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강의 ①]
[일러두기]
이번 글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형이상학 강의는 광주에 있는 철학 대안학교인 지혜학교 학생들에게 보내는 지상 강의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강의 내용은 내가 전남대학교 학생들을 위해 진행하는 <형이상학> 강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여기서 굳이 고등학교 과정의 학생들을 상대로 형이상학 강의를 진행하는 이유는 철학의 모든 분야 가운데서도 가장 추상적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에 대한 강의가 전문용어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당신이 철학에 대해 그리고 그 중에서도 형이상학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 강의실에 들어오는 것을 막을 사람은 없다. 또는 당신이 어린이의 부모라면 당신의 자녀와 같이 이 강의실에 들어와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강의를 핑계로 당신의 자녀와 지금까지와는 다른 대화를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1.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의 경우
지난해 제가 여러분을 처음 만났을 때, 여러분이 내게 물었던 물음은 ‘우리는 무엇을 왜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꾸로 여러분에게 되물었습니다. ‘왜 여러분은 여러분이 왜 사는지 묻지 않습니까? 왜 재미도 없는 공부에 대해 묻습니까?’ 그러면서 저는 무엇을 배워야 하느냐는 물음은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지가 분명해지고 난 다음에야 의미가 있는 물음이 아니냐고 되물었습니다. 그건 나의 존재 이유, 내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해지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지는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뒤따라 나올 것이므로 굳이 고민할 것이 없으리라는 뜻이었습니다.
여러분을 관성적 생각으로부터 자기성찰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기는 하였으나, 사실 여러분의 물음이 하찮은 물음은 아닙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존재 의미가, 내가 묻는다고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물음도 아닙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물음은 한 번의 물음과 대답으로 종결될 수 있는 물음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평생에 걸쳐 반복해서 다시 물을 수밖에 없는 물음입니다. 그러므로 정식으로 처음 여러분에게 철학 강의를 시작하는 지금, 저는 그 평생의 물음은 나중으로 미루어 두고, 그때 여러분이 제기한 물음, 우리가 무엇을, 왜,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그 물음에서 첫 강의를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학생이니 배우는 사람이고, 저 또한 평생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살아왔다는 점에서 여전히 학생이니, 여러분이나 저나 따지고 보면 배우는 학생인 것은 똑같습니다. 그럼 우리가 그렇게 평생 배우는 까닭이 무엇인가요?
한국인의 기억 속에서 이 물음에 대한 가장 오랜 대답은 아마 『논어』의 저 유명한 첫 구절일 것입니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배우고 익히는 것이 즐거운 일이랍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다른 목적 이전에 그냥 즐거워서 배우는 거랍니다. 마치 여러분이 게임에 빠져들 때, 딱히 무슨 목적이 있어서 그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고 즐겁고 재미있어서 때로는 밤을 꼬박 새워 게임을 하듯이, 또는 드럼과 기타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를 때처럼, 그냥 즐거워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거 아닙니까. 근데 배움의 기쁨이라니, 이거 말이 되는 건가요? 배우는 것이 정말로 그렇게 즐거운 일인가요? 특히 여러분들처럼 청소년기에 학교에서 하는 공부가 과연 즐거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요?
여러분에게 물으면서 갑자기 슬퍼집니다. 최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된 정순신 변호사라는 사람의 아들이 민족사관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심각한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다는 것이 밝혀져 결국 그 변호사가 공직에서 사퇴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야당은 이 사안을 두고 인사의 실패라고 비판하지만, 저는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그보다는 우리 교육의 실패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픕니다.
민족사관고등학교라면 공부 잘하는 수재들이 모인 학교라고 알려져 있고 그 변호사의 아들 역시 공부 잘해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학생에게 배움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지금 그 학생은 서울대 철학과에서 도대체 무슨 철학을 배우고 있을까요? 아니면 철학과 수업은 적당히 학점이나 따고 아버지처럼 검사가 되어 호의호식하기 위해 로스쿨 입학 준비에 골몰하고 있을까요?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정말로 즐거운 일을 하면서 물리적이든 언어적이든 남에게 폭행을 가한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없을 것입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다른 곳도 아니고 교실에서 친구를 학대하는 것은 공부가 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하는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공부가 정말로 즐거워서 하는 일이었다면, 그래서 하루하루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정말로 희열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면, 그 변호사의 아들이 피해자의 인생을 파괴할 정도로 친구에게 공격적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공부가 너무 재미있는데, 남에게 폭력을 가할 겨를이 어디 있습니까? 그 재미있는 공부를 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을 텐데.
대개 사랑도 폭력도, 남에게 받은 것을 남에게 되돌려 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남에게 베풀게 되고 폭력에 시달리는 사람은 자기가 받은 폭력을 다른 누군가에게 행사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학교폭력은 공부가 곧 폭력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학생들을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책상 앞에 묶어두면서 자기들이 무슨 훌륭한 일을 하나보다 생각하지만, 전국의 교장 선생님들을 한 교실에 수십 명씩 집어넣어 한 달만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재미없는 교육을 받게 한다면 그리고 시험을 쳐서 일정 성적을 받지 못할 경우 똑같은 연수 교육을 다시 받게 한다면, 아마 그분들 모두 미쳐버릴 것입니다.
학교폭력은 공부라는 이름의 아동학대의 결과입니다. 물론 똑같이 학대받는다고 해서 모두가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처럼 학교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으므로 그는 자기의 악업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고, 마치 우리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이 그런 폭력 학생을 양산하는 공부란 이름의 아동학대를 그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이런 폭력극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한국의 학교 교육을 아동학대라고 비판하는 까닭은 제가 공부나 배움 자체의 가치를 부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돌아보면 온통 입시 경쟁에 매몰되어 있는 한국의 학교 교육을 비판하면서 대안 교육을 시도했던 많은 분들이 부지불식간에 공부와 배움 자체의 가치를 폄하하는 태도를 취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입시 교육이 나쁘다 해서 수학도 과학도 배울 필요 없고, 영어도 배울 필요가 없고 그런 지식교육이 아닌 다른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배우지 못하면 끝내 사람 구실을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온전히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많이 있지요. 학교는 그렇게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을 두루 가르치고 배우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이 재미가 없다면, 그래서 학생들에게 아무런 배움의 기쁨도 느끼지 못하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부는 노역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르치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가르치기는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가 재미는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재미없는 노역에 지나지 않는 공부를 학생들이 억지로라도 하게 만들기 위해 어른들은 공부를 보상과 연계시킵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 더 많은 보상을 받고 못 하는 학생이 더 적은 보상을 받게 만드는 거지요. 그게 입시 경쟁입니다. 시험을 잘 보는 것이 무슨 대단한 탁월함의 징표라도 된다는 듯이 그리고 일류대학 나오면 세상에 무슨 대단한 기여라도 한다는 듯이, 그래서 재미없는 공부를 잘하면 훌륭한 사람이라는 듯이, 학교는 공부와 시험성적으로 학생들을 줄 세우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학생들의 마음속에는 재미없는 공부에 대한 원한 감정이 쌓이겠지요. 그리고 그 원한감정이 남에게 분출되면 학교폭력이 될 것이고, 자기 안으로 쌓이면 그건 온갖 청소년 정신질환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부가 원래 재미없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재미있게 가르치고 배우면 얼마든지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자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말한 것이 공연한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배움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말일까요?
2. 감각과 기억, 앎과 배움의 시작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 1권 1장에서 인간의 지식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겨나는지를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모든 앎은 감각에서 시작됩니다.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 감각에 대한 사랑이 한 징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딱히 필요하지 않은데도, 그냥 무언가 감각하는 것을 좋아하고, 또한 다른 무엇보다 눈을 통해 보는 것을 가장 좋아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행동을 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무런 행동의 의도가 없는 경우에도, 사람들이 말하듯이, 만사를 제쳐두고 보기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감각들 가운데 시각이 우리가 사물을 아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고 [사물들 사이의] 많은 차이점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조대호 옮김, 『형이상학』, 도서출판 길, 980a21. 번역문은 필요에 따라 수정함]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고 싶어 한다”는 말은 공자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닮았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한 배움을 동아시아에서는 주로 도덕적 깨달음으로 이해한 것과 달리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앎은 사실에 대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모르던 것을 새롭게 아는 것을 본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앎에 대한 욕구는 일종의 본능적 욕구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라도 원하는 것이 충족되면 쾌감이나 기쁨을 느낍니다. 앎에 대한 욕구가 일종의 본능적 욕망이라면, 그 욕구가 채워질 때 우리가 기쁨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그래서 모르던 것을 알게 되면 누구라도 기쁨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근거로 감각이 주는 즐거움을 들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볼 때 느끼는 즐거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실용적 목적이나 이익이 없더라도 그냥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건 우리가 봄날 꽃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기쁨을 생각하면 금세 이해할 수 있지요. 여행을 다니면서 이것저것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아무런 다른 목적이 없어도 그냥 보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가 눈으로 봄으로써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각을 가진 동물이라고 해서 모든 동물이 앎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앎이 감각에서 시작된다고 하더라도, 감각이 앎의 전부인 것도 아니고, 앎이 감각에서 완성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앎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감각과는 다른 능력이 보태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을 위해 감각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기억이라고 말합니다.
“동물들은 본성적으로 감각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어떤 동물의 경우는 감각으로부터 기억이 생겨나지 않는 데 반해, 다른 동물의 경우에는 기억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 때문에 뒤의 경우에 해당하는 동물들은 기억하는 능력이 없는 동물들보다 더 분별 있고 학습능력이 뛰어난데, 소리를 듣는 능력이 없는 동물들은 분별은 있지만 배우지는 못하고-예를 들어 벌이나 그런 종류의 다른 동물들이 그렇다-기억에 더하여 청각능력이 있는 동물은 학습도 한다.” [조대호 옮김, 『형이상학』, 980a27]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이 본성적으로 감각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동물이 기억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감각만이 아니라 기억의 능력도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가르침을 받아도 계속 보존하고 있지 못할 것이므로 배움이 불가능하겠지요. 특히 그 가르침이 말이나 다른 종류의 소리를 통해 주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청각이 없으면 분별은 있지만 배우지 못하고, 청각도 있다면 무언가를 배우고 학습할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감각 다음으로 기억이 필요하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과학적 사실입니다. 동물의 인지능력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으레 군소[바다달팽이]처럼 신경세포가 크고 신경망의 구조 역시 비교적 단순한 동물이 어떻게 감각한 것을 기억하는지 연구하곤 하는데, [에릭 캔델, 전대호 옮김, 『기억을 찾아서』 참고] 이는 기억이 감각과 함께 동물의 인지능력을 규정하는 핵심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근대 영국 경험주의 철학과 함께 의회민주주의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던 철학자 로크는 사람의 기억이 쾌락과 고통, 그 중에서도 특히 고통의 감각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감각의 중요한 임무가 신체에 해로운 것과 이로운 것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므로, 현명하게도 자연은 몇몇 관념의 수용에는 고통이 따르도록 정해놓았다”는 것입니다. [로크, 추영현 옮김, 『인간지성론』, 171쪽.] 말하자면 생존에 해로운 것을 감각할 때 고통이 동반되도록 함으로써 해로운 일을 피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사람의 경우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만약 동물이 자기에게 고통을 준 것이 어떤 것이었던지를 잊어버린다면, 똑같은 고통을 반복해서 겪게 되겠지요. 그리고 이것은 생존을 위해서도 위험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감각이 쾌락을 주고 어떤 감각이 고통을 주었는지 기억하는 것은 동물로 하여금 이로운 것을 추구하고 해로운 것을 피하도록 하려는 자연의 배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기억이란 우리의 마음의 존재 그 자체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감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감각한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감각되지 않는다면, 이는 내가 감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그런데 내가 감각하는 것을 다음 순간에 잊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감각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존되지 않고 끊임없이 사라져버린다면, 이것은 아무것도 감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가 어떤 것을 가장 단순하게 지각하기 위해서도 마음이 지금 지각하는 것을 바로 다음 순간에도 계속 붙잡아 둘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칸트는 마음의 일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각된 것을 머무르도록 붙잡는 것을 기억이라고 부르지 않고 “재생의 종합”이라고 불렀지만, 기억이 ‘재생의 종합’의 가장 중요한 기능인 것은 분명합니다.
무엇인가를 배우기 위해 기억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암기는 모든 공부의 기초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퇴계는 “사람들이 시를 공부하기 위하여 『고문진보』를 보통 6백 번씩 읽으면서 암송하는데, 나도 몇백 번을 읽고 암송하게 되었고, 그 뒤로는 한결 시를 쉽게 지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거니와[황견, 이장우 외 옮김, 『고문진보』, 을유문화사, 해제], 서양에서도 이런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아테네의 역사가 크세노폰의 『향연』에 보면 니케라토스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훌륭한 남자가 되기 원했던 나의 아버지는 내게 호메로스의 모든 서사시를 배우게 했지.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일리아스>와 <오뒤세이아>를 전부 외울 수 있다네.” [크세노폰, 오유석 옮김, 『향연』, 3;5]
저는 한국의 주입식 교육을 비판하면서 종종 암기식 학습을 비판해왔습니다만, 공정하게 말하자면 암기 없이 배움은 없습니다. 오늘날 학생들이 외우는 것이 『일리아스』나 『오뒤세이아』 또는 『고문진보』 같은 책이 아니고, 게다가 공부가 사람을 성적 순으로 차별하는 도구가 되어 있으니, 그것이 불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쁘다 해서 배움을 거부하거나 아무것도 외우지 않고 단지 사고력만 기르겠다고 고집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어리석음이겠지요.
3. 경험과 인식의 차이에 대하여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로 돌아갈까요. 그에 따르면 앎의 과정에서 기억 다음에 오는 것이 바로 경험입니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을 감각하고 기억한 다음에 경험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상상이나 기억에 의존해서 살아갈 뿐, 경험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기억으로부터 경험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똑같은 일에 대한 여러 번의 기억은 마침내 하나의 경험이라는 능력을 낳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은 학문적 인식이나 기술과 거의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학문적 인식과 기술은 경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생겨난다.” [『형이상학』, 980b29]
감각이 기억을 낳고, 반복된 기억은 경험을 낳습니다. 그리고 어떤 대상에 대해 경험이 있다는 것은 이제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합니다. 많은 것을 안다는 것은 많은 것을 경험했다는 것과 종종 같은 말입니다. 책을 읽고 어떤 것에 대해 정보를 습득한 것이 아니고, 직접 경험해 보고 안 것을 가리켜 우리는 산 지식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경험이 학문적 인식이나 기술과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경험과 학문적 지식이 똑같은 것이 아니라도, 경험과 이론적 지식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는 거지요. 학교에서 체험학습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뜻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경험은 학문적 인식의 출발점이기는 하지만 종착점은 아닙니다. 인식과 기술은 경험에서 생겨나기는 하지만, 경험 그 자체가 이론적 인식이나 기술은 아니라는 거지요. 우리의 앎이 감각에서 시작된다고 해서 감각이 앎의 전부일 수 없듯이, 학문적 인식이 경험에서 시작된다고 해서 경험이 곧 그 자체로서 학문적 인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유가 무엇일까요? 경험이 그 자체로서 학문적 인식은 아니라면, 학문적 인식에 비해 경험이 모자란 것이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경험은 언제나 개별적인 사실에 관한 앎입니다. 그러나 학문적 인식은 보편적인 앎입니다.
“경험에서 얻은 많은 생각들로부터, 같은 성질을 지닌 대상에 대해 하나의 일반적 판단이 생겨날 때, 비로소 기술이 생겨난다. 이 병을 앓는 칼리아스에게 이런저런 치료가 통했고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여러 개인들의 경우에도 그랬다는 관념을 갖는 것은 경험에 속하는 일이다. 그에 반해 다른 체질과 구별되는 한 종류의 체질을 가진 모든 사람이 이 질병을 앓고 있을 때, 그 치료가 [모두에게] 통했다고 판단하는 것은 기술에 속하는 일이다.” [『형이상학』, 981a5]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이 아니라 기술과 경험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술과 학문을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므로 여러분은 기술과 경험의 차이가 학문과 경험의 차이라고 생각하고 읽으시면 됩니다. 그가 여기서처럼 학문과 기술을 종종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말하는 까닭은 모든 앎은 할 줄 앎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그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모든 기술이 인식에 기초하고 있는 거지요. 산업을 위한 기술이 과학적 인식을 전제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경험이 기술이나 인식과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를 들어 지금과도 같은 코로나 시기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고 합시다. ‘나 타이레놀 먹고 코로나 나았어.’ 그럴 수도 있지요. 무증상으로 지나가는 경우도 있다는데, 왜 그럴 수 없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자기 자신의 개별적 경험입니다. 그러자 그가 다시 말합니다. ‘내 친구도 코로나 걸렸을 때 그냥 타이레놀 먹었더니 괜찮아졌대.’ 이것 역시 개별적 경험입니다. 하지만 설령 몇몇 사람이 타이레놀만 먹고 코로나 증상에서 벗어난 경험이 있다고 해서 그로부터 ‘모든 사람은 타이레놀을 먹고 코로나를 치료할 수 있다’는 보편적 판단이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학문적 인식이란 개별적 경험이 아니라 보편적 판단에 존립한다는 점에서 경험과 다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경험이 아주 많이 쌓이면 결과적으로 보편적 판단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동일한 경험이 아주 많이 반복된다면 그렇게 반복된 동일한 경험이 곧 보편적 판단이 되고 그것이 학문적 인식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언뜻 들으면 그럴 것도 같습니다. 학문 방법론에도 귀납적 방법이 있으니까, 그걸 생각하면 타이레놀 먹고 코로나를 치유한 사례들이 무수히 많다면 그런 사례들에 대한 경험이 곧 의학적 인식이 되고 의술이 된다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어 보입니다. 사실 치료는 개인을 치료하는 일이지 보편적인 질병을 치료하거나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대개 그냥 책으로만 배운 의사보다는 경험이 많은 의사를 더 신뢰하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의술이란 경험의 축적 아닐까요? 그리고 의학이라는 학문 역시 본질적으로는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4. 사실을 아는 것과 원인을 아는 것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기술이 보편적 인식을 개별적 사례에 적용하는 일이라는 것은 선선히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기술을 위해 경험이 중요하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과 기술 또는 경험과 학문적 인식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경험이 많이 쌓인다면 겉보기에는 그것이 보편적 판단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경험과 학문적 인식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된 앎과 전문적 식견이 경험에 존립한다기보다는 기술에 더 많이 존립한다고 생각하며, 기술자들이 유경험자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판단하는데, 이는 지혜가 모든 면에서 참된 앎에 뒤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참된 앎을 가진 사람들은 원인을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경험자들은 어떤 일이 그러하다는 사실은 알지만, 왜 그러한지는 모르는 데 반해,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왜 그러한지 [까닭]과 그 원인을 알기 때문이다.” [『형이상학』, 1권 1장, 981a24]
여기서도 참된 앎과 기술은 같은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모두 지혜의 원천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혜란 단순한 감각도, 경험도 아니고, 그것을 넘어선 앎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철학이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면, 철학이 추구하는 앎 역시 단순한 경험을 넘어선 어떤 보편적 인식일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과학을 아직 구별하지 않고, 경험을 넘어선 보편적 인식을 지혜라는 말로 묶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라 부르든, 학문이 추구하는 참된 앎은 한 가지 점에서 경험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경험을 통해 우리는 단지 어떤 일이 어떠어떠하다는 사실을 알 뿐, 그것이 왜 그런지 원인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인식이란 우리가 경험한 사실이 왜 그런지 원인을 알 때 비로소 성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앎이라도, 나타나는 현상을 아는 것이 경험이라면, 그 현상의 원인을 아는 것은 인식입니다. 예를 들어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아는 것은 경험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왜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고 동쪽에서 뜨는지 원인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을 아무리 열심히 본다고 하더라도 왜 해가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서 뜨는지 그 이유는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현상, 모든 나타난 사실은 그 사실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신의 이면에 숨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숨어 있는 원인을 묻고 그 까닭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인식의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원인을 아는 인식이야말로 우리가 경험하는 사실에 대한 참된 앎이고 전문적 지식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말했던 사례를 다시 불러온다면, 타이레놀을 통해 코로나를 치유한 사례를 아무리 많이 수집한다 하더라도 타이레놀을 통해 코로나를 치유할 수 있었던 원인을 알지 못하는 한,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한 참된 앎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꾸로 만약 타이레놀이 코로나를 치유할 수 있는 까닭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직접 경험한 특정한 한 두 경우가 아니라, 동일한 조건 아래 있는 다른 모든 경우에도 같은 사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미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우리는 개별적 경험의 차원을 넘어 보편적 앎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식이 보편적 앎인 까닭은 그것이 원인을 아는 앎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개별적 사실에 대해, 반드시 그럴 수밖에 없는 원인을 앎으로써 동일한 조건 아래 있는 모든 사실을 경험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개별적 경험을 넘어 보편적 통찰에 이르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인식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단순한 경험일 뿐 인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많은 지식을 원인을 따져 묻지 않고 그냥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따져 묻지 않고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이는 그대로 들리는 그대로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면 온갖 해괴한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지구가 평평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런 경우입니다. 우주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시대에 무슨 말이냐 싶겠지만, 온갖 종류의 당나귀들의 서식지인 미국에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당나귀들의 모임까지 있다는군요. 그런 당나귀들에게 우주선에서 찍은 지구의 사진을 보여주면, 그런 건 눈속임이라고 치부한다고 합니다. [나무 위키, <지구평면설>], 하기야 산 속 별장에서 성접대 받는 검사 당나귀의 동영상을 보고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겠다는 다른 검사 당나귀들도 있으니까, 우주선에서 찍은 지구 사진을 보고도 가짜라고 우기는 당나귀들이 딱히 더 멍청하다고 말할 수만도 없겠습니다.
어찌 되었든 아무런 원인이나 근거도 묻지 않고 본 것과 들은 것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우리의 앎은 형식만 앎일 뿐 실제로는 앎이 아니라 근거 없는 믿음이 되고 맙니다. 앎과 믿음이 구별 없이 뒤섞이게 되는 거지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사실들 가운데, 정말로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물으면, 저도 자신있는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평생 읽고 배운 그 많은 앎의 내용을 남김없이 제가 원인이나 근거를 묻고 스스로 확인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훌륭한 학자라도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고 아무리 계몽된 시대라도 후세의 관점에서 보면 우스꽝스런 미신에 사로잡혀 있을 수 있습니다.
갈릴레오는 근대적 과학혁명의 선구자였지만, 중력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그가 오직 접촉을 통해서만 힘이 전달될 수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 원리를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나 갈릴레오가 접촉을 통해서만 힘이 전달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 대단히 어리석은 생각은 아닙니다. 그들이 이렇게 생각한 까닭은, 진공은 무와도 같은데, 하나의 천체가 가진 끌어당기는 힘이 어떻게 무와도 같은 허공을 통해 다른 천체에게 전달될 수 있는지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뉴턴도 중력이라는 원격작용(actio in distans)이 어떻게 가능한지 고민을 하긴 했으나, 일찌감치 묻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끌어당기는 힘이 어떤 조건에 따라 커지고 작아지는지 중력의 수학적 법칙을 확립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이를테면 지구가 일 년 만에 태양 주위를 한 번 도는 것과 달리 목성은 지구보다 태양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12년만에 한번씩 태양 주위를 회전합니다. 해왕성은 더 멀리 있으니 165년에 한 번 태양 주위를 공전합니다. 뉴턴은 그렇게 행성들의 공전주기가 달라지는 까닭을 중력의 법칙을 통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천문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은하계는 중심에서 가까운 곳이든 가장자리이든 공전주기가 같다고 합니다. 천정에 달려있는 커다란 선풍기의 날개가 안쪽이든 끝에서든 똑같이 회전하듯이 은하계의 안쪽 천체와 가장자리의 천체가 마치 하나로 이어진 것처럼 같은 주기로 회전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 천체들은 허공에 떠 있고 그것들은 서로 이어져 있지 않으니 뉴턴의 중력법칙에 따르면 은하계의 가장자리는 안쪽 천체들보다 느린 속도로 돌아야 할 텐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의 과학자들은 궁여지책으로 암흑물질이라는 것을 고안해 내었습니다. 암흑물질이라는 것을 통해 은하계가 선풍기 날개처럼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이 왜 물질일까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도 물질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물질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글쎄 누가 알겠습니까, 먼 훗날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과학을 돌아보면서, ‘물질의 실체는 정신인데 그 시대 사람들은 그저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해서 허구한 날 물질 타령만 했다지 뭡니까’라고 혀를 찰지 어떨지.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하면, 우리는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언제나 진리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계 내에서 인간이 아무리 많은 것을 안다고 자부하더라도 우리가 아는 것은 대부분 피상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피상적인 현상에 사로잡혀 우리는 믿음과 앎을 혼동하면서 살지요. 그런 혼동에서 벗어나 진리를 움켜쥐기 위해 우리는 자연의 신비를 감싸고 있는 휘장을 걷어내고 현상의 원인을 찾아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원인 역시 최종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모자란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의 원인을 알면 두 개의 물음이 생기고 두 개의 물음에 대답하면 더 큰 무지의 어둠이 우리 앞에 열리는 것입니다.
5. 원인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참된 앎이란 과연 무엇입니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인을 아는 것이 참된 앎이라지만 원인은 또 무엇입니까? 사실 이것은 그리 간단히 답할 수 있는 물음이 아닙니다. 원인이 ‘왜?’라는 물음에 대한 일종의 대답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왜?’라고 물을 때 과연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또는 왜라는 물음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는 것이 올바른 대답이 되는 것일까요? 이것은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해는 왜 서쪽에서 뜨지 않고 동쪽에서 뜹니까?’ 우리가 이렇게 물을 때 우리가 기대하는 대답과 ‘3.1운동은 왜 일어났습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가 기대하는 대답은 비슷하기는 하지만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듯 모든 학문이 왜?라고 묻는 것은 비슷하지만, 그 물음의 의미와 대답하는 방식까지 똑같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원인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고대 그리스어에서 원인을 뜻하는 ‘아이티아’(αἰτία/aitia)라는 낱말은 원래 법정용어입니다. 그것은 어떤 범죄적 행위의 행위자, 즉 범인을 뜻하는 말 ‘아이티오스’(aitios)에서 온 낱말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 낱말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지우고 넓은 의미의 자연 현상까지 포함해서 모든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가리키는 뜻으로 ‘아이티아’라는 낱말을 사용했습니다. 현상적으로 일어난 모든 사실은 어떤 행위의 결과와도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현상에서 보는 것은 결과로 일어난 사실일 뿐, 그 결과를 유발한 행위 자체는 아닙니다. 결과로서 일어난 사실을 유발한 원인은 사실 너머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범죄적 행위의 행위자가 있듯이, 모든 자연 현상에도 그 현상을 낳은 일종의 행위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같은 것을 비인격적으로 표현하자면 작용자라고 불러도 되겠습니다. 어떻게 표현하든 어떤 결과적 현상이나 사실을 낳은, 감추어진 인격적 행위와 비인격적 작용을 통틀어 그리스인들은 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학문적 인식은 그렇게 감추어진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원인과 거의 같은 뜻으로 ‘근원’이라는 말도 즐겨 썼습니다. 근원이란 그리스어로는 ‘아르케’(ἀρχή/arche)라고 하는데, 이 낱말은 처음 또는 시작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입니다. 무릇 사람들 사이에 처음 난 것은 나중에 생긴 것에 비해 우선권을 지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르케는 지배 권력 또는 통치권의 의미도 가진 말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낱말을 원인과 함께 최초의 근거라는 의미로 사용했습니다. 이처럼 근거라는 의미의 아르케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생겨나고 존재하고 또 인식되는 첫 번째 출처”라고 정의했습니다. [『형이상학』, 5권 1장, 1013a18] 어떤 사실이 어디서부터 생겨나고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 최초의 출처를 안다면, 이를 통해 우리는 또한 그것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의미의 근원도 원인도 한 가지 방식으로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원인도 근거도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의자가 하나 있다고 합시다.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이 생겨나고 존재하고 또 인식되는 첫 번째 출처”라는 의미에서 그 의자의 근원은 때로는 의자의 재료나 부품을 의미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의자 자체 속에 내재한 원소를 의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때로는 의자를 만든 제작자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그 제작자의 머리속에 있는 목적이나 의도 또는 설계도를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의자를 생겨나고 존재하게 만들어 준 최초의 출처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인이든 근원이든, ‘왜?’라는 물음에 대해 한 가지로 정해진 답은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같은 원인이라도 더 나아가 시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리스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난 까닭을 표현하기 위해 ‘아이티아’와 ‘아르케’ 즉 원인과 근원이라는 말 외에 ‘로고스’(λόγος/logos)라는 말도 사용했습니다. ‘로곤 디도나이’(λόγον διδόναι/logon didonai)라는 어구가 근거를 제시한다는 뜻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만, 여기서 ‘로곤’은 ‘로고스’의 목적격이고 ‘디도나이’는 준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그래서 ‘로곤 디도나이’는 근거를 제시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로고스는 원래 말과 이성을 의미하는 낱말입니다. 그런 로고스가 근거의 의미로 쓰인 것은 근거라는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있고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어떤 현상이나 사건의 이유를 이성이 말로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이성을 통해 어떤 현상이 어디서 시작해서 어떤 경로를 거쳐 어떻게 그런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를 머리 속에서 따라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떤 현상의 원인을 알았을 때 비로소 ‘아하! 그래서 그것이 그렇게 되는구나!’라고 무릎을 치는 것은 그 원인이 이성적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실에 대한 원인이나 근거가 이성이 더이상 추궁해 물어들어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자체로 분명한 것일 때, 이성은 비로소 어떤 것을 온전히 인식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어떤 사실의 원인이 이것이다 저것이다 말한다 하더라도 이성이 납득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원인도 근거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자연 현상의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이 참된 원인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기준은 이성인 것입니다.
이성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정신이 그 현상의 자초지종을 머리 속에서 마치 바둑의 기보를 복기하듯이 반복하고 따라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머리 속에서 따라체험할 수 있는 것은 대개 현실에서도 반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현상의 원인을 아는 사람은 현실에서도 그 현상을 반복할 수 있으니, 원인을 아는 것이 학문적 인식이라면, 같은 현상을 현실에서 재현해내는 것은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식과 기술을 마치 같은 정신의 활동인 것처럼 말하는 이유도 이처럼 학문과 기술이 같은 근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하면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의 원인과 근거가 이성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이 이성적 질서에 따라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는 반대의 상황을 상상해 보면 금세 깨달을 수 있습니다. 17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였던 앙겔루스 실레시우스의 시구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장미는 ‘왜’ 없이 있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핀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목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자기를 보는지 아닌지 묻지 않는다.” [하이데거, 김재철 옮김, 『근거율』, 93쪽]
한 사람이 묻습니다. 장미는 왜 피는가? 그러자 실레시우스가 대답합니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근거에 대한 물음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장미는 ‘왜’ 없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장미가 까닭 없이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왜?’라고 묻는 모든 물음에 이런 식으로 대답한다면, 우리는 아무것에 대해서도 근거를 알아낼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면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는 또 어떻습니까?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솥작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닢이 필라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네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었나보다”
[『미당 시전집 1』, 민음사, 104쪽]
이 시에서 시인은 봄부터 소쩍새가 그렇게 울었던 까닭도,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던 까닭도 그리고 간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내가 잠 못 이룬 까닭도 모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였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시인은 일종의 원인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위하여’라는 말도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목적원인이라고 불렀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국화꽃이 핀 원인이 봄부터 소쩍새가 울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천둥이 먹구름 속에서 운 것이 국화꽃이 피게 된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간밤에 내가 잠 못 이룬 것이 국화꽃을 피운 원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하지만 왜 아닌가요? 아마도 여러분은 그것이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원인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문학적으로 표현하는 것의 차이는 또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우리는 앞서 말한 것에 따라 과학은 어디까지나 로고스를 통해 즉 이성적인 근거를 통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고스는 이성이고 말입니다. 그것은 은유적인 말이 아니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말입니다. 여기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말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경우에 반드시 타당한 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국화 옆에서』가 표현하는 원인은 그런 말을 통해 제시된 것은 아닙니다. 만약 간밤에 무서리가 내리고 내게 잠도 오지 않았던 것이 국화 꽃잎이 피는 사실에 대한 이성적 원인이나 근거라면, 원인과 결과의 연관성을 이성적으로 납득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국화꽃이 피는 것과 나의 불면 사이에는 우리가 이성적으로 따라체험하고 반복할 수 있는 그런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재미삼아 바꾸어 말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태풍이 불고
나는 잠을 잘 잤나 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자연 현상에 대하여 그것이 왜 그런지를 이성적으로 물을 수 있고 또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원칙적으로 자연 현상의 많은 근거들을 이성적으로 밝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자연 현상을 낳은 원인이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연의 인과관계를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까닭은 자연의 질서와 원리가 원칙적으로 정신의 질서 및 원리와 상응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응은 또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일까요? 인간이 무엇이기에 자연이 생각의 질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까요? 이것은 또 다른 물음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이 물음에 더 깊이 들어갈 수는 없으니, 이성과 자연 또는 생각과 존재의 합일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고찰할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과 이성이 원칙적으로 상응한다고 해서 자연이 자신의 신비를 언제나 이성에게 직접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원인이든 근원이든 아니면 근거든지 간에, 우리가 그런 것을 묻는 까닭은 어떤 자연 현상이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그 현상 자신이 직접 알려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현상은 자신의 근원을 자기 속에 또는 자기 뒤에 숨기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그랬지요. “자연은 자기를 숨기는 것을 좋아한다.”[김인곤 외,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 235쪽.] 인간은 그렇게 자연이 숨겨 놓은 원인을 찾아냅니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다행히 그 숨어 있는 원인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현상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원인을 이성적으로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현상 이면의 보이지 않는 원인과 근거를 찾는 것, 그것이 바로 학문적 인식의 일입니다.
6. 배움의 기쁨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인식을 가리켜 ‘에피스테메’(ἐπιστήμη/episteme)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이란 그런 ‘에피스테메’, 즉 원인을 아는 앎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의 단계에서 비로소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를 나누는 징표는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의 유무에 있다”고 합니다. [『형이상학』, 1권 1장, 981b7] 그런데 단순한 경험만으로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으니 가르칠 수도 없습니다. 당연히 배울 수도 없지요. 그러나 어떤 현상의 원인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그 현상이 왜 그런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은 그런 설명을 통해 사실의 드러난 현상만이 아니라 그 이치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도 말했듯이 “배운다는 것은, 비단 철학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최고의 즐거움”입니다. [천병희 옮김, 『시학』, 제4장, 1448b5] 마치 매일 좁은 골목길에서 부대끼며 살던 사람이 높은 산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볼 때 기쁨을 느끼듯이, 우리는 일차원적인 경험으로부터 경험된 사실의 원인을 알고 또 개별적인 현상으로부터 같은 종류의 모든 현상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보편적으로 인식할 때 기쁨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 기쁨은 감각이 주는 기쁨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감각은 경험의 원천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로서는 인식도, 지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감각들 가운데 아무것도 지혜라고 여기지 않는다. 개별적 사실들에 대해서라면, 감각이 가장 주도적인 앎이라고 해야겠지만, 감각은 그 어떤 사실에 대해서도 그것이 왜 그런지를 말해주지 않는다.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예컨대 왜 불이 뜨거운지가 아니라, 뜨겁다는 사실뿐이다.” [『형이상학』, I-1, 981b10]
이처럼 감각이 원인을 알려주지 않으니, 우리가 원인을 아는 인식과 그런 인식을 배울 때 느끼는 기쁨이 감각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필경 어떤 정신의 활동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기쁨일 것입니다. 사람은 감각을 통해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신체적 활동을 통해 기쁨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건 누구라도 잘 아는 일입니다. 봄날 피어나는 흐드러진 꽃을 볼 때,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즐겁습니다. 운동장에서 땀 흘리며 공을 찰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감각의 유희는 아무런 노력 없이도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 신체의 활동은 그에 비하면 고된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우리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힘들여 이 산 저 산 오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식이 주는 기쁨은 단순한 감각의 기쁨도 아니고 육체적 활동이 주는 기쁨과도 다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곳에서 이론적 인식이 감각이나 육체적 활동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지속적인 기쁨을 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에게만 온전히 허락된 완전한 기쁨으로서 인간의 참된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런 인식을 ‘테오리아’(θεωρία/theoria)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이론’(theory)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이 낱말의 원래 뜻은 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뜻에서 테오리아를 ‘관조’(觀照, contemplation)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이 기쁨을 주듯이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도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그것이 배움의 기쁨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기쁨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가면 으레 ‘보물찾기’를 하고 놀았습니다. 선생님들이 소풍 장소에 미리 가서 쪽지 같은 것을 바위틈에 숨겨 놓고 학생들이 그걸 찾아오면 연필이나 공책 같은 상품을 주셨지요. 그땐 풀섶에 숨은 보물을 찾겠노라 여기저기 뒤지면서도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자연의 신비를 탐구하는 과학자들의 마음도 그런 것일까요? 그렇게 인간은 자기를 드러내면서도 감추는 자연과 숨바꼭질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감추어진 자연의 신비를 찾아냈을 때, 우리는 풀섶에 감추어진 보물을 발견한 어린아이처럼 기쁨을 느끼는 것일까요? 무심한 기계는 주는 것을 받기만 할 뿐, 애써 알려고 하지도 않고, 질문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왜?라고 묻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갈망이, 어떤 동경이 우리로 하여금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 왜?라고 묻게 하는 것일까요? 그 물음 속에서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보고 싶어 하는 것, 찾고 싶어하는 것, 또는 만나고 싶어하는 마지막 근원이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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