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100년 맞아 다시 소환되는 위대한 지도자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영화 ‘길위에 김대중’을 봤다. 김대중(DJ) 대통령이 일제 강점기와 해방, 군정, 전쟁, 분단, 군사독재의 시대를 살면서 얼마나 의롭고 바르고 당당한 길을 걸었는지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DJ는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DJ는 분단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DJ는 민족사상 첫 노벨상을 수상했다. 영화 ‘길위에 김대중’은 국민을 사랑하고 역사를 믿었던 한 위대한 지도자가 시커먼 흙탕물 속에서 어떻게 화려한 꽃을 피워 올렸는지를 그리고 있다.
탄생 100년 맞아 다시 소환되는 위대한 지도자
DJ가 다시 소환되고 있다. DJ 탄생 100년을 맞아 그 삶을 돌아보는 영화와 연극, 뮤지컬, 강연, 학술세미나 등이 쏟아지고 있다. 한 평생 민주주의와 남북화해와 세계평화를 위해 헌신했던 거인의 발자취를 여기저기서 조명하고 있다. 총선 출사표를 던지는 정치인들도 여야 할 것 없이 ‘DJ정신’을 내세우고 있다.
왜 다시 DJ인가? 생전에 DJ께서 걱정했던 민주주의의 위기와 남북관계의 위기, 서민경제의 위기가 다시 닥쳤기 때문이다. 며칠 전 고양 킨텍스에서 열린 DJ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과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김진표 국회의장, 문희상 전 국회의장 등은 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닥친 위기를 걱정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특히 강도 높은 어조로 윤석열 정부를 직격했다.
"민주주의는 다시 위태롭고, 국민 경제와 민생이 날로 어려워지고 있다. 얼어붙은 남북관계와 국제질서 속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이 한층 격화되고 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적대와 보복의 정치, 극도로 편협한 이념의 정치로 국민통합도 더욱 멀어졌다.”
점점 위기가 깊어지고 있다. 정치 검사들이 대통령직과 여당 대표와 정보·사정 기관과 핵심 공직들을 장악했다. 전·현직 야당 대표들이 수백 번 압수수색을 당하고, 전 야당 대표는 구속까지 됐다. 노동계와 언론계와 시민운동단체 등 정부 비판세력에 대한 탄압의 강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친재벌 경제정책으로 서민과 자영업자와 청년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 신냉전 대북정책은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세상이 DJ를 소환하고, DJ를 배우려고 하는 이유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우리는 DJ로부터 어떤 덕목들을 배워야 하는가?
DJ에게서 배워야 할 덕목들, 용기·사랑·지혜·양심
첫째, DJ의 용기를 배워야 한다. DJ는 어떠한 협박과 음모와 회유에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가시밭길을 자청했다. 그는 “내가 감옥 가야만 충격을 줘서 민주화 열기를 다시 일으키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구속됐던 DJ는 그해 12월20일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외쳤다.
“폭력으로 현 정부의 독재를 앗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비폭력으로 가되, 투쟁을 해서 감옥으로 들어가자. 3천 5백만 국민의 1할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일부 35만, 3만 5천. 이 1000분의 1만 감옥 갈 각오한다라면 우리는 이 정부를 반성시켜 가지고 능히 우리의 목적을 평화적으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영화 ‘길위에 대통령’)
정치인들은 묵은 캐비닛 파일을 뒤적거리는 검찰에 당당히 맞서야 한다. 언론인들은 ‘조자룡 헌 칼’처럼 남발되는 압수수색에 주눅들지 말고 정론과 직필을 지켜야 한다. 기업인들은 떡볶이 먹방이나 술자리 들러리 초대는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한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제 본연의 자리를 지키는 용기만 있어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되찾을 수 있다.
둘째, DJ의 사랑을 배워야 한다. DJ는 기초생활보장제 도입과 4대 사회보험의 완성과 여성부 신설 등 서민과 약자를 보살피는 정책을 대거 도입했다. 국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지도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DJ는 “복지는 시혜가 아니라 인권”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민들이 먹고사는 것을 챙겨야 하지만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국가와 사회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걱정해 주고 있다. 우리를 옆에서 지켜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을 느끼도록 해 줘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이 사회에서 아직도 쓸모 있는 사람이다. 나도 무언가 공헌하고 싶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김대중 자서전)
우리 정치에 민생이 사라진 지 오래다. 국민들은 소득 감소와 고물가와 고금리로 고통을 겪고 있다. 정부는 법인세 인하와 주식양도세 및 금융투자소득세 폐지 등 친기업·친자본 편향을 가속화하고 있다. 역대급 세수 펑크와 함께 복지는 쪼그라들고 있다. 복지는 정부의 시혜가 아니라 국민의 권리다. 다수당인 야당이 민생 법안들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 시민단체들은 조직적인 연대로 정부에 민생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 국민을 사랑하면 정책이 보이고, 민생을 걱정하면 행동을 할 수 있다.
무슨 문제의식을 가졌는지 짐작도 못할 윤석열 정부
셋째, DJ의 지혜를 배워야 한다. DJ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지혜를 강조하고 또 실천했다. 노사를 설득하고 IMF와 협상하면서 국가부도 외환위기를 1년 반 만에 극복했다.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으로 과거사를 직시하면서도 공생의 미래를 열 수 있는 해법을 제시했다. 한미동맹의 기조를 강화하면서도 남북화해를 도모한 햇볕정책으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개선시켰다. 그는 이희호 여사에게 보낸 옥중서신에 이렇게 적었다.
“내가 6대 국회의원이 되고서 신문에 ‘우리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아울러 갖추어야 한다’고 말해서 자주 보도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느 분야에서나 성공하려면 서생과 같이 양 발을 원칙 위에 확고하게 딛고, 상인과 같이 양손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두 가지의 조화로운 발전을 기해야 합니다.”(옥중서신 1981년 6월 23일자)
윤석열 정부의 문제는 어떤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는지조차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지난해엔 “제일 중요한 게 이념”이라고 했다가, 몇 달 뒤 “이념논쟁 멈추고 민생에 집중” 하자고 하더니, 올 신년사에선 "이권과 이념에 기반한 패거리 카르텔과 싸워야 한다"고 말을 바꿨다.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 영업사원 1호’를 자처하면서도 상인적 현실감각은 젬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부산 엑스포 유치전에서 사우디에 119대 29라는 역대급 참패를 당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런 무지·무능의 윤석열 정권이 앞으로 3년 이상이나 임기를 남겨놓고 있다. 나라와 국민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그 지혜를 찾아야 할 시점이다.
무수한 악의 속삭임 뿌리쳤던 ‘행동하는 양심’
넷째, DJ의 양심을 배워야 한다. ‘행동하는 양심’은 DJ 인생의 나침반이었다. DJ의 양심은 하느님이었다. DJ의 나침반은 국민이었다. DJ는 자서전에서 “일생동안 악의 속삭임에 무수히 흔들렸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하느님과 국민들을 배반할 수 없었다”고 썼다. DJ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통령직 제안을 뿌리쳤고, 신군부의 “대통령직만 빼고 어떤 자리라도 드리겠다”는 회유도 거절했다. 여러 차례 변절의 꽃 길을 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물리쳤다. 대신 양심에 따라 죽음마저 불사하는 형극의 길을 택했다. DJ는 박정희 정권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행동하는 양심’을 외쳤다. 영화 ‘길위에 김대중’은 그 거침없는 사자후를 생생한 육성으로 전한다.
“떳떳이 나와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싸우고, 떳떳이 나오기가 어려운 여건에 있는 사람들은 익명으로라도 엽서로, 전화로,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을 격려해서 그분들이 좌절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1975년 4월 19일 시국강연회 연설)
‘행동하는 양심’은 당장은 손해를 본다. 유형·무형의 보복이 따른다.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은 경북 예천 폭우 실종자 수색 중 숨진 해병대 채수근 상병 사망 사건을 양심과 원칙에 따라 수사를 하다가 항명으로 재판을 받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심위) 한 직원의 경우 류희림 방심위 위원장이 자신의 가족과 지인 등을 동원해 뉴스타파의 ‘김만배-신학림 녹취록 보도’에 대한 심의를 요청하는 민원을 넣었다는 공익제보를 했다가 되레 경찰의 수사를 받고 있다. 국민이 박정훈 단장과 방심위 공익제보자를 보호해야 한다. 세상의 양심들이 지축을 뒤흔드는 아우성을 쳐야 한다. 의인들이 수난을 당해서는 안 된다.
말로만 “DJ 계승”을 외치는 ‘짝퉁 DJ 계승자’들
아직은 세상이 깜깜하다. 너도나도 “DJ 계승”을 외치지만, DJ의 용기·사랑·지혜·양심을 제대로 따르고 실천하는 지도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DJ가 걸었던 가시밭길 대신 권력으로 향하는 꽃길을 택하는 정치 모리배들이 뻔뻔하게 DJ를 앞세우고 있다. 총선이 가까워지면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짝퉁 DJ 계승자’들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고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메시아 같은 지도자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이미 몇몇 지도자들이 이끌어가는 시대도 아니다. 국민이 DJ의 용기·사랑·지혜·양심을 본받고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DJ가 말년에 국민에게 남긴 당부의 말씀은 특히 되새길 만하다.
“저는 여러분께 말씀드립니다. 자유로운 나라가 되려면 양심을 지키십시오. 진정 평화롭고 정의롭게 사는 나라가 되려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방관하는 것도 악의 편입니다.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고, 벼슬하고, 이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자유로운 민주주의, 정의로운 경제, 남북간 화해 협력을 이룩하는 모든 조건은 우리의 마음에 있는 양심의 소리에 순종해서 표현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선거 때는 나쁜 정당 말고 좋은 정당에 투표해야 하고, 여론조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6.15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양심의 소리에 순종하면 된다. 불의를 만나면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이라도 하라”는 DJ의 말씀을 실천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DJ가 그토록 갈구했던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자유가 들꽃처럼 만발하고, 통일에의 희망이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는 나라”는 반드시 올 것이다.
‘길위에 김대중’을 따르는 ‘길 위에 국민들’이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어차피 주권자는 국민이다. 한겨울 추위에도 촛불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