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강의 ②]
1. ‘왜?’라고 묻는 용기에 대하여
지난 시간에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경험과 인식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차이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경험은 사실이 그러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지만, 인식은 그 사실이 왜 그러한지 원인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앎이라도 나타난 사실에 대한 앎이 경험이라면, 원인을 아는 것이 인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인식을 ‘에피스테메’(episteme)라고 불렀는데, 영어권 학자들은 대개 그것을 ‘knowledge’라고 번역합니다. 그리고 그런 인식 또는 지식의 체계를 오늘날 우리는 과학science이라고 부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에피스테메’라는 말이 각각의 인식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런 인식의 체계인 과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별적 인식이든 체계로서의 과학이든, ‘에피스테메’가 원인을 아는 앎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과학의 시대입니다. 대학에서도 철학은 이제 존재 이유가 없는 학문처럼 푸대접받습니다. 과학은 기술과 직결되어 있고, 기술은 산업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산업은 돈을 벌어 오지요. 그리고 대학도 돈을 좋아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부자 되게 하리라!’ 이것이 오늘날 모든 대학의 대문에 붙어 있는 구호입니다.
학문적 진리는 인식에 존립합니다. 그리고 인식은 원인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인을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습니까? 너무 쉬운 질문이지요? 당연히 ‘왜?’라고 물어야만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질문을 포기하지 않으면 어떤 식으로든 대답을 찾게 됩니다. 그러니까 ‘왜?’라는 물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물음에 대한 대답 즉 원인에 대한 인식을 사람은 언젠가는 찾게 됩니다. 그러니까 만약 여러분이 진리를 알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매사에 ‘왜?’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사실, 사람들은 ‘왜?’라고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라고 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린아이가 태어나 제일 먼저 묻는 것이 ‘이게 뭐야?’이고 그 다음에 묻는 것이 ‘왜 그래?’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린아이도 묻는 물음을 묻는 것이 어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되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평생 어린이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만 사는 존재가 아니고 사회 속에서 사는 존재입니다.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권력 관계에 의해 유지됩니다. 그런데 권력 관계 속에서 상급자에게 ‘왜?’라고 묻는 것은 언제나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권력이 절대적이면 절대적일수록 그 앞에서 ‘왜?’라고 묻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요. 노예가 주인에게 ‘왜?’라고 물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까지 합니다. 그리하여 노예적 예속이 일상적 풍토가 된 사회에서는 ‘왜?’라는 물음은 억압됩니다. 묻지 말고 시키는 대로 일하는 것, 이것만이 노예에게 요구되는 미덕이지요.
현대인들은 자신이 노예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간자율학습에 매여 있는 학생이 과연 어떤 의미에서 자유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사회에 나가서는 굶어 죽을 자유와 예속된 노동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인간이 과연 어떤 의미에서 노예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온갖 노예계약에 묶여 준법 노동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태에서 산업재해의 위험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노동해야 하는 노동자가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임금 노예보다 특별히 더 나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하물며 JMS교주와의 동침을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이라고 믿고 따르는 정신적 노예 상태까지, 도처에서 인간은 껍데기만 자유로운 시민일 뿐, 실상은 노예 상태에 매여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왜?’라고 묻는 활달한 정신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회적 예속이 일상화되면, 정신적 예속이 되고, 그렇게 정신이 노예적 예속 상태에 있을 때, ‘왜?’라는 물음은 낯선 것이 됩니다. 그저 믿고 따르면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그것이 전부인 사회에서는 물음도 필요 없고 생각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기계보다 못한 당나귀가 되는 거지요.
이런 정신적 예속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용기입니다. 이 점에 관해 어눌한 저의 백 마디 말보다 임마누엘 칸트의 한 마디가 나을 것입니다. 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계몽이란 인간이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규정한 뒤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무능력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미성년 상태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 때문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지도를 받지 않고서 지성을 사용할 결단력과 용기의 결핍 때문이라면 미성년 상태는 스스로의 잘못으로 초래한 것이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자기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슬로건이다.” [칸트, 임홍배 옮김, 『계몽이란 무엇인가』, 28쪽]
여기서 칸트가 앎을 위해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은, 지배적인 권력이나 권위 앞에서 ‘왜?’라고 원인을 묻는 것이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질문하는 용기 없이 원인을 알 수 없고 원인을 알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진정한 이해도 인식도 없이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르는 노예적 삶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정말로 그런 정신적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기 원한다면, 여러분도 누구 앞에서든 ‘왜?’라고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설령 여러분 앞에 있는 존재가 신이라 할지라도, 여러분은 주눅 들지 말고 그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 앞에서 인간이 ‘왜?’라고 묻는 것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내가 신이다’라고 군림하는 인간들이 너무도 많고, 스스로 그런 인간에 굴종해서 사는 사람들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왜?’라고 묻기 위해, 참된 인식을 얻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에서만 과학이 태동한 이유
이런 사정을 생각하면, 우리는 왜 그리스에서 과학이 태동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서양에서 또는 그리스에서 과학이 탄생했다고 말하면 가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습니다. 조지프 니덤(Josepf Needham)이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중국의 과학을 상세하게 연구 소개한 뒤에 다음과 같은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고대와 중세의 유럽이 그러했던 것처럼 중국, 한국, 인도 및 아랍 제국 모두가 과학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이 모든 국가나 문화권이 과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조지프 니덤, 『조선의 서운관』, 18쪽]
한국인으로서 이런 말을 들으면 기분은 좋습니다. 그러나 저는 니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약 천문학이 단지 천체를 관측하는 것이라면, 그 관측 자료에 따라 달력을 만들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물시계나 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기구를 발명하는 기술을 의미한다면, 신라의 첨성대에서부터 조선의 서운관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들도 서양 못지 않은 천문학적 지식을 축적했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인정하더라도 저는 과학으로서의 천문학은 오직 그리스에서 탄생했다는 저의 견해를 철회할 의사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인들만이 천체현상을 단지 관측하는 데서 머물지 않고 원인을 물었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를 거쳐 뉴턴에 이르기까지 서양의 천문학을 이끌어 왔던 가장 중요한 물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것은 행성이 왜 역행운동을 하느냐는 물음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행성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다가 왜 다시 서쪽으로 갔다가 동쪽으로 움직이는지 그 원인을 물은 것이 서양 천문학의 시작입니다.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을 줄 압니다만 하늘의 별은 매일 동쪽에서 서쪽으로 원을 그리면서 움직입니다. 눈으로 보면 별들은 모두 공처럼 둥근 하늘에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고 별들을 붙이고 있는 천구, 말 그대로 하늘의 공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별들 가운데 다른 별들처럼 규칙적으로 원을 그리면서 움직이지 않는 별들이 있습니다. 그게 행성입니다. 영어로 행성을 플래닛(planet)이라 부르는데, 이 낱말은 원래 그리스어, ‘플라네테스’인데, 방황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행성이 하늘을 방황하는 별이라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물론 행성들 역시 매일 지구 주위를 다른 별과 함께 원을 그리면서 돕니다. 계절에 따라 별자리가 달라지는 것처럼 위치가 달라지는 것도 다른 별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여름 남쪽 하늘에 보이던 전갈자리는 겨울엔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오리온 자리가 보이지요. 그러나 전갈자리와 오리온자리는 언제나 같은 계절 같은 위치에 나타나고 사라집니다.
하지만 화성이나 목성 같은 행성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4월에 밤 12시에 화성을 서쪽 지평선 위에서 보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런데 5월에는 같은 시간에 조금 동쪽으로 나아간 곳에서 화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6월이면 조금더 동쪽으로 그리고 조금 더 높은 고도에서 같은 자정 시간에 화성을 보게 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이던 화성이 7월이 되면 갑자기 다시 서쪽으로 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8월에는 마치 왔던 곳으로 돌아가듯이 더 서쪽으로 간 곳에서 같은 자정 시간에 화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9월이 되면 우리는 같은 시간에 화성이 다시 동쪽으로 옮겨가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행성의 갈짓자걸음을 행성의 역행운동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현상은 비슷한 시기에 그리스인들도 관측했고 중국인들도 똑같이 관측했습니다. 아마 지구상의 다른 곳에 살던 사람들도 비슷하게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행성이 항성과 달리 밝기가 달라지고 궤도가 원을 그리지 않고 역행운동 한다는 것은 조금만 세심하게 하늘을 관찰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지각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행성이 다른 별들과 달리 역행운동을 하는지 그 원인을 물은 것은 그리스인들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은 그 현상을 단지 해석하려 했을 뿐입니다. [이문규, 『고대 중국인이 바라본 하늘의 세계』, 95쪽 아래] 여기서 해석이란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를 물었다는 뜻입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하늘이 신적 존재로 여겨진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행성의 역행운동처럼 이해할 수 없는 천문현상을 보고 그 원인을 묻지 않고 다만 그것이 무슨 징조인지 물었던 데 반해, 그리스인들은 그 현상이 어떤 원인에 따라 일어나는 결과인지를 물었습니다.
행성의 역행 현상이 무슨 징조인지 묻는 것은 하늘의 심기를 살피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마치 여러분이 아침에 등교해서 담임선생님이 몹시 화가 나서 여러분들에게 퉁명스럽게 대할 때, 왜 그런지 물어보지는 못하고 그냥 그 화가 나에게 미치지 않을지 전전긍긍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 역시 하늘을 신적인 존재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천체가 보여주는 이상 현상에 대해, 그것이 무슨 징조인가 물은 것이 아니고 왜 행성이 다른 별들과 똑같이 움직이지 않고 다르게 그것도 불규칙하게 움직이는지 그 이유를 정면으로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신의 지혜, 신의 인식에 참여하려 했습니다.
물론 그런 열망이 언제나 충족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의 천문학자들은 중심은 같지만 회전축이 다른 여러 천구들을 겹치게 해서 행성의 역행운동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행성은 그런 동심 천구 세트의 마지막 천구에 붙어 있는데, 그 천구 세트가 같이 회전할 때 행성이 그리는 궤적을 통해 행성의 역행운동을 설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궤적이 숫자 8자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이 되거든요.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이 문제에 무관심하지 않았는데 그는 『형이상학』 12권에서 천문학자들이 상정한 천구 세트에 같은 수의 역행 천구들을 보태서 행성 운동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궤적이 행성의 실제 궤도와 일치하지 않았으므로 헬레니즘 시대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는 항성 천구의 원주를 따라 회전하는 이른바 주전원을 상정함으로써 행성의 역행운동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실제의 궤도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를 중심에 놓고 행성의 운동을 설명하던 종래의 관점을 아예 뒤엎어 태양을 중심에 놓고 지구를 포함한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행성이 역행운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자체는 충분하게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다 배웠을 줄 압니다만, 코페르니쿠스는 행성의 궤도가 타원이 아니라 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지동설 체계 역시 관측되는 행성 궤도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케플러는 행성 궤도를 완전한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고 상정함으로써, 코페르니쿠스가 남겨 놓은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뉴턴은 케플러가 그려 보인 태양계의 기하학적 구조를 수학적 함수식을 통해 완벽하게 설명해주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코페르니쿠스가 천주교 사제였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케플러가 개신교 목사였다는 사실도 아시나요? 뉴턴은 신부도 목사도 아니었지만, 그 이상으로 경건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이 종교의 역사에서 우리는 신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목격합니다. 하나는 사도 바울의 태도입니다. 그는 <로마서> 9장 19절에서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라고 말했습니다. 20세기 신학자 카를 바르트는 이 말에 대해 “똑같은 재료가 똑같은 손에 의해 꽃병이 될 수도 있고 요강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작업자의 자유다. 재료나 작품의 입장에서는 ‘도대체 왜?’가 있을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바르트, 손성현 옮김, 『로마서』, 742쪽] 간단히 말하자면 신 앞에서는 ‘왜?’라고 물을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신에 대한 유대적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JMS의 교단을 포함해서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맹목적 믿음을 경건한 종교적 태도라고 생각하는 한국 기독교의 뿌리가 이런 태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같은 기독교라고 하더라도 그리스적 전통에서 비롯되는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신의 로고스에 참여하기 원합니다. 신앙이 인간과 신의 합일을 지향한다면, 그리스인들에게 경건함이란 신 앞에서의 비굴한 굴종이 아니라, 신만이 온전하게 소유하고 있는 존재의 진리에 참여하려는 열정을 의미합니다. 그런 열정에 따라 그들은 신이 어떻게 세계를 창조했는지, 그 내적 원리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은 신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이것은 왜 이렇고 저것은 왜 저런지 집요하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전통이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와 뉴턴 같은 경건한 과학자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3. 부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전체에 대한 인식으로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새로운 물음이 생깁니다. 코페르니쿠스도 케플러도 뉴턴도 정확하게 말하자면 철학자들은 아닙니다. 자연 현상의 원인을 묻는다고 해서 모두가 철학자가 되는 것은 아닌 거지요. 똑같이 원인을 묻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과학적 인식의 차원에서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적 인식이란 어떤 점에서 과학적 인식과 다른 것입니까? 철학이 묻는 원인이나 근거는 과학이 묻는 그것과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려는 물음입니다.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원인을 묻는다는 점에서 철학도 과학도 ‘에피스테메’, 즉 인식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철학을 과학과 구별하려 할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같은 인식이라도 철학적 인식을 ‘소피아’, 즉 지혜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지혜란 어떤 인식일까요? 『형이상학』 1권 2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먼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고 부르는지를 살펴봅니다.
“첫째로 지혜로운 자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인식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물론 그가 모든 사실 하나하나에 대하여 인식을 소유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렇다. 다음으로 알기 어려운 것들 그리고 인간이 인식하기 쉽지 않은 것들을 알고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 그런 사람을 우리는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감각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어서 감각을 갖는 것은 쉬운 일이요,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또한 모든 인식에 관하여, 더 엄밀하게 알고, 원인을 가르치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 더 지혜롭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리고 학문 중에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즉 앎 자체를 위하여 우리가 선택하는 학문이, 학문이 낳는 실용적 결과들을 위해 선택되는 학문보다 지혜에 더 가까우며, 더 지배적인 학문이 종속적 학문보다 지혜에 더 가깝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자가 남의 지시를 받는 것보다, 그가 남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마땅하며, 그가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보다 지혜가 부족한 사람이 그의 말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1권 2장, 982a8]
여기서 보듯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매사에 소박한 상식에서 출발해서 추상적 결론을 찾아갑니다. 그랬더니 대개 사람들은 다른 무엇보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한다는군요. 물론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모든 일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까지 다 알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인간에게 허락된 한에서 또는 가능한 한에서 지혜로운 자는 모든 것을 아는 자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떤 학문 분야든지 막연하게 아는 것이 아니고 엄밀하고 정확하게 아는 사람을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한답니다. 더 나아가 인식이 실용적 결과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추구되는 경우에 그런 인식이 지혜에 속하는 인식이라고 생각한다는군요. 실용적 인식이란 다른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적 인식인 데 반해, 그 자체로서 추구되는 인식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되는 그런 인식이므로 더 고귀한 인식인데, 사람들은 바로 그런 인식을 지혜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에 대한 인식, 정확하고 엄밀한 인식, 도구적 인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추구되는 목적으로서의 인식이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지혜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의미의 지혜가 지니는 실천적인 의미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혜로운 자가 어리석은 자를 지배하고 이끄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면, 이런 인식을 추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일반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과학과 구별되는 철학적 인식의 특징을 규정합니다. 먼저 “앞서 말한 지혜의 특징들 가운데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최고로 보편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에게 속하는 특징이라”고 [『형이상학』, 1권 2장, 982a21]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합니다. 굳이 철학적 인식이 아니라도 모든 인식은 언제나 보편적 인식입니다. 물 분자가 두 개의 수소와 한 개의 산소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화학자가 말할 때, 그는 어떤 특정한 물이 아니라 모든 물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 전체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물에 대해 어떤 보편적 인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은 다른 학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뉴턴이 힘을 질량과 가속도의 곱으로 정의할 때, 힘의 이런 성질 역시 고도로 보편적인 인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힘의 이런 성질이 지구상의 특정한 지역에서만 통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것은 지구상에서만 통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태양계 전체에 통용되는 법칙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것 역시 보편적인 인식입니다. 하물며 수학적 인식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직각 삼각형에서 직각을 이루는 두 변의 길이를 각각 제곱하여 더하면, 그 길이가 나머지 빗변의 길이를 제곱한 것과 같다는 것 역시 특정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보편적으로 타당한 인식입니다.
하지만 물에 대한 보편적 인식과 힘에 대한 인식 그리고 도형에 대한 인식이 아무리 보편적인 인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삼라만상의 어떤 부분에 대한 인식이지 모든 것에 대한 인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과학은 어떤 특정한 분야의 대상을 연구합니다. 그리고 어떤 과학도 모든 것을 연구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한에서 과학적 인식은 자신의 분야에서는 보편적 인식을 추구하지만, 모든 것의 관점에서 보자면 여전히 특정한 부분에 대해 보편적 인식을 추구하는 것이므로 아직 최고로 보편적인 인식은 아니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반해 철학이 추구하는 지혜는 무제약적 전체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 즉 철학적 인식을 가리켜 최고로 보편적인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전체를 인식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앞에서 우리는 모든 인식은 원인을 아는 데 존립한다고 배웠습니다. 부분에 관한 인식은 부분에 관한 원인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체에 대한 인식은 전체의 원인, 쉽게 말해 그로부터 삼라만상이 생겨난 원인이겠지요.
하지만 전체는 무엇이고 또 그 전체에 대한 원인이란 정확히 어떤 것일까요? 이것은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닙니다. 이 점에 관해서 보자면 철학의 역사는 전체의 개념이 변하고 또 그에 따라 원인이나 근거의 개념도 변해 온 역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여기서 그 세세한 역사를 다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 스스로 도대체 전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그 전체라는 것을 또 어떻게 알 수 있는지 그리고 그런 전체에 대한 원인이나 근거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한 번 스스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기서 여러분들의 생각을 돕기 위해 서양 철학사에서 본격적인 의미로 첫 번째 철학자라고 여겨지는 탈레스(Thales)의 견해를 소개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그는 지금의 튀르키예의 서쪽 해변 도시였던 밀레토스 사람이었다고 전해집니다. 그의 정확한 출생과 사망 연도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가 기원전 585년에 일어났던 일식을 미리 예언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으므로, 그가 그 무렵 삶의 전성기를 살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한 오늘날도 저 같은 보통사람은 언제 일식이 일어나고 월식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2천 7백여 년 전에 일식을 예측했다면, 그가 얼마나 뛰어난 천문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겠는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수학에도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으로서, 사람의 키와 그림자의 길이가 정확히 같은 시각이 언제인지를 면밀하게 관찰한 뒤에, 피라미드 그림자의 길이를 통해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했다고 합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 김주일 외 옮김, 46쪽] 그리고 그는 모든 이등변 삼각형의 밑변에 접한 두 각의 크기가 같다는 것도 증명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그는 태양의 궤도와 크기를 측정하기도 하고 항해용 저서를 쓰기도 했다 합니다. 그러니까 그를 가리켜 그리스인들이 초창기 일곱 현인들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사람으로 칭송한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학문적 의미에서 첫 번째 철학자로 간주하는 까닭은 그가 천문학과 수학에서 이룬 저런 공적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를 첫 번째 철학자로 간주하는 까닭은 오로지 그가 ‘모든 것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했다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하여 ‘세계는 살아 있으며 신령으로 충만해 있다’고 말했다고도 전해집니다. 세계가 모든 것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한 데 묶어 살아 있는 것이라고 규정한 뒤에, 그 모든 것이 물에서 생겨났다고 말한 셈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천문현상이나 기하학적 도형이라는 어떤 부분적 탐구대상이 아니라 세계를 전체로서 고찰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체가 어디서 생겨났는지 그 원인을 묻고 그에 대해 세계의 근원이 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원인을 묻는 것은 인식의 일입니다. 그것은 과학자도 하고 철학자도 합니다. 그러나 과학자는 어디까지나 부분적 현상의 원인이나 근거를 묻습니다. 이에 반해 철학자는 전체에 관하여 원인이나 근거를 묻게 됩니다. 그렇게 전체에 대해 원인을 물었던 최초의 사람이므로, 우리는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탈레스가 왜 하필이면 모든 것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했는지, 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메로스의 신화에서 오케아노스, 즉 바다의 신이 다른 모든 신들의 아버지라고 불린다거나, 구약성경의 창세기에서도 천지창조 이전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했다고 되어 있으니, 당시 사람들이 물을 다른 모든 것들에 앞서는 근원으로서 생각할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물이라는 특정한 사물이 만물의 근원일 수 있다면, 공기나 불은 왜 그럴 수 없겠습니까? 그러므로 이후의 철학자들이 물이 아닌 다른 것을 만물의 근원으로 제시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필연적 수순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저는 탈레스 이후의 철학자들이 어떻게 탈레스를 이어가고 또 넘어갔는지 그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지는 않겠습니다. 탈레스 이후의 철학적 사유의 전개와 발전에 비하면, 그의 사유는 지극히 초보적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서 첫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은 그 걸음을 이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같은 원인을 묻더라도 부분이 아니라 전체 만물의 궁극적 원인을 물음으로써, 과학적 인식의 지평을 넘어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처음으로 열었다는 점에서 탈레스의 의미와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4. 전체의 관점에서 부분을 생각하는 것
만물의 그 으뜸가는 원인을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아르케(arche)라고 불렀습니다. 이 낱말이 시간적 의미의 처음을 뜻하기도 하고, 사회적 권력 관계에서 으뜸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은 이전 강의에서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처음인 것이 뒤따르는 것의 존재와 인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면, 즉 처음에 있는 것 때문에 나중에 있는 것이 존재하게 되고 또 인식될 수 있다면, 그런 처음의 것이 바로 철학적인 의미로 쓰인 ‘아르케’입니다.
이런 의미의 ‘아르케’를 로마인들은 ‘프린키피움’(principium)이라 번역했습니다. 이 낱말은 원래 ‘프린켑스’(princeps)라는 형용사에서 만들어진 명사인데, ‘프린켑스’는 ‘아르케’와 마찬가지로 시간적인 의미나, 사회적 권력 관계에서 으뜸이라는 뜻을 지닌 말입니다. 또한 같은 의미에서 창시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최고 권력자를 의미하기도 하는 말이었습니다. 이런 뜻의 ‘프린켑스’로부터 보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으뜸가는 근원이나 근거를 표현하기 위해 ‘프린키피움’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인데, 이것이 ‘아르케’의 번역어로 쓰였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들으면 여러분들은 영어의 ‘프린시플’(principle)이 라틴어의 ‘프린키피움’을 그대로 가져다 쓴 말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의 프린시플은 일반적으로 ‘원리’라고 번역되는데, 이 낱말을 이렇게 번역할 때, 우리는 ‘상대성 원리’ 또는 ‘만유인력의 원리’ 같은 원리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원리는 원래 ‘아르케’나 ‘프린키피움’이 담고 있는 뜻을 담아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원리는 형식적 법칙에 더 가까운 것이지만,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생각한 ‘아르케’와 ‘프린키피움’은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예를 들어 신처럼 만물의 근원과 근거가 되는 어떤 존재자를 먼저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그리스 철학자들이 탐구했던 만물의 근원 즉 ‘아르케’를 영어식으로 ‘원리’라고 번역하지 않고 ‘근원’으로 번역하려 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우리말로 된 다른 철학책, 특히 형이상학적 주제를 다룬 책에서 ‘원리’라는 말을 만나거든, 그 낱말이 상대성 원리나 만유 인력의 원리 같은 추상적 법칙이 아니고 십중팔구 ‘아르케’의 번역어로서 근원이나 으뜸 근거가 되는 존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형이상학이 부분적 현상이 아니라 모든 것의 원인을 탐구하는 보편적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또한 으뜸가는 원인을 탐구한다는 의미에서 근원적 학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현상이 하나의 결과로서 우리 앞에 주어질 때, 그 현상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럿의 원인들은 자기들 사이에서도 원인과 결과의 연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소월의 시 부모의 화자인 어린이가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라고 물을 때, 일차적으로는 너는 네 부모로부터 생겨나왔다고 대답할 수 있겠지만 그 부모 역시 자신의 부모로부터 생겨났을 것이고 그 부모는 다시 그들 자신의 부모로부터 생겨난 것이겠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이런 원인의 연쇄를 끝없이 소급해 올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최종적인 근원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어린이는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을 얻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해 직접적인 원인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왜 그렇게 나타나게 되었느냐 또는 왜 그렇게 있게 되었느냐는 물음에 대답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더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는 최종적인 원인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이 현상이 왜 있게 되었는지를 온전히 인식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으뜸가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은 모든 학문들 가운데 가장 엄밀한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수학적 자연과학이 가장 엄밀한 학문이라고 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는 우리 시대에 이런 말은 몹시 낯설게 들립니다. 하지만 다시 소월의 어린이로 돌아가 그가 자신의 최종적인 근원을 알기 전까지는 물음을 멈추지 않을 것임을 생각하면, 첫 번째 원인을 알기 전까지는 어떤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가 원인을 온전히 알지 못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의미에서 형이상학적인 지혜를 가리켜 모든 학문들 가운데서 가장 엄밀한 학문이라고 말하는지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소월의 어린이가 던지는 원인에 대한 물음이 한갓 시적인 물음일 뿐, 엄밀한 과학적 원인에 대한 물음과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엄밀한 과학의 세계에서도, 부분에 대해 우리가 아무리 엄밀한 인식을 얻는다 하더라도, 전체를 인식하기 전에는 부분에 대한 인식이 한갓 잠정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정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 강의에서 언급했듯이 물리학자들은 뉴턴의 중력 법칙을 통해 태양계의 행성들의 공전 주기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또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하계 전체를 두고 보면 그런 공전 법칙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은하계 중심과 가장자리가 같은 주기로 공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뉴턴의 중력 법칙은 전체 은하계의 공전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은하계의 공전을 설명하기 위해 물리학자들은 궁여지책으로 암흑물질이란 것을 상정합니다. 그러나 만약 은하계가 암흑물질에 의해 하나로 이어져 있다면 태양계 역시 동일한 물질에 의해 하나로 이어져 있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태양계도 은하계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행성들 역시 태양에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동일한 주기로 태양을 공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태양계는 암흑물질에도 불구하고 마치 진공 가운데 있는 것처럼 중력 법칙에 따라 내행성은 빠르게 공전하고 외행성은 느리게 공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거꾸로 왜 암흑물질이 태양계를 하나로 이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양계는 마치 그런 암흑물질 없이 마치 진공 속에 있는 것처럼 중력 법칙에 따라 행성들이 다른 주기에 따라 공전하는지 그것을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 까닭을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가장 엄밀한 과학이라는 물리학의 경우에도 부분에 대한 인식만으로는 그 부분에 대한 인식조차 온전한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행성들의 운동 법칙을 아무리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 법칙에 따라 행성의 운동을 아무리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전체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순간 그 인식은 은하계 전체의 인식과 충돌하게 되고, 그 결과 행성 운동에 대한 인식을 일종의 잠정적 인식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생각하면 이런 일은 행성 운동과 전체 은하계의 운동 사이에만이 아니고, 다른 어디서나 과학이 비슷하게 직면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중력의 법칙이 전체 은하계의 공전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같은 중력 법칙이 원자의 운동을 설명하지도 못합니다. 과학자들은 극한의 미시 세계에서는 중력을 설명하는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체를 하나로 통일되게 설명하지 못하는 한, 부분에 대한 인식이 아무리 엄밀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라도 보다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인식에 의해 바뀔 수 있는 인식일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전체를 하나의 근원으로부터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가장 엄밀한 인식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적 인식인 지혜야말로 가장 엄밀한 의미의 인식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5. 과학과 신학 사이에 있는 형이상학
그러나 이런 의미의 엄밀한 인식으로서의 형이상학적 지혜는 우리에게 현실로 주어진 인식이 아니라 우리가 지향하는 일종의 이념입니다. 어떤 학문도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현상의 원인을 탐구하는 것 자체가 힘든 정신의 노동을 요구하는 일인 데다가, 전체 만물의 근원적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런 말을 할 것도 없이,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다고 자부하는 지금에도, 전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주와 자연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 자신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바닷가에서 떠올린 한 방울 물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인간이 이 우주를 설계하고 창조한 제작자가 아닌 한, 우리는 영원히 삼라만상의 근원적 원인을 그 자체로서 인식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소월의 어린이가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 보랴”는 열린 물음으로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끝낼 수밖에 없었던 것도, 우리의 물음에 끝이 있을 수 없음을 예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체에 대한 가장 엄밀한 의미의 인식이라는 의미의 형이상학적 지혜라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에게 온전히 합당한 인식일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적 지혜가 신적인 학문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어떤 학문도 그것보다 더 고귀한 것이라 생각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가장 신적인 것은 가장 고귀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직 그 학문만이 두 가지 뜻에서 신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한편으로는 그런 학문을 신이 최고로 소유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고,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그것이 신적인 [원인들]에 대한 학문이라면, 그런 의미에서도 그 학문은 신적인 학문인 것이다. 오직 그 학문만이 이 두 가지 특징을 함께 갖고 있으니, 일반적 의견에 따르면, 신은 모든 것을 주재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고 일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그런 학문은 신이 홀로 유일하게 또는 가장 탁월하게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983a4 아래]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이 두 가지 의미에서 신적인 학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에서 그것은 신만이 유일하게 소유할 수 있는 학문이거나 다른 누구보다 더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신적인 지혜에 필적할 수는 없다는 말이겠지요. 다른 한편 형이상학은 신적인 원인을 탐구한다는 점에서도 신적인 학문입니다. 이 말은 만물의 궁극적 근거로서 신적인 존재가, 형이상학적 지혜가 탐구하는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적 지혜의 온전한 주체가 신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형이상학적 탐구의 대상이 신이라는 점에서, 형이상학은 신적인 학문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인간은 온전한 지혜를 소유하고 있는 자가 아니고, 다만 그런 지혜를 사랑하고 동경하여, 쉼 없이 그런 지혜를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필로-소피아’(philo-sophia), 곧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이름은 정말로 이 특별한 학문의 운명을 온전히 드러내는 이름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랑하여 추구하는 그 지혜가 신만이 온전히 소유하고 있는 것이고 또 신적인 존재에 관한 것이라면, 지혜에 대한 사랑은 동시에 신에 대한 사랑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그런 사랑을 가리켜 “신에 대한 지성적 사랑”(amor Dei intellectualis)이라고 불렀습니다. [스피노자, 강영계 옮김, 『윤리학』, 제5부 정리33]
그러나 이런 신에 대한 사랑이 통속적인 의미에서 신을 믿고 천당에 가겠다는 종교적 욕망이 아니라, 신적인 지혜와 ‘로고스’에 참여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되는 한에서, 신에 대한 사랑은 진리를 향한 과학적 열정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코페르니쿠스와 케플러 그리고 뉴턴 같은 과학자들이 품었던 종교적 경건함은 바로 그런 과학적 진리탐구의 열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형이상학은 과학과 신학 사이에 놓인 다리와도 같습니다. 처음에 형이상학은 부분적 현상의 원인을 탐구하는 과학적 인식을 넘어 세계 전체의 궁극적 원인을 탐구하려 합니다. 이렇게 철학이 과학적 인식을 넘어갈 수밖에 없는 까닭은 부분에 대한 진리가 전체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만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체의 궁극적 근원에 대한 인식은 과학적 탐구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전체가 아니라 부분에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전문성이란 과학의 제한성의 반대급부입니다. 스스로를 어떤 한계 내에 제한하지 않는다면, 과학은 탐구의 엄밀함을 포기하고, 자칫 막연한 추측에 흐르기 쉽습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애써 침묵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자신의 한계를 지켜 세계의 어떤 부분적 현상에만 몰입할 때, 과학은 부분적 인식이 가지는 한계와 모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런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은 다시 부분적 현상으로부터 전체를 향해 고개를 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부분적 진리는 오직 전체의 진리를 통해서만 온전히 해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체로의 초월이 필요하다 해서 과학 자신이 전체를 향해 초월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이 부분을 초월해서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순간 과학은 스스로 과학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인식의 온전함을 위해 과학을 초월하는 도약은 이제 또 다른 학문의 소관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과학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초월해 전체를 향해 나아가는 학문이 바로 철학 또는 형이상학입니다. 그런데 그 전체의 진리는 신에게만 온전히 속하는 것이고 또 신을 통해서만 만물의 진리가 온전히 드러나는 한에서, 형이상학은 신학으로 향하는 다리가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내재적 학문으로서의 과학과 초월적 학문인 신학 사이에 놓인 다리와도 같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신학이라는 말에서 기독교 신학을 연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이 기독교 출현 이전 사람이었으므로 기독교 같은 종교는 알지 못했던 데다가, 그가 말하는 신이 반드시 기독교인들이 표상하는 그런 종류의 신과 전혀 다른 것도 아니지만 똑같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신을 다소 중성적으로 표현하여 ‘절대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정에 그린 수염 난 할아버지가 아니고 만물의 궁극적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절대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물론 그 절대자의 정체가 무엇이냐, 그 절대자가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은 또다른 탐구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나중에 다시 고찰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의미의 절대자라면 서양 철학만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중용』의 첫 구절에서 “천명을 일러 성이라 하고 그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며 그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고 말할 때, 그 하늘[天]도, 노자가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고 말할 때의 그 길[道]도, 원효가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에서 말하는 ‘일심’(一心), 곧 하나의 큰 마음도 모두 절대자를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학에서 신이라는 것이 절대자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철학이 마지막 단계에서 신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은 동양, 서양을 나눌 것 없이 어디서나 비슷하게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6. 삶과 역사의 궁극 목적에 대하여
그렇다면 형이상학이 세계 전체의 근원인 절대자를 인식한다면, 그것으로 할 일을 다 한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다시 소월의 어린이를 불러옵시다. 그가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라고 물을 때, 만약 우리가 ‘너는 신에게서 창조되어 나온 존재란다’라고 대답해준다면 그 아이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 느낀 당혹감이 해소될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하나의 대답은 분명히 또 다른 물음을 낳을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물음 가운데 하나가 ‘그럼 무엇을 위해 나는 생겨난 것인가’라는 물음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존재의 목적이 하나의 새로운 물음으로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라고 물을 때, 그 물음이 지향하는 대답의 영역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소월의 어린이가 ‘나는 어쩌면?’이라고 물을 때, 그 “어쩌면”이라는 의문사는 하나의 당혹감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당혹감은 자기가 없을 수도 있었는데, 여기 이렇게 있다는 사실에 대한 당혹감일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당혹감은 일차적으로는 자기 존재의 근원을 향해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라는 당혹감은 다른 무엇보다 나는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라는 물음을 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혹감은 자기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근원을 안다고 해서 물음이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원을 안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앞으로도 계속 존재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느끼는 당혹감은 근원뿐만 아니라 자기 존재의 궁극적 목적 역시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라는 물음 속에는 내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과 목적에 대한 물음이 같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 학문은 우리가 때마다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는지, [그 목적을] 인식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보조적 학문보다 더욱 더 지배적인 자리에 있다. 이것, [즉 행위의 목적]은 각각의 일이 추구하는 좋음인 바, 일반적으로 전체 자연 속에도 최고의 선이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말한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찾는 학문의 이름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학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학문은 바로 첫 번째 근원들과 원인들에 대한 이론적 학문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좋음과 지향 목적은 원인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982b4]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도 일종의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을 하는 까닭이 어떤 좋음 때문인 것처럼, 전체로서의 자연의 운동에도 목적으로서 최고의 선이 있으리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자연의 운동에도 어떤 목적이 있는지 어떤지, 있다면 그 목적의 정체는 또 무엇인지는 따져 물어야 할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형이상학이 전체의 궁극적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형이상학이 탐구하는 원인 속에는 목적이라는 원인도 포함된다는 생각 자체는 얼마든지 수긍할 만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형이상학이 궁극적 원인을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그 원인이란 나와 세계의 최초의 근원인 동시에 나와 역사의 최종적 목적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나와 세계의 최초의 근원과 나와 역사의 최종적 목적을 내가 인식할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를 향해 가는 존재인지를 알고, 나의 존재 의미를 전체 속에서 온전히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철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연적 운동의 목적이 되는 최고선은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는 역사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언제나 동일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천체나 지상적 생명체의 순환 운동의 근저에 놓여 있는 정태적 완전성이었습니다. 역사가 어떤 목적을 향해 발전해 나간다는 생각은 적어도 그리스인들에게는 낯선 생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이 탐구하는 원인이 처음의 근원만이 아니고, 자연의 운동이 지향하는 마지막 목적도 일종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에게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본질에 대해 대단히 중요한 가르침을 줍니다. 형이상학이 전체의 근원을 돌아볼 때, 그것은 이론적인 학문입니다. 그러나 형이상학이 미래를 내다보면서 삶과 역사의 궁극 목적을 물을 때, 그것은 한갓 이론적인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인 학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형이상학이 나와 세계 전체 그리고 과거와 미래를 더불어 생각하는 학문이므로 그것은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학문일 수 있는 것입니다.
7. 도구적 학문과 자유로운 학문
지금까지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똑같이 현상의 원인을 묻는다 하더라도 과학은 어디까지나 부분적인 현상의 원인을 묻는 데 반해 형이상학은 전체의 궁극적 원인을 묻는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그런데 형이상학이 찾는 원인은 이미 지나가 버린 만물의 근원만이 아니고, 삼라만상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전체의 근원과 목적이 모두 형이상학이 탐구하는 궁극적 원인인 것입니다. 만약, 탈레스가 생각했듯이, 그런 원인이 물이나 공기처럼 자연 속의 어떤 원소 같은 것으로 있다면, 형이상학은 자연 속에서 궁극적 원인을 탐구하는, 일종의 자연철학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자연의 근원과 목적이 신처럼 자연을 초월한 어떤 절대적 존재라면, 형이상학은 자연철학에서 머물지 못하고 신학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형이상학이 자연학과 신학 사이에 놓인 무지개다리와도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 대한 이런 객관적 규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학문의 가치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습니다. 그에 따르면 “다른 모든 학문이 이 학문보다 더 필요한 학문이지만, 이 학문보다 더 가치 있는 학문은 없다”고 합니다. [『형이상학』, 983a10] 일견 이 말은 모순적인 말처럼 들립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학문이 형이상학보다 더 필요한 학문이라는 말은 형이상학이 다른 학문에 비해서는 필요 없는 학문 또는 쓸모없는 학문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일 터인데, 그렇게 쓸모없는 학문이 다른 모든 학문보다 더 가치 있다는 말이 어불성설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쓸모없는 학문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치 있는 학문일까요?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이 쓸모 있는 까닭은 그 학문들이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이나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물리학적 지식은 그 자체로서는 순수한 인식이지만 우리는 그 인식을 통해 핵폭탄도 만들고 우주선도 쏘아 올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물리학이 그 자체로서는 현실적 응용을 목적으로 삼는 학문이 아닌 순수 과학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어떤 응용학문보다 쓸모 있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순수 학문의 중요성을 말할 때 겉으로는 순수한 인식의 가치를 높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내는 그것이 가져다 주는 실질적 이익 때문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형이상학은 물리학처럼 순수 학문이기는 하지만 아무런 실용적 쓰임도 없고 이익도 가져오지 않는 그야말로 순수하기만 한 학문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학문이어서, 조금이라도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철학이나 형이상학 따위는 관심을 가질 만한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쓸모가 문제라면, 철학이 필요 없는 학문이라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도 선선히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이 가장 가치 있는 학문이라면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은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필요성 때문에 그 학문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할 뿐,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닐 때, 우리가 그를 자유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 학문 가운데 오직 그것만이 자유로운 학문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있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982b24]
여기서 하나의 반전이 일어납니다. 형이상학이 쓸모없는 학문인 까닭은 그 학문이 다른 어떤 필요 때문에 연구되는 학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형이상학은 다른 어떤 이익을 위한 수단이 되는 학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쓸모없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학문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쓸모 있는 학문이라고 불린다면, 그 모든 쓸모있는 학문이 추구하는 마지막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 물음에 대해, 이른바 쓸모있는 학문은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학문은 단지 도구적 학문일 뿐이어서 주어진 목적이 있을 때, 그 목적을 위해 쓰임이 되기는 하지만 스스로 목적을 결정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리학자는 원자의 본성을 연구하고 인식할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원자탄을 만들지, 아니면 원자력 발전소를 지을지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물리학적 인식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손에 달린 일입니다. 이처럼 학문이 자기 자신 속에 탐구의 목적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과학은 맹목적입니다.
물리학적 인식을 어떤 목적을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이냐는 물음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와 전체 역사의 방향과 목적을 스스로 정립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어지는 인류의 삶을 여행길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과학적 인식은 우리에게 훌륭한 이동수단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의 힘으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차에 올라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를테면 우리가 위치한 길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지 우리가 모른다면 우리가 아무리 좋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또는 우리가 아무리 크고 좋은 배를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 배에 탄 사람들이 서로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다르다면 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경우 우리가 아무리 좋은 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쓸모가 없을 것입니다. 쓸모 있는 것의 쓸모는 오직 목적이 분명할 때만 있을 수 있습니다. 목적이 없다면 쓸모라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연명하는 것이 삶의 목적일 수 없다면, 우리는 고개를 들어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지 삶과 역사 전체에 대한 전망이나 지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의 길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삶이 나 혼자 걷는 길이 아니고 우리가 같이 걷는 길이라면 우리가 어디서 시작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에 대한 공통의 인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존재와 역사 전체에 대한 그런 공통된 전망이 없다면 하나의 민족은 결코 공동의 역사를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이런 사정을 백범 김구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무릇 한 나라가 서서 한 민족이 국민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기초가 되는 철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국민의 사상이 통일되지 못하여 더러는 이 나라의 철학에 쏠리고 더러는 저 민족의 철학에 끌리어 사상의 독립, 정신의 독립을 유지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고 저희끼리는 추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상으로 보면 더러는 로크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워싱턴을 서울로 옮기자는 자들이요, 또 더러는 맑스-레닌-스탈린의 철학을 믿으니 이들은 모스크바를 우리의 서울로 삼자는 사람들이다.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우리의 서울은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니, 만일 그렇게 주장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자는 예전 동경을 우리 서울로 하자던 자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서울은 오직 우리의 서울이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철학을 찾고 세우고 주장하여야 한다. 이것을 깨닫는 날이 우리 동포가 진실로 독립정신을 가지는 날이요, 참으로 독립하는 날이다.” [『백범일지』, 돌베개, 14쪽]
자신의 철학이 없는 민족은 자기의 뿌리에 대한 자각도 없고 더불어 추구할 목적도 없는 가축의 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하는 것은 자기를 보호해주고 먹여 줄 외부의 주인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남에게 의지하게 되고, 저희끼리 추태를 보이게 됩니다. 그 추태가 바로 한국전쟁입니다. 그 전쟁은 로크의 철학과 마르크스의 철학을 자기 철학으로 삼았던 사람들이 보인 추태였습니다. 그리고 그 추태는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철학이 어떤 민족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도리어 형이상학이 참된 의미에서 전체를 탐구하는 학문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특정한 개인이나 민족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한 학문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가 철학 없이 개화된 민족인 까닭에 끝없는 분열에 시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체 인류가 전쟁의 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도 인류를 하나로 묶어 줄 형이상학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인류가 같이 걸어야 할 큰 길을 여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요?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류가 더불어 추구할 수 있는 목적과 가치를 우리가 말할 수 있기 전에는,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전쟁과 반목이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형이상학은 다른 모든 실천에 앞서는 근원적 실천입니다. 철학은 특정한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든 쓸모 있는 일들을 쓸모 있게 해 주는 궁극적 목적을 생각하는 학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를 향해 가는 존재인지를 생각하는 학문입니다. 노예는 그런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의 삶은 타인의 의지에 예속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라면, 여러분은 자기가 걷는 삶의 길이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를 향해 가는 길인지 스스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 길이 모두 미리 주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때로는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새롭게 열어나갈 길이 과연 걸을 수 있는 길인지 아닌지, 새로운 땅으로 통하는 길인지 아니면 낭떠러지로 이어지는 길인지를 알려면, 여러분은 존재와 역사 전체에 대한 안목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전체를 생각하는 학문, 그리고 이를 통해 여러분을 이 무한한 역사 속에서 한 사람의 깨어 있는 자유인으로,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들어 올리는 학문이 바로 형이상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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