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상 신한대 객원연구위원
윤영상 신한대 객원연구위원

지난 대선에서 정권교체냐 정치교체냐를 둘러 싼 공방전이 벌어졌다. 정권교체론은 민주당 정권을 다른 당으로 교체하자는 주장이었고,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가 주장했다. 정치교체론은 극한정쟁으로 날을 지새우는 양당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다당제를 도입하자는 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정의당 심상정 후보의 주장이었다. 한마디로 정치판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정권교체론은 선명했는데, 정치교체론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그것을 너무 늦게 제기했고, 심상정 후보는 설득력 있게 주장하지 못했다. 정치교체는 주요 정당들 간의 합의를 강제할 수 있는 여론과 정치적 힘이 형성되어야 가능한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시 정치교체를 위한 주요 제도적 장치들로는 다당제를 활성화시키는 연동형비례대표제, 대통령선거에서의 결선투표제,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등이 거론되었다.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의 당선으로 정권교체론은 성공했고, 정치교체론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양당제 하에서의 정권교체는 이전 정부의 인사 및 주요 정책을 뒤집는 과정을 동반한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성과를 존중해야 할 부분과 수정 변화시켜야 할 부분에 대한 묵시적 합의가 민주적 토대 위에서 작동하느냐이다. 최근 격렬한 정쟁 속에서 과거와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미국은 양당제의 전형적인 국가인데 민주당 바이든 정부가 공화당 트럼프 정부의 대중국정책이나 외교안보정책의 성과들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의원내각제인 영국의 양당제는 양당 간의 극한대결 속에서도 여론의 변화와 국가적 현실을 고려한 책임정치의 특성이 남아 있기에, 리즈 토러스 수상은 취임 45일 만에 조세정책 실패에 대한 비판여론 속에서 낙마하였다.

반면 한국의 양당제는 그렇지 못했다. 정권 장악을 위한 양당 간의 극한대결은 정권교체 이후에도 계속되고, 이전 정부의 성과는 여지없이 파괴되고 훼손되는 것을 당연시 한다. 힘들게 만들어 냈던 민주화의 성과들조차 훼손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외교안보정책만이 아니라 경제와 노동, 일자리와 복지, 교육과 인권정책 등이 바뀌는 과정은 그것을 너무 잘 보여주었다. 역사적 성과를 지키고 민주적 가치를 보존해 왔던 것은 정당들 간의 합의보다는 다양한 시민들의 분노가 광장에서 표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명박 정부 때와 동일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주요 국가정책이 수정되거나 뒤집어지고 있고,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 자살로 이어졌던 검찰 수사 역시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민주당대표를 겨냥해 더 강하고 집요하게 진행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이명박 대통령과 다른 윤석열 대통령의 개인적 특성이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고, 검찰권력이 검찰만이 아니라 대통령실, 국가정보원, 국방부와 경찰 등에까지 아주 폭넓게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실상 검찰공화국이 만들어졌다는 것일 뿐이다.

윤석열 정부의 인사정책, 주요 국가정책은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 같은 보수정권이었던 이명박-박근혜 정권보다 더 사적인 인연이 강조되었고, 정권 내부의 검증절차도 무시되곤 했다. 국회 인사청문회 결과나 국민 여론은 특별한 경우에만 보여주기 식으로 반영될 뿐이었다. 오랜 논란과 검증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왔던 국가기관들의 작동원리가 무시되는 것도 다반사로 확인되고 있다. 또 시장의 경쟁논리가 갖는 약점을 보완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정책들도 대부분 수정되거나 뒤집어지고 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한 대북정책과 외교정책들도 편가르기와 대결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인구 5000만 명이 넘고, 무역규모 세계 9위인 국가를 마치 사장이 전권을 갖고 있는 작은 회사처럼 운영하는 듯한 모습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권의 운명만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바로 그런 분위기 속에서 158명의 안타까운 희생자와 196명의 부상자를 낳은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용산구청과 서울시청, 경찰청과 행정안전부가 조금만 주의했더라면 발생하지 않았을 참사였다. 국가의 존재와 기능이 어느 순간 작동이 정지되면서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참사 발생 후 벌어졌던 상황들은 한국 정치의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윤석열 정부와 국힘은 이태원 참사가 세월호 참사처럼 부각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책임 떠넘기기, 꼬리 자르기, 추모 분위기 통제에 나섰고,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참사를 정쟁에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프레임에 묶여 스스로 입과 발에 재갈을 물리는 것을 당연시했다. 행정안전부 장관의 무도한 발언들과 외신기자들 앞에서 드러난 총리의 어이없는 농담, 국회를 무시하는 대통령실 수석들의 말장난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오만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슈를 이슈로 덮는다는 정치공학은 국가애도기간 종결과 더불어 곧바로 현실화되었다. 대통령의 해외 방문과 취재 논란,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대응, 문재인 정부와 이재명 대표에 대한 검찰수사 본격화 등은 다양한 이슈와 쟁점들을 쏟아냈다. 이런 상황에서 참사를 정치화하고 있는 윤석열 정부를 가장 신랄하게 비판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야당들이 아니라 여당 내의 유승민이었다.

뒤늦게 참사의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민주당의 국정조사 요구와 서명운동, 시민언론 민들레의 희생자 명단 공개는 여지없이 ‘참사를 정치화’한다는 프레임 속에서 공격당했다.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는 위기를 벗어났고, 민주당은 참사를 효과적으로 정치화한 윤석열 정부의 조력자로 전락했다. 정의당 역시 1명의 국회의원을 보유한 기본소득당보다 못한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다. 이태원 참사는 적과 동지의 구별, 선과 악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한국 정치판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 개이고 늑대인가?

시민들의 분노가 광장으로 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그것 외엔 표출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윤석열정부를 악마화하고, 윤석열의 발언과 김건희의 행동 하나하나가 희화화되고 조롱당한다. 그렇지만 광장에 나가지 않으면서 분노를 삼키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들이 하나가 된다면 그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 될 것이다.

문제는 시민들이 아니라 정당과 국회의원들이다. 그들은 일반 시민들과 달리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을 상대할 수 있는 많은 수단과 도구들을 갖고 있다. 그들은 윤석열 정부와 주요 언론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프레임을 해체하고 정치가 담당해야 할 본연의 역할과 자세를 부각시키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167석의 거대 야당인 민주당과 비록 6석이지만 의회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정의당 의원들의 소극적 태도는 안타깝다. 개개인이 헌법기관인 그들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민주당과 정의당이라는 두 개의 틀에 갇혀 전혀 개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런 상황은 이미 윤석열 정부 출범 직후부터 나타나고 있었다. 야당의 공간이었던 인사청문회와 국정감사장은 무능력하고 준비 안 된 야당 국회의원들로 가득 채워졌다. 그들은 호통을 치고 고함을 질렀지만 국민의힘 지지자들이나 보수언론에 의해 조롱당하는 수준이었다. 때리면 때릴수록 존재감이 커진다는 한동훈 장관은 이제 국민의힘 당대표 차출 대상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것을 누가 만들어 주었는가. 지하에 있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노회찬 의원이 곡(哭)을 할 일이다.

정치판을 바꾸어야 한다. 시민들은 이미 곳곳에서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국회와 정당들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들이 바뀌어야 한다. 극한대결로 날을 지새우고 있는 양당정치의 늪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정쟁이 불가피하다 하더라도 국민들의 삶과 이익의 문제를 대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와 유족들은 바로 그것을 원한다. 혐오스럽고 퇴행적인 정치판을 바꾸고 국민들의 여론과 요구에 민감한 새로운 정치를 구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치교체다. 어렵게 합의된 이태원 참사에 대한 국정조사가 그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쟁을 넘어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하면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대책을 만들어 내는 공간으로 자리매김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정치교체는 특정 세력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포함된 정치제도와 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진영화되어 있는 정당들 내부의 토론이 활성화되는 것이 그 시작일 수 있다. 국회와 언론이 거대정당과 군소정당, 국민들이 참여하는 공론장이 될 수 있다면 아마도 정치교체는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힘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 87년 민주헌법의 탄생과정도 여러 세력의 합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도 국민의힘 내부의 동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정치교체의 현실적 과정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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