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저항이 다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보수적 저항도 있고, 진보적 저항도 있다. 차이를 넘어 널리 퍼지는 저항도 있고, 집단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저항도 있다. 윤석열 정부의 독선과 횡포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안팎으로 가득하지만, 서로 소통하거나 수렴되지 못하고 있다.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민주당의 소통능력 부재가 한몫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소화된 정의당의 갈지자 행보도 한몫하고 있는 것 같다. 윤석열 정부의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그렇지만 진보정치의 위기는 민주당이나 정의당의 위기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정권을 빼앗긴 민주당의 위기는 언젠가 정권을 되찾아 오면서 극복될 수 있다. 박근혜 탄핵 이후 5년 만에 보수세력들이 정권을 되찾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정권교체를 위해 몸과 영혼마저 비워낼 수 있었던 국민의힘 정치인들과 지지자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그들이 성인군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몸과 영혼까지 바치겠다는 그들의 분노와 복수심 때문이다. 한국적 양당제는 그것을 위한 가장 강력한 자양분이었고, 문재인 정부에 의해 임명되었으나 문재인 정부와 충돌하면서 몸집을 불린 검사 윤석열을 자신들의 얼굴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국민의힘의 유연성 때문이었다. 만약 민주당이 그런 유연성을 갖고 있다면 5년 내에 민주당은 권력을 되찾아 올 수 있을 것이다. 민주당의 위기극복 방안이다. 아마 그렇지 못하다면 민주당은 그럴 능력을 갖출 때까지 권력을 되찾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이 권력정치의 속성이다.
그러나 민주당이 살아난다고 해서 민주당의 진보정치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윤석열 정부가 등장했다고 해서 보수정치의 가치와 전망이 실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맥락이다. 민주당의 진보정치는 민주당식 진보가 무엇이냐에 대해 답을 해야 하고, 권력정치를 넘어 진보적 가치와 정책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노력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식 진보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노무현식 진보는 토니 블레어나 클린턴식의 진보와 비슷하다.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안 드림’의 한국적 구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민주당은 그런 의미의 진보정치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미국의 민주당처럼 샌더스와 같은 민주적 사회주의자까지 영입하는 방식으로 민주당식 진보의 길을 넓혀 나갈 수 있는가? 소위 586 정치인의 위기는 바로 그런 전망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본다.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는 스스로를 합리적이고 유연한 진보라고 규정했다. 또 그런 의미에서 상당한 성과도 이루어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심지어 유권자 다수가 문재인 정부 심판론에 동의할 정도의 심각한 정책실패도 만들어 냈다. 민주당의 많은 정치인, 정책연구자들이 문재인 정부의 정책실패를 진보의 무능력, 진보적 가치와 정책의 한계로 진단하고 진보적 가치와 정책을 버리고 우경화의 길을 제시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책의 현실타당성과 유능함을 실현하는 것은 진보적 가치와 정책을 발전시키는 것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나는 소득주도성장정책이 실패한 것은 정책의 현실파급효과, 다른 정책들과의 조율문제 등을 고려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하지 소득주도성장정책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는다. 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정책이 많은 논란을 야기한 것이 그 취지와 방향이 잘못된 것이라기 보다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와 임금체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성과주의식으로 집행된 결과라고 본다. 다시 말해 비정규직을 축소하는 정책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을 완전히 철폐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또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하는 문제와 비정규직의 처우개선을 이끌어 내는 문제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 언제까지 몇%라는 식으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민주당 내에서 바로 이런 문제를 둘러싼 토론장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당 안에는 자유주의적 보수경향, 사회적 자유주의, 민족주의적 진보, 사회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념적 지향과 가치들이 뒤섞여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것을 특정한 하나의 이념과 가치로 통일시켜야 한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민주적인 것이 아니다. 문제는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는 가운데 그것을 생산적 차이로 만들어내는 공론장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이념과 가치, 정책의 현실타당성을 둘러싼 공론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은 의원실, 정책위원회, 민주정책연구원으로 이어지는 소통의 메카니즘이 권력정치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이다. 정책과 정치적 입장을 둘러싼 토론의 과정과 정치적 입장의 선택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민주당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재명 당대표도 그런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민주당식 진보정치도 위기인 것이다. 지금 그것은 민주당의 위기, 이재명의 위기와 동시에 나타나고 있지만 어느 순간 분리될 수도 있다. 나의 관심은 과연 민주당식 진보정치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느냐에 있다.
정의당도 마찬가지다. 정의당이라는 집단의 위기가 진보정치의 위기일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현재 정의당은 정당으로서 존립 위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진보정치의 대표주자라는 위상의 위기이기도 하다. 정의당이라는 정당은 진보적 정체성을 떠나 한국정치에서 생존할 수도 있다. 제3지대정당, 중도정당으로 환골탈태한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다. 아마 그럴려면 국민의힘이 그랬듯이 몸과 영혼을 다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정의당은 그럴 수가 없다. 민주당에 대한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쳐 유연한 진보, 유연한 연합정치를 말하는 사람들마저 전부 민주당 2중대, 민주당 세작으로 몰아 추방하거나 떠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렇다고 이념적 순수성과 독자성, 변혁성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도 이미 그것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그들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다. 과연 무엇을 위해서 그들은 그런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가? 나는 많은 정의당 사람들이 이런 정의당의 문제를 심상정 의원의 문제로 설명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상정 의원을 포함한 반성하지 않는 정파의 담합구조가 그것을 만들어 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정의당의 이해할 수 없는 고슴도치 문화 때문에 정의당의 미래는 어둡다. 아마도 내년 총선에서 정의당이라는 이름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운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위기는 다르다. 진보정치의 위기가 무엇이고, 그 극복의 방향과 방법이 무엇이냐에 대한 공감과 합의가 이루어지는 순간, 진보정치의 위기는 정의당의 위기를 넘어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무엇이 진보이고, 그 진보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어떤 내용과 방식으로 어디까지 연합할 것이냐에 대한 생각이 분명해지는 순간 정의당의 고질적 문제와 한계가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정의당이라는 존재는 사라지겠지만 진보정치의 위기를 극복할 새로운 정치적 발판을 만드는 것이 잠시나마 가능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국민의힘과 윤석열 정부에 반대하면서도 민주당식 진영논리에 갇혀 있지 않은 다수의 진보개혁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다면 새로운 진보정당의 미래가 열릴는지도 모른다. 그와는 달리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협력을 기반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차이를 뛰어 넘는 노동정치의 새로운 발전을 이루어 내는 것도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진보진영의 이념적 다양성과 정책적, 정치적 판단의 차이를 녹여낼 수 있는 정치적 조율능력이 없다면 진보정당의 미래는 밝지 않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을 지지한 진보층과 그렇지 않은 진보층의 통합을 이끌어 낼 정도의 정치적 구심력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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