치 같은 다른 변수를 통해 계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적인 힘은 그냥 힘 그 자체가 자기 자신의 중심 그러니까 자체 내에 지니고 있는 것, 즉 기동력과 가속력의 진정한 원인이 되는 그런 내적이고도 고유한 힘입니다. 그런데 뉴턴은 바로 그런 궁극적 원인이 되는 이 절대적인 힘이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런 힘의 정체를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게다가 그는 이런 힘의 크기를 그저 수학적인 관점에서 즉 상대적인 크기를 측정하기 위해서만 사용할 뿐, 그것이 물리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뉴턴은 힘을 고찰하면서 상대적 관계 속에서 그것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고찰할 뿐, 우주 내에서 물질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궁극적으로 근거 짓는 실질적 원인이 되는 힘 자체가 과연 무엇인지는 묻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식으로 탐구의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뉴턴은 오히려 성공을 거두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뉴턴이 이룩한 물리학적 성공이란 라이프니츠의 관점에서 보자면 충분한 근거에 대한 탐구를 포기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오늘날 인류가 이룩한 비약적인 과학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연에 대해 알고 있는 원인이란 그저 표면적이고 상대적인 것일 뿐, 그것이 물질이든 힘이든지 간에, 자연 현상의 근저에 놓여 있는 진정한 원인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무지의 어둠 속에 머물러 있다고 말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까닭에 자연 현상의 이면에 감추어진 충분한 근거를 탐구하는 것은 여전히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3.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
인식은 근거에 대한 앎입니다. 과학도 철학도 모두 인식인 한에서 근거를 묻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물의 충분한 근거를 알 수 있을 때까지, 근거에 대한 물음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충분한 근거를 남김 없이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어떤 사실에 대해 참된 진리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똑같이 근거를 묻는다 하더라도 과학은 존재자 전체에서 일부분을 떼어내어 그 근거를 묻습니다. 물리학자는 물질 세계의 운동 원인을 묻고, 생물학자는 생명 현상의 원인을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학자의 경우에는 어떤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왜 일어났는지 그 원인을 묻습니다.
이에 반해 같은 근거를 묻더라도 철학자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의 원인을 묻습니다. 그러니까 철학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왜 있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과학자가 어떤 개별적 사물에 대해 왜 그것이 없지 않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그것은 그 사물이 생겨난 원인을 묻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철학자가 존재하는 것 전체에 대해 그 원인을 묻는다면, 그는 왜 존재하는 것 전체가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를 묻게 될 것입니다. 존재하는 것 전체의 반대는 아무것도 없는 것, 곧 절대적 무(無)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자는 존재 전체의 반대 상태인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상정하고, 왜 아무것도 없을 수 있는데,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지를 묻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이 물음을 정식화하여 언어적으로 표현한 것은 라이프니츠가 처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자연과 은총의 이성적 원리』라는 짧은 저작에서 다음과 같이 이 물음을 제시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순히 물리학자로서만 얘기해 왔다. 이제는 비록 일반적으로 적용되지는 않지만, 충분한 근거가 없이는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 대 원리를 사용하여,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올라가야만 한다. 그 원리는 사물을 충분히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왜 그것이 그러하고, 다르지 않은지를 규정하기 위해 충분한 그런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이 원리가 정립되고 나면, 반드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첫 번째 물음은, ‘왜 무가 아니고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무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쉽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 『자연과 은총의 이성적 원리』, 7절, 윤선구 옮김, 『형이상학 논고』 236쪽 아래]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물리학자로서 근거를 묻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이상학자로서 근거를 묻습니다. 물론 물리학이든 형이상학이든, 충분 근거율에 따라 사물의 충분한 근거를 묻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충분 근거율을 풀어서 설명하자면, 그 원리는 ‘어떤 일이 왜 그렇게 일어났고 다르게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충분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다면, 그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이 원리가 형이상학의 지평에 적용될 때, 가장 먼저 제기되는 물음이 바로 왜 무가 아니라 도리어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이라는 겁니다. 생각하면 이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과학이 개별적 사실이나 부분적 존재 영역에 관해 근거를 묻는다면 철학은 존재 일반 또는 존재자 전체에 관해 근거를 묻습니다. 그런데 모든 근거 물음은 반대의 가능성에서 출발합니다. 개별 학문에서 근거를 물을 때는 개별적 사실에 대한 반대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근거를 묻습니다. 왜 5,18이 일어났느냐는 물음은 5·18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 있다는 반대의 가능성을 상정하고 묻는 물음인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이 존재자 전체에 대해 그 존재의 근거를 물을 때도 근거가 물어지는 존재 사태의 반대되는 상황이 상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반대가 무엇입니까? 존재자 전체의 반대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 허무입니다. 그래서 라이프니츠는 왜 무가 아니라 어떤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것이 형이상학에서 가장 처음 물어질 수밖에 없는 근거에 대한 물음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4. 파르메니데스와 무의 불가능성
이처럼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처음으로 정식화한 사람이 라이프니츠라면, 그전에는 철학자들 가운데 아무도 그 물음을 물었던 사람이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니 이것은 철학자만 묻는 물음이 아니고 철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보통 사람도 얼마든지 물을 수 있는 물음입니다. 저 자신의 경우에 대해서는 침묵하기 위해 제 사촌 동생의 사례를 들자면, 제 동생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에 그 질문이 자기에게 엄습해 왔다고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왜 이 세계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렇게 생겨나 존재하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이 찾아왔던 거지요.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 누가 대답해 줄 수 있었겠습니까? 제 동생은 그 무렵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었으니, 그가 가장 먼저 듣고 또 스스로도 생각해 볼 수 있는 대답은 신이 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했기 때문에 이 세계가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어릴 적부터 교회에서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말이었으니 전혀 낯선 말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한번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이 엄습한 뒤에는 그런 편리한 대답이 아무 쓸모가 없어져버렸습니다. 왜냐하면 왜 없지 않고 있느냐라는 물음 앞에서 무력하기는 신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이 세계 전체가 없지 않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신이 세계를 창조했으므로 세계가 있다고 대답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물음이 끝나지 않으니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필경, 그럼 신은 왜 없지 않고 있느냐는 물음을 이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라이프니츠의 말처럼 무는 존재보다 훨씬 더 쉽고 단순합니다. 세계든, 신이든, 빅뱅의 콩알이든, 아무것도 없었으면 5·18도 없었고, 세월호의 비극도, 이태원 참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우크라이나와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참상 같은 것도 없었겠지요. 그런데 그 간단하고 쉬운 절대적 허무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해서 이 모든 비극을 인류가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왜?
스스로 대답할 수도 없고 남에게 물어도 답을 들을 수 없는 이 막막한 물음이 자기를 엄습할 때마다, 미칠 것 같은 답답함에 동생은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 동생은 막연히 이 물음이 세계 전체의 원인에 대한 물음이라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물리학과에 진학하려 했으나, 실은 이 물음이 물리학이 아니라 철학의 근본 물음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안 뒤에 철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것이 과연 잘한 일이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무튼 철학의 ㅊ-자도 모르는 고등학생도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서도 틀림없이 제 사촌 동생처럼, 이 세계 전체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 때문에 숨막히는 전율을 경험한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많은 형이상학적인 근본 물음이 그렇듯이 이 물음도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보통 사람이 묻지 않는 엉뚱한 물음을 억지로 만들어내어 공연히 머리를 복잡하게 만드는 학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다소 막연하기는 하지만 누구나 생각하고 묻는 물음을 명료하게 정식화하고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철학은 모두를 위한 보편 학문입니다.
물론 라이프니츠 이전에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그 철학자처럼 정식화해서 제시한 철학자가 없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라이프니츠 이전에는 이 물음이 물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물음을 정식화하지 않았다고 해서, 라이프니츠 이전의 철학자들이, 철학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내 사촌동생도 물었던 저 물음을 물을 줄 몰랐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인 가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표현 방식이 달랐을 뿐, 이미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 역시 이 물음을 물었다는 것을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 플라톤의 대화편 『소피스테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대화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반부의 주제는 ‘소피스테스’라는 이름이 암시하듯이, 소피스테스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입니다. 이 전반부도 나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이 대화편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후반부의 주제입니다. 그 주제는 무(無)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입니다. 그런데 소피스테스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무슨 상관이기에 플라톤은 한 대화편에서 이 두 가지 물음을 이어놓은 것일까요? 그 까닭은 플라톤이 가장 존경했던 선배 철학자였던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우리가 바로 이전 강의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無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무를 탐구의 주제로 삼아 그것이 무엇인지 묻기 위해서는 먼저, 무라는 것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보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끌어들인 것이 소피스테스였습니다.
플라톤은 이 대화편에서 파르메니데스와 그의 제자 제논이 활동했던 엘레아에서 아테네를 방문한 어떤 손님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반부에서는 소피스테스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 과정에서 소피스테스는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되지만 결국, 소피스테스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견해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소피스테스는 자기가 거짓말을 일삼는 자라고 비판하는 자들을 향해 거꾸로 거짓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므로 그런 비난은 가당치 않다고 응수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짓말이라는 것은 있는 것을 없는 것이라고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데, 이처럼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뒤섞는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듯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대화편의 이 장면을 직접 읽어볼까요.
“손님: 여보게, 우리는 참으로 매우 힘든 탐구를 하고 있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고,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것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할 때, 이 모든 것은 이전에도 지금도 언제나 어려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세. 왜냐하면 거짓을 말하는 것이나 믿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면서 어떻게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 테아이테토스, [그걸 이해하기는]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세.
테아이테토스: 어째서 그렇습니까?
손님: 왜냐하면 이 말은 대담하게도 있지 않은 것이 있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일세. 왜냐하면 거짓은 다른 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말일세. 그런데 여보게, 위대한 파르메니데스는 우리가 어렸을 적에 시작해서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때마다 산문으로 또 운문으로도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것을 단호히 거부했었네.
‘있지 않은 것이 있다’, 이런 말에 굴복하지 말지어다.
그대는 도리어 탐구할 때 생각을 이 길에서 멀리할지어다.”
[플라톤, 『소피스테스』 237a]
거짓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있지 않은 것이 있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거짓말이 가능하다는 것은 ‘있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자동적으로 전제하게 됩니다. 이리하여 거짓말 속에서 있음과 없음이 결합됩니다. 그런데 만약 없음이란 것이 파르메니데스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라면 거짓말도 없었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소피스트 같은 자들이 거짓말을 일삼아 한다는 사실은 없음이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든 있음과 결합하여 출현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그냥 없는 것이므로 절대로 없는 것이 있는 것일 수 없다면, “거짓을 말하는 것이나 믿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이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면서 어떻게 모순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지,”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플라톤이 『소피스테스』에서 제기하는 문제입니다. 모순에 빠지지 않고 거짓말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없음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소피스테스』의 후반부에서 본격적으로 없음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 어떻든, 이것이 지금 우리가 묻고 있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요? 이 물음에 간단히 답하자면, 플라톤이 무를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즉 절대적인 無 때문에 우리가 왜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플라톤 자신은 자신이 왜 무의 문제를 물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이런 식으로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이런 사정은 파르메니데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은 무는 있을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말할 수도 없다고 말하고 다른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가 무엇인지 다시 묻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두 철학자 모두, 왜 있지도 않은 무를 물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이 왜 무에 그리도 집착했는지 얼마든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무라는 것이 가능한 어떤 사태로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왜 무일 수도 있었는데, 무가 아니라 존재인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 불편한 물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는 무를 불가능한 것으로서, 철저히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있지만, 없는 것은 없다고 주장했고, 플라톤은 그것만으로는 무를 없애기 어렵다 생각하여 그 문제를 다시 소환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이 무를 가지고 씨름한 까닭은 나중에 라이프니츠가 정식화했던 존재의 근거에 대한 물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서도 라이프니츠의 물음은 형이상학적 탐구의 중심에 놓여 있었던 물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따질 필요 없이 더 중요한 것은 파르메니데스가 주장한 無의 불가능성이 그 이후 철학자들에게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무화시키는 영속적인 모범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아무것도 없다거나 있지 않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 까닭은 다른 무엇보다 ‘없다’라고 하는 사태나 ‘없는 것’이란 대상은 말 그대로 없는 것이므로 애당초 문제조차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런 까닭에 없는 것은 도무지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른 [탐구의] 길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없다는 사태가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대에게 이 길은 전적으로 걸을 수 없는 길이라고 말하노라.
왜냐하면 그것은 도무지 실현 불가능한 것이니, 그대는 비존재자를 알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 [파르메니데스, 단편 B2]
여기서 말하는 자는 디케 여신입니다. 그런데 여신은 탐구의 두 가지 길을 말하는데, 하나는 있음의 길이라면 다른 길은 없음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 다른 길은 걸을 수 없는 길이라고 여신은 말합니다. 그 까닭은 없는 것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그냥 없는 것이니까요. 쉽게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다는 상태를 상정하는 것, 또는 절대적 무의 상태를 상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을 물을 수도 없어지겠지요. 왜냐하면 이 물음은 아무것도 없는 절대 무의 상태가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성립하는 물음인데, 그 전제 자체가 성립 불가능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절대 무의 개념을 “실행 불가능한 것”(οὐ γὰρ ἀνυστόν)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왜 무가 아니라 존재인가라는 물음 자체를 묻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파르메니데스 이후 허무의 위협으로부터 존재를 보호하는 영속적인 방패가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러한 이중의 분석으로부터 모든 것을 삭제한다는 의미에서의 절대무의 관념은 자기 파괴적인 관념, 거짓 관념, 단순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만약 한 사물을 제거하는 것이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라면, 사물의 부재가 다른 어떤 것의 현존에 대한 다소간 명확한 표상이라면, 그리고 삭제는 무엇보다도 대치를 의미한다면 ‘전체의 삭제’라는 관념은 사각형으로 된 원의 관념만큼이나 부조리하다. 그 부조리성이 눈에 띄지 않는 이유는 삭제할 수 없다고 가정되는 어떤 특수한 대상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으로 개개의 사물을 차례로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사람들은 그것들을 전부 한꺼번에 제거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사람들은 개개의 사물을 차례로 삭제하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들을 매번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전체의 제거라는 조작은 그 실행을 가능하게 한 조건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용어상의 모순을 함축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베르그손, 황수영 옮김, 『창조적 진화』420쪽 아래]
여기서 베르그손은 절대무라는 관념이 자기파괴적인 거짓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까닭은 전체의 삭제로서 절대무라는 개념은 네 각을 가진 원이라는 관념처럼 부조리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개별적인 사물을 머릿속에서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로부터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거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하나를 다른 하나로 대치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낱낱의 사물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전체를 제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것은 실행 불가능한 일이고 자기 모순적인 일이라는 것이 여기서 베르그손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 앞서 베르그손은 “철학자들은 무의 관념을 거의 다루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자기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특별히 새로운 견해를 제시한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무의 관념이 자기파괴적인 관념이고, 거짓된 관념이며, 부조리하다(absurde)는 말은 우리가 앞서 보았던 대로 파르메니데스가 고대 그리스어로 말한 것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먼저 절대무의 관념이 자기파괴적이라는 말은 자기모순적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 까닭은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인데, 절대무라는 관념을 없는 것을 마치 현실적으로 가능한 상태인 것처럼 상정하는 것이므로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모순율에 위배됩니다. 그러니 자기 모순적이고 자기 파괴적이며 부조리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자면, 베르그손의 견해는 파르메니데스의 견해를 프랑스어로 번역한 것이지만, 불충분하고 불완전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파르메니데스가 무의 불가능성을 말했을 때, 그것은 무를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아무것도 없다는 사태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생각함과 있음이 같은 것이다”라는 대원칙에 따라 파르메니데스는 무를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가 있다는 것의 불가능성과 같은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에 반해 베르그손은 똑같이 무의 불가능성을 말하더라도, 아무 것도 없는 절대무의 “관념” 또는 “이미지”가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절대무의 불가능성이란 우리가 절대무라는 것을 표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아무리 머릿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워나가더라도, 그리하여 온 세상을 관념적으로 삭제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을 삭제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앞의 인용문 끝에서 “전체의 제거라는 조작은 그 실행을 가능하게 한 조건 자체를 파괴하는 일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용어상의 모순을 함축한다”는 말은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관념 속에서 전체를 제거할 때, 그것은 한편에서는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을 제거하는 것이므로 무엇인가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있는 것을 제거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으므로 설령 다른 모든 것을 다 삭제한다 할지라도 삭제하고 있는 나 자신을 지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르그손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없앨 수 있겠는가? 어떻게 스스로를 제거할 수 있겠는가?”라고 [『창조적 진화』, 414쪽] 반문하는데, 절대적 무의 관념과 이미지가 문제라면 이 말은 너무도 지당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아무것도 없음의 가능성의 문제가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관념의 가능성의 문제일까요? 내가 모든 것을 지울 수 있어도 나는 지울 수 없다는 말은 맞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내가 관념 속에서 나를 지울 수 있느냐 없느냐’라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내가 살아서 생각하는 한에서 나는 나를 아무리 지우려 하더라도 그렇게 자기를 지우는 나는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말을 이미 데카르트가 했었는데, 신이라도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도록 나를 속일 수는 없다고 말했지요. 왜냐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존재한다고 믿도록 속임을 당하려면, 속는 내가 먼저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내가 절대무라는 것을 결코 표상할 수 없다는 베르그손의 말은 옳습니다.
하지만 없음의 문제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머릿속에서 아무리 모든 것을 다 지우더라도 지우고 있는 나 자신을 지우지는 못한다고 해서 무의 문제가 해소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지우지 못한다 해서 내가 영원히 사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애써 지우지 않아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당연히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나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무의 문제는 내가 나의 없음이라는 것을 표상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표상이 문제라면 나는 없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없음을 상상하는 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표상할 수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게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나는 생겨나기 전에는 없었고, 그냥 때가 되면 죽음과 함께 없어지게 될 하찮은 존재자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실제로 내가 없었던 때가 있었고, 앞으로도 내가 없어지게 될 것이라면, 이 세계 전체가 없었을 때가 있었고 앞으로 없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표상의 가능성이 문제라면 세계는 사라질 수 없습니다. 사라진 세계를 표상하는 나는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표상의 가능성이 아니라 현실적 소멸과 비존재의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존재하는 어떤 것도 소멸의 가능성으로부터 면제된 것은 없습니다. 다시 데카르트에게 기대어 말하자면, 내가 다음 순간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연성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능력도 내 속에는 없습니다. 이것이 어디 나만의 일이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어떤 것도 바로 다음 순간에 반드시 존재해야 할 필연성이나, 존재의 능력을 자기 속에 지니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것은 자기 존재의 원인을 자기 밖에서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도 자기가 자기 자신의 원인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원인과 근거에 대한 물음이 생기고 이로부터 과학도 철학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도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엄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물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마다 우리의 정신은 가위눌리고 마비됩니다. 그 가위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쳐온 역사가 형이상학의 역사입니다.
5. 플라톤과 아님으로서의 없음
그런데 이 역사에서 파르메니데스와 함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철학자가 바로 플라톤입니다. 앞서 소개한 대로 그는 무의 문제가 파르메니데스의 처방을 통해서는 온전히 해소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무의 관념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없음이라는 사태 자체를 부정했습니다. 지난 강의에 소개했듯이 그는 존재는 “전체요, 하나이며, 총괄된 것으로서 지금 동시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단편 B6] 이 말은 존재 속에 무가 어떤 식으로도 섞여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현실에 반하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나도 여러분도 없다가 생겨났고, 있다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전 강의에서 말했듯이 모든 있음은 ‘없음 속에 있음’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하늘의 태양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처럼 가망 없는 일입니다.
플라톤이 무의 문제를 새롭게 고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도 파르메니데스의 대원칙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즉 절대적인 의미에서 아무것도 없는 그런 의미의 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즉, 존재의 영원성, 또는 세계의 영원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이 세계는 그 자체로서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스인들이 공유했던 믿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아무것도 없는 절대무라는 것은 파르메니데스뿐만 아니라 플라톤에게도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내에서 끊임없이 없던 것이 생겨나고 있던 것이 소멸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없음의 문제는 말소되지 않고 엄연히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없음이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인 한에서 우리는 존재하는 것 전체를 향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 속에서 정신은 다시 가위눌리겠지요. 이 치명적인 형이상학적 질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서의 없음과 비존재가 도대체 무엇인지를 물어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 물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소피스테스』의 후반부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없음이라고 생각하는 비존재는 실제로는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엘레아의 손님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있지 않은 것을 말할 때, 우리는 있는 것과 대립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다른 것을 말하는 것 같네.” [『소피스테스』, 257b]
없는 것 또는 비-존재는 영어로 non-being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요. 플라톤이 『소피스테스』에서 비존재를 표현할 때도 같은 영어와 방식으로 ‘메 온’(μὴ ὄ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영어의 being이든 그리스어의 온(ὄν)이든, 서양 언어에서 존재동사(영어식으로는 be 동사)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있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이다’는 뜻입니다. 이건 여러분이 영어를 조금이라도 배웠다면, 모두 잘 아는 일이지요. 그리스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플라톤은 위의 인용문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비-존재가 있는 것의 반대인 없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어떤 있는 것과 다른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은 사실은 다른 것이지 정말로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건 복잡하게 말할 것 없이, 근대 물리학에서 말하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그 법칙에 따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소멸하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만 다른 것이 될 뿐입니다. 플라톤이 없는 것이란 다른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근대적 질량 보존의 법칙의 원조라고 하겠습니다. 플라톤이 말했던 형이상학적 존재 보존의 원칙을 뉴턴은 물리적 의미의 질량 보존의 법칙으로 바꾼 것입니다.
요컨대 플라톤은 비-존재의 의미를 ‘없다’는 것이 아니고, ‘아니다’는 것으로 바꾸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비-존재는 있다에 반대되는 사태가 아니고, 이다에 반대되는 사태라는 것입니다. 개별적 사물의 입장에서 보자면 세상에 많은 것이 생겼다가 실제로 없어집니다. 그러나 같은 사실을 전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은 다른 것으로 모습이 변하는 것일 뿐, 절대적 의미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가 각 부분에서는 끊임없이 없던 것이 생겨나고 있던 것이 없어지지만, 전체로서는 존재의 총량이 늘지도 줄지도 않고 언제나 한결같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공연히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 물을 필요도 없겠지요. 왜냐하면 부분이 생겨나고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달라지는 것이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없음이 있음으로 바뀌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상태는 비현실적인 가정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아무것도 없음’의 위협으로부터 존재를 구해냈습니다.
이것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꽤 그럴듯한 처방이었다는 것은 앞서 인용한 베르그손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플라톤을 입에 올리지는 않지만, 그가 없음을 부정하는 방법은 한편에서는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배운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플라톤에게서 배운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대상 A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대상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사람들은 거기에 이 특수한 대상의 배제라는 관념을 현실적 실재 일반을 가지고 덧붙인다. 존재하지 않는 대상 A를 생각하는 것은 우선은 그 대상을 생각하는 것이다. 즉 그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 나서 그것과 양립할 수 없는 다른 실재가 그것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조적 진화』, 423쪽 아래]
여기서 베르그손은 어떤 개별적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찰하고 있습니다. 대상 A를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A라는 대상에 “이 특수한 대상의 배제라는 관념을 현실적 실재 일반을 가지고 덧붙인다”는 것을 뜻한답니다. 이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은데, 좀더 읽어내려가면 “한 대상을 실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행위는 실재 일반이라는 존재를 가정한다”는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창조적 진화』, 424쪽] 그러니까 어떤 것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부정되어야 할 것과 부정하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실재 일반이란 결코 말소될 수 없는 존재 일반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 존재의 절대적 부정이란 불가능한 거지요. 여기까지는 파르메니데스적입니다. 그런데 앞의 인용문 끝에서 베르그손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 A를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인 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것과 양립할 수 없는 다른 실재가 그것을 대신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A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하던 A가 절대적 의미에서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고, A가 있던 자리에 다른 실재가 대신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건 앞서 소개한 대로, 비존재가 없음이 아니고 아님이고 다름일 뿐이라는 플라톤의 반복입니다.
갑자기 20세기 영국의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가 2천 년 서양 철학은 결국 플라톤의 각주였다고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딴에는 남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무의 문제를 자기가 고찰한다고 허세를 부렸던 베르그손의 이런저런 주장들도, 사실은 그저 플라톤이 다 해 놓은 말을 프랑스어로 예쁘게 꾸며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화이트헤드의 말이 그리 과도한 농담은 아니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래도 무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사유가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의 사유 경계를 넘어 새롭게 확장되기도 했던 것일까요?
6. 신의 존재의 필연성
이 문제에 관해 서양 철학의 역사에서 한 가지 중요한 변화는 그리스도교의 성립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해서 그리스 철학자들 대부분이 세계의 존재가 영원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습니다. 이것 역시 파르메니데스의 통찰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는 만약 이 세계가 없었다가 존재했다면, 이 세계를 존재하도록 한 원인이 된 것이 먼저 존재하고 있었어야 할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존재는 영원하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존재가 영원하다는 것은 결국 세계가 어떻게 변하든지 간에 이 세계의 존재 자체는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그리스 철학자들은 세계의 존재 원인을 세계 외부에서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은 당연히 우리가 눈으로 보는 자연으로부터 초월적인 곳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런 초월적 원인에 의해 세계가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약간 비슷한 생각을 찾자면,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데미우르고스라는 신이 이 세계를 건축했다고 말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데미우르고스(Demiurgos)는 말 그대로 목수여서 아무것도 없는 무로부터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고, 모든 목수가 그렇게 하듯이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질서 있는 우주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계를 이룬 재료는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고 영원 전부터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에게서는 이데아도, 데미우르고스 신도, 전체 존재의 한 부분으로서 세계와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인들은 세계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있었던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계의 영원성은 그리스도교가 등장하면서 당연하고 자명한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이 세계가 신에 의해 무에서 창조되었다고 믿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증명의 문제가 아니고 그냥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세계가 창조에 의해 존재하기 시작했다는 것만이 아니라 역사의 끝이 있다고 믿는 점에서도, 그리스인들이 생각했던 세계의 영원성을 부정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중에 역사를 고찰하면서 다룰 수 있을 것이므로 여기서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지금 우리의 주제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이므로,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세계의 영원성을 부정한 것이 이 문제와 어떤 상관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세계가 영원하다는 것은 존재가 영원하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다시 말해, 세계는 그 자체로서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세계의 존재 그 자체에 관해서는 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겠지요. 세계는, 신이 있든 없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신은 자기의 간섭 없이도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세계 속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신은 인간이나 다른 존재들보다는 훨씬 더 강하고 완전한 존재이기는 하겠지만, 세계 전체 속에서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자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종류의 신이 절대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신이 절대자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형이상학이 추구하는 존재 전체의 최종적 근거일까요? 그리스인들이 세계의 영원성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역시 신이 만물의 최종적 근거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계는 모든 존재자들 전체에 대한 이름일 뿐, 세계 속에서 만물을 하나의 질서 있는 전체로 만들어주는 원리나 근거를 다시 세계 전체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세계 전체에 대한 근거, 즉 ‘아르케’(arche)가 무엇이냐는 물음은 철학의 출발에서부터 제기된 물음이었고, 그 물음에 대해 탈레스는 그것이 물이라고 대답했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대답했으며, 피타고라스는 만물이 수(數)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되겠지만,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신이 그런 최종적 근거로 고양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 역시 세계를 창조한 신은 아니었고, 세계는 신과 함께 영원전부터 스스로 존재하는 전체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계가 신을 낳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런 한에서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세계에서 세계와 신은 두 개의 동등한 절대자로서 동거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절대자가 둘이라는 것은 형용 모순 같은 것이어서 그리스 정신은 절대자의 이런 분열에 대해 내적으로는 불만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불만족이 스토아 철학자들로 하여금 세계와 신과 운명적 법칙을 모두 하나로 귀일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자연과 신과 로고스와 운명이 모두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상을 떠날 무렵 태어나 기원전 3세기에 활동했던 초창기 스토아 철학자 클레안테스(BC. 330-230)는 제우스 신을 위한 송가를 써서 이 신을 그런 절대자로 격상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제우스 신이라면 크로노스 신의 아들이고 헤라의 남편이었으며, 여신과 여인, 처녀와 유부녀를 가리지 않고 사랑을 나누었던 바람둥이 아니었던가요? 아무리 신을 절대화시킬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그런 신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민망한 일임에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고 믿고 있었던 신들은 제우스만이 아니라 다른 신들도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유한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그런 신들 가운데 어떤 특정한 신을 절대화시키는 것은 사실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팔레스타인 땅에서 예수가 세상에 태어날 무렵, 아테네에서 철학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판단 중지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철학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알지 못했던 전혀 새로운 신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은 세계를 창조했고, 세상을 죄에서 구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냈으며, 때가 되면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돌아올 절대자였습니다. 생각하면 이것이야말로 그리스 철학자들이 찾고 있었으나, 자기들의 신화적 전승 속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그런 절대자가 아니겠습니까? 처음의 낯설음이 세월과 함께 서서히 엷어지면서, 사도 바울이 전파하기 시작했던 새로운 신을 그리스 철학자들이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서양에서 새로운 정신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우리의 물음과 무슨 상관일까요?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교는 세계의 영원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교는 세계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가 왜 없지 않고 있느냐고 물음에 대해 그리스도교는 더는 이 세계가 영원 전부터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건 물을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불가능한 사태이므로, 무엇인가 존재할 수밖에 없으니, 세계가 언제나 그렇게 존재한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교는 이 세계는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므로 존재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되면 세계의 존재근거에 대한 물음은 더 물을 필요가 없어지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이 해결되는 것일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존재 근거가 신이라면, 세계가 왜 없지 않고 있게 되었는지, 그 물음은 해소되겠지만, 이번에는 그렇다면 신은 왜 없지 않고 있느냐는 물음이 새롭게 제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033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말년에는 영국의 켄터베리 대주교를 지냈던 안셀무스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그 증명을 『프로슬로기온』이라는 책에서 읽을 수 있는데,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이라는 제목은 ‘마주 보고 하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신 앞에서 경건하게 신앙을 고백한다는 의미에서 붙은 제목이겠지요. 그 증명은 먼저 신의 개념을 정의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우리는 당신께서, 우리가 그보다 더 큰 것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어떤 것임을 믿습니다.” [안셀무스, 박승찬 옮김, 『프로슬로기온』, 아카넷, 184쪽]
그의 신 존재 증명은 여기서 제시된 신의 개념으로부터 신의 존재의 필연성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삼각형의 개념으로부터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신의 개념으로부터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의 존재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자라면 그가 왜 없지 않고 있느냐고 물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삼각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그것의 내각의 합이 왜 180도인지 묻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삼각형의 개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하필이면 170도도 아니고 190도도 아니라 180도인지 묻겠지만, 삼각형의 개념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그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인 것을 인식할 것이므로 그런 물음을 물을 수도 없고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안셀무스도 신의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그 개념 속에 신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음을 보이려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의 개념이 어떤 것이기에 그 개념 속에 그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요? 안셀무스에 따르면 신은 “우리가 그보다 더 큰 것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어떤 것”입니다. 여기서 크다거나 작다는 말은 단지 공간적인 크기를 뜻하는 말이 아니고, 존재의 질적 완전성을 뜻하는 말입니다. 신이 없는 곳이 없는 존재자라면, 공간적인 의미에서도 가장 큰 존재자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질적인 의미에서도 그보다 더 완전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안셀무스의 신 개념입니다.
이 개념이 그냥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자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소급해 갈 수 있는 신 개념인데, 그는 지금은 사라진 『철학에 관하여』라는 대화편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 완전성에서 차이가 있는 존재자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가장 완전한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그 증명 근거로서 제시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동어반복처럼 지당한 말로 들립니다. 그 양과 질에서 차이가 있는 것들이 여럿 있다면 그것들 사이에 반드시 가장 완전한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들 사이에서는 그 정도가 가장 뛰어난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일 테니 이건 동어반복처럼 지당한 말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바로 그렇게 가장 완전한 존재가 신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안셀무스는 같은 것을 가장 큰 것이라고 표현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과는 달랐지만, 생각한 것은 같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신의 개념을 정의한 뒤에 안셀무스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가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단지 지성 속에서만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이 생각될 수 있고 이것은 [지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 단지 지성 속에서만 존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는 것에 대해,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아무 의심 없이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은 우리의 지성 속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존재합니다.” [『프로슬로기온』, 186쪽 아래]
우리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자는 적어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우리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고 우리의 생각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경우 그런 존재자는 우리의 머릿속에서 존재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존재하는 가장 큰 것보다는 작은 존재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더는 우리가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존재자는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각 속에서만이 아니라 생각 외부에서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생각함으로써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자라는 원래의 정의에 어긋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는 존재자는 한갓 우리의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럴듯한가요? 중세 그리스도 교회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라고 칭송받을 만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증명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불완전한 인간은 신에 대한 온전한 개념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보여준 모범을 따라, 이 세계의 우연성으로부터 신의 존재의 필연성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아무것도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으므로, 세계의 존재에도 원인이 있어야 할 터인데, 세계가 자기 자신의 원인일 수도 없고, 또 세계의 존재 원인이 시초가 없이 무한히 거슬러 올라갈 수도 없을 것이므로, 어디선가 최종적인 근거가 있어야 할 터인데, 어떤 것이 그렇게 최종적인 근거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는 세계의 원인이고 근거이지만,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것도 근거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이 마지막 근거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마지막 근거를 우리는 신이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세계의 최종 근거로서의 신은 자기 밖에서 다른 존재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자기 자신의 존재 원인으로서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는 이런 증명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증명은 세계의 우연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식의 신 존재 증명을 칸트는 우주론적 증명이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우주의 존재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주의 존재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우주라는 우연적인 존재로부터 신 존재의 필연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계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그 존재의 우연성 때문에 우리는 세계를 존재하게 한 근거가 되는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고 요청할 수는 있겠지만, 이 요청이 그 존재의 필연성을 증명해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연성으로부터 필연성을 추론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존재로부터 신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은 자식의 존재로부터 부모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처럼 자연스런 일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의 문맥에서는 쓸모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이 왜 없지 않고 있느냐는 물음에 대해 부모가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부모는 왜 없지 않고 있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는데, 이런 물음과 대답과 새로운 물음의 연쇄를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 모든 것이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말한다고 해서 물음이 끝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럼 신은 왜 없지 않고 있느냐고 또 물을 테니까요.
세계가 있으니까 신도 있어야 한다고 대답하는 것은 자식이 있으니까 부모도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지당한 말이기는 하지만 그 지당한 말이 신은 왜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아닙니다. 부모 때문에 자식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인과성이 부모와 자식의 존재를 허무의 가능성으로부터 면제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이 한꺼번에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신이라도 이런 사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과 세계가 한꺼번에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우주론적 증명이란 세계가 왜 있느냐고 물으면 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고, 신이 왜 있느냐고 물으면 세계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순환논증이지요. 효력이 없습니다. 세계도 신도 허무 앞에서 무기력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칸트는 안셀무스처럼 신의 개념으로부터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을 존재론적 증명이라고 불렀는데, 우주론적 증명은 결국 존재론적 증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세계의 존재에 의존하지 않고 신의 존재를 그 자체로서 증명하기 위해서는 결국 신이 무엇인지 그 개념으로부터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주론적 증명은 겉으로는 안 그런 것 같아도 실제로는 존재론적 증명을 숨기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칸트가 존재론적 증명의 효력을 인정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토마스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 증명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이 유한하기 때문에 신에 대한 참된 개념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고, 보다 근본적인 이유에서 이 증명의 효력을 부정했는데, 그는 어떤 경우에도 존재가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기 때문에, 신의 개념이 무엇이든 그와 무관하게, 우리가 신의 개념으로부터 신의 존재 그 자체를 추론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한 개념으로부터 다른 개념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삼각형의 개념으로부터 세 개의 각이라는 개념을 추론할 수 있지요. 삼각형이 세 직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이니까 세 개의 각을 가질 수밖에 없겠지요. 사각형이 네 개의 직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이라면, 그것은 네 개의 각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칸트는 어떤 것의 존재 그 자체를 이런 식으로 추론할 수는 없다고 보았습니다. 개념은 어떤 사물의 의미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관념입니다. 물론 이 관념이 꼭 사람의 생각 속에만 있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원의 개념이나 1이라는 수의 개념이 꼭 사람이 생각해야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원이라는 도형이 지니고 있는 모든 기하학적인 성질은 사람이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원이라는 도형의 영원한 본질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개념도 그럴 수 있지요. 분명히 우리가 주관적으로 생각하든 말든 객관적으로 타당한 개념들이 많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바로 그런 개념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칸트 역시 그런 것을 모를 만큼 교양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현실적으로 의미 있는 객관적 개념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념은 개념이지 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원의 개념을 아무리 세세하게 분석한다 하더라도 우주 내에 원이라는 도형이 현실적으로 있느냐 없느냐는 그 개념이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배고픈 노숙자가 한 끼 식사를 위해 만원이라는 돈의 개념을 아무리 열심히 생각하고 분석한다 하더라도, 그런 개념의 분석으로부터 그의 지갑에 만원이 생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개념적 의미가 문제라면 만원이라는 개념과 현실의 만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현실의 만원과 만원의 개념 사이에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 개념은 틀린 개념일 것입니다. 개념이 참된 개념이라면 개념은 그 개념이 지시하는 대상과 완벽히 일치해야 합니다. 그 일치 속에 개념의 진리도 존립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참된 개념이라고 할지라도, 개념이 사물에 관해 담아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사물의 있음 그 자체입니다. 이런 사정을 가리켜 칸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있음은 분명히, 어떤 실재적 술어가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한 사물의 개념에 보태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을 표시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물의 정립, 또는 사물의 어떤 규정들 자체의 정립일 뿐이다.” [『순수이성비판』 B626]
이처럼 있다는 사실이 술어도 아니고 개념도 아니며, 개념의 내용이나 술어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어떤 사물의 규정들이 실제로 정립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개념으로부터 그 개념이 표시하는 사물의 존재로 있음으로 건너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배고픈 사람이 아무리 음식의 개념을 분석하더라도 그가 한 그릇의 밥을 개념으로부터 얻어낼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신의 경우라 해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자를 최고 실재로서 (아무런 모자람도 없이) 생각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여전히 물음으로 남아 있다.” [『순수이성비판』, B628]
만약 개념이 참된 개념이라면, 개념과 그 개념이 지시하는 대상은 정확하게 일치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개념과 대상은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념이 대상의 있음은 아닙니다. 이것은 집의 설계도를 아무리 정확하게 그린다 하더라도 그 설계도가 실제로 들어가 살 수 있는 집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념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가능성일 뿐입니다. 신의 개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무리 신의 개념을 정확하게 규정한다 하더라도 신이 존재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는 개념의 정확성과 별개로 여전히 남는 물음입니다.
이처럼 칸트는 존재론적 증명과 우주론적 증명의 효력을 모두 부정함으로써 전통적 신학의 철저한 파괴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하나의 견해에 다른 견해가 대립하는 것은 철학의 역사에서 언제나 있는 일로서, 칸트가 철저하게 기존의 신존재증명을 비판했지만 헤겔은 다시 칸트를 비판하면서 존재론적 증명과 우주론적 증명을 모두 복권시켰습니다. 헤겔은 칸트가 존재는 개념이 아니라고 말한 것에 대해, 그 원칙은 유한한 사물에나 타당한 원칙이지, 무한한 존재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헤겔을 따라 20세기 개신교 신학자 카를 바르트 역시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안셀무스의 신학적 체계와 연관한 신 존재 증명』이라는 책에서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증명의 의미를 되살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논쟁에 더는 들어가지 않으려 합니다. 중세 이후 서양의 철학자들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던 까닭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겠다는 의도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호교론적인 의도가 아니라, 신의 존재의 필연성을 통해 아무것도 없음이라는 절대무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제거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 가지 증명들 가운데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일 것입니다.
7. 동아시아적 사유로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이 왜 형이상학의 시원에서부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 서양의 철학자들이 어떻게 대답해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대답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는데, 하나는 파르메니데스처럼 없음 그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물음을 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플라톤처럼 없음을 아님으로, 없는 것을 다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물음을 피하는 것이며,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처럼 신이라는 어떤 특정한 존재자의 존재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절대무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의 문제에 관해 강의를 끝내기 전에 한 가지 언급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동아시아 철학의 전통에서도 이 문제는 낯선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가끔 우리는 서양 철학은 무(無)를 사유하지 않고 오직 존재에만 몰입했는데, 동아시아적 사상에서는 유(有)와 무를 넘나드는 사유를 했다면서 서양 철학이 동아시아 철학에 비해 편협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은 주로 일본 쪽에서 나오는 책을 읽다 보면 마주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서양의 문화는 유(有)의 문화인 것에 대하여 동양의 문화는 무(無)의 문화라고 말해지고 있다.”거나 [코사카 쿠니쯔구, 심적 옮김, 『절대무의 견성철학-니시다 기타로의 사상』, 56쪽] “이 동양적인 의미의 無에 대해서 그리스인은 알지 못했다”[같은 책59쪽] 같은 말이 그런 것이라 하겠습니다.
일본의 이른바 교토학파 철학자 니시다 기타로(西田畿多郞, 1870-1945)는 그런 ‘동양적 무’를 ‘절대무’(絶對無)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장소적 논리와 종교적 세계관』에서 세계를 “절대무의 자기한정”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절대무가 정말로 無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아무것도 없는 것일텐데, 그런 절대무를 가리켜 자기를 한정한다는 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구라도 물을 수밖에 없는 이런 물음에 대해 니시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왜 절대무가 자기 자신을 한정하는가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절대무란 단순히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노에시스적 한정의 극치를 말하는 것이다. 마음(心)의 본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무이면서 동시에 절대로 유인 것이다.” [허우성, 근대 일본의 두 얼굴 니시다 철학』, 문학과 지성사, 275쪽]
여기서 니시다는 절대무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본체를 의미한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본체란 다른 말로 하면 절대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절대자가 절대적 무이면서 절대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니시다는, 만약 절대자가 “자기 외부에 자기를 부정하는 것, 자기에 대립하는 것이 있는 한, 자기는 절대자가 아니라”면서, “절대자는 자기 속에서 절대적 자기부정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 속에서 절대적 자기부정을 포함한다는 것은 “자기가 절대적 無가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하면서, 이처럼 자기가 자기 자신에 대립하는 상황을 가리켜, “無가 無 자신에게 대립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西田幾多郎哲学論集 III, 岩波書店, 327]
하지만 이런 절대무는 파르메니데스 이래 서양의 철학자들이 직면했던 그런 의미의 절대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니시다가 말하는 無는 절대적 의미의 ‘아무것도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유를 감싸안아 모든 유를 만들어 내는 근원”이기 [코사카 쿠니쯔구, 『절대무의 견성철학』 63쪽] 때문입니다. 이런 절대무는 “상대적인 유·무에 대하여, 그것들의 근저에서 양자를 감싸 안아, 양자를 생겨나게 하는 절대적인 실재”입니다. [같은 책, 164쪽] 그러니까 이런 것을 두고 무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말장난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절대적인 존재를 절대적인 무와 동일시하는 것은 니시다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존재가 무와 같다는 생각은 서양에서도 헤겔이 『논리학』에서 “순수한 존재는 순수한 무와 동일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헤겔, 임석진 옮김, 『논리학 I』, 76쪽] 헤겔은 있다는 뜻으로든 이다는 뜻으로든 존재가 그 자체로서 아무런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은 한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 즉 無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무 역시 “순수 존재와 다른 바 없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같은 곳] 우리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있다’는 사태는 언제나 ‘어떤 것이 있다’는 것으로 나타날 때만 구체적인 내용을 지닐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있다’는 것만 분리시켜 놓고 보자면, 그것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공허한 사유에 지나지 않겠지요. 그래서 그런 있음을 가리켜 헤겔은 무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존재와 무를 동일시하는 것이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주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존재와 무를 뒤섞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저 유명한 구절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 구절 역시 있음과 없음이 상통한다는 뜻이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무턱대고 있음이 그 자체로서 없음이라거나 없음이 그 자체로서 있음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식 불교에서는 무를 미생무(未生無), 이멸무(已滅無), 상호무(相互無), 필경무(畢竟無)로 나누는데, 미생무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여서 없다는 것이고, 이멸무는 이미 사라진 과거라서 없다는 것이며, 상호무는 서로 다른 것들이 서로에 대해 없다는 뜻이고, 필경무는 어떤 경우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절대무라고 합니다. 이 모든 무의 개념은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와 플라톤과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보았던 것으로서, 우리는 불교 역시 엄밀한 논리적 사유에 따라 무의 개념을 분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앞의 세 가지 무는 상대적인 무이므로 굳이 문제 삼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마지막의 절대적인 무인 필경무일 터인데, 이것을 유식 불교에서는 그런 절대무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의 유라고 긍정하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의식의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소산으로서 일종의 미망이라고 부정하기도 합니다. [김준우, 「유식학파의 공성이해」, 『불교학보』 제87집, 38쪽 아래] 어떤 식으로 설명하든, 우리는 그것이 막연한 신비주의가 아니라 엄정한 논리 위에서 무의 개념을 분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가 무와 유의 상통을 말할 때, 그것을 논리적 동일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배척하거나, 또는 정반대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심오한 신비라고 숭배하기보다는, 불교가 무의 개념을 어떻게 분석하고 그로부터 어떤 결론을 제시하는지를 차분하게 경청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8. 허무와 자유
무의 문제는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형이상학의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므로, 저는 다른 주제보다 이 주제에 대해 훨씬 더 길게 말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리도 긴 강의를 통해 우리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가?’라는 처음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은 것입니까? 아니 대답이 문제가 아니라 이 막막한 물음 앞에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지혜로워지기는 한 것일까요? 정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여러분에게 이 문제에 관한 다양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열심히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가 다 어떻게 해서 있게 되었는지’, ‘왜 아무것도 없지 않고 무엇인가 있는지?’, 그 막막한 물음이 엄습해 올 때마다 어쩔 줄 몰라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저의 사촌 동생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어둠 속에 내던져진 기분입니다. 그래서 소월의 시, 「부모」에서 어린 화자는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라고 물은 뒤에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랴?”라고 말했던 것일까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와 마주한다는 것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의 의미는 오직 그것이 없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모든 것은 다름 속에서 그것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다른 것과의 다름이 아니고서는 어떤 것도 자기를 그것 자신으로서 드러낼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차이와 구별이 있음으로써 다른 것이 아닌 그것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있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 있음 그 자체는 어떻게 알려지는 것입니까? 있음이 있음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있음이 있지 않음, 곧 없음과의 차이와 구별을 통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없음은 있음을 있음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배경이 되는 타자입니다. 우리는 오직 없음을 이해하는 한에서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있음과 없음은 헤겔이나 니시다가 말했던 것처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이 공속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하여 다시 우리는 모든 있음이 ‘없음 속에 있음’이라는 지난 강의의 주제로 돌아오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형이상학이 얼마나 먼 길을 헤매고 다니든지 간에, 그것은 결국 없음 속에 있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예감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있음의 의미와 진리를 물을 때, 우리는 언제나 없음이라는 거울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하여 있음의 의미를 물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없음의 의미도 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없음을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든 불가능한 일이든지 간에, 없음을 생각하는 것은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불편한 일이듯이,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음을 생각할 때, 삶에 대해 진지해지듯이, 없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있음에 대해 진지해지게 됩니다.
진지함이란 물음에 존립합니다. 물음은 근거에 대한 물음입니다. 없음은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이 왜 있는지 질문하게 합니다. 그러나 없음은 없음인 까닭에 우리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습니다. 대답 없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가위눌립니다. 그리고 허무에 빠집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뒤집어 보면, 그 허무가 또한 자유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왜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 내가 그 물음의 답을 원한다면, 오직 내가 그 답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계가 왜 없지 않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세계 속에 내가 왜 없지 않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객관적인 대답은 없습니다. 세상은 아무 까닭도 없이 있고, 그 속에 나도 아무 까닭 없이 던져져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세상도 나도 객관적으로는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가 있는 이유와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묻습니다. 없음이 우리를 그 물음으로 떠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대답 없는 물음이라 하여 물음을 멈춘다면, 우리는 뜻 없는 삶을 뜻 없이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대답 없는 물음이라 해서 물음을 멈추지 않고, 뜻 없는 존재와 삶에 스스로 뜻을 부여한다면, 우리는 자유인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형이상학은 근거 없는 존재에 대해 근거를 묻고 뜻 없는 삶의 뜻을 물음으로써, 우리를 그런 자유인의 삶으로 인도해주는 길입니다.ㅇㅇ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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