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형 전업농부·작가
김혜형 전업농부·작가

입추 전에 논매기를 마치다

“논매기 끝!”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며 그가 외친다. 머리카락과 옷은 땀에 젖어 흥건하고 바짓가랑이는 논흙 범벅인데도 표정은 희색만면이다. 입추 전에, 벼꽃 피기 전에, 드디어 논매기를 마친 것이다.

작년엔 논매기를 다 마치지도 못했는데 벼꽃이 피어버렸다. 여름 내내 논에서 살다시피 했음에도 그랬다. 벼꽃이 피면 농부는 논에 들어가지 않는다. 벼꽃의 꽃가루가 떨어질까 염려해서다. 김매기를 벼꽃 피기 전에 어떻게든 끝내려고 애쓰는 이유다.

 

모내기 후 물을 깊게 댄 논.
모내기 후 물을 깊게 댄 논.

올해 김매기는 작년보다 훨씬 수월했다. 풀 매는 고생이 반 이상 줄어든 건 모내기 후 한 달 가까이 논물을 깊게 댄 덕이다. 본래 모내기 후 1주일은 물을 깊게 대고 그 후엔 얕게 대는 것이 정석이다. 모내기 직후 물을 깊이 대는 건 모 뿌리의 활착을 돕고 잎의 과도한 증산을 막기 위해서고, 다음에 물을 얕게 대는 건 일교차에 따른 낮밤의 수온 차가 커야 분얼(모포기가 늘어남)이 잘되고 모가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시기에도 물을 깊이 대야만 했다. 제초제를 치지 않고 풀을 억제하자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물을 깊이 댔더니 풀이 많이 줄었다.
물을 깊이 댔더니 풀이 많이 줄었다.

비록 농사의 정석을 따르진 못했지만 ‘물 깊이 대기’로 풀의 억제 효과를 톡톡히 봤다. 물을 깊게 댔더니 잡초의 발아와 생장이 억제되고 우렁이의 활동 영역이 커졌다. 본래 풀이 많지 않던 논은 올해 풀이 거의 자취를 감췄고, 해마다 풀이 극성스럽던 논은 올해도 풀이 솟긴 했지만 예년만큼 심하진 않았다. ‘풀 관리의 핵심은 물 관리’임을 절실히 체감했다. 다만, 깊은 물에 잠겨 죽은 모가 많아 그 빈자리를 뜬모하기(모의 빈자리를 손으로 일일이 때우는 것)로 메꾸는 데 상당 시간을 투여했다. (6월에 올린 글 <긴꼬리투구새우를 위하여> 참조)

 

논에 나는 올챙이고랭이 풀.
논에 나는 올챙이고랭이 풀.

흩어져 있는 여러 논배미(논두렁으로 둘러싸인 한 구역의 논)를 돌며 농사짓다 보니 논마다 특성이 조금씩 다른 게 보인다. 어떤 논은 풀이 적고 어떤 논은 풀이 극심하며, 어떤 논은 알곡이 충실하고 어떤 논은 알곡이 빈약하다. 어떤 논은 투구새우가 많고 어떤 논은 풍년새우가 많으며, 어떤 논은 물달개비가 많고 어떤 논은 올챙이고랭이(사초과의 여러해살이풀)가 많다. 논의 개별 서사, 예컨대 토양의 질, 축적된 거름기, 물 대기의 용이성, 논 주인의 농사법, 대를 이어온 풀씨, 수서생물의 생태계 같은 것이 각 논의 특성을 이루어 왔을 것으로 짐작한다.

 

논다매로 풀을 밀고 있다.
논다매로 풀을 밀고 있다.

우리가 짓는 논 아홉 배미 중 풀이 심한 논은 네 배미다. 그 중 한 배미에 올챙이고랭이가 유독 많다. 청둥오리가 논둑에 둥지를 틀었던 그 논이다. 물을 깊게 댔음에도 올챙이고랭이는 굴하지 않고 올라왔다. 초반에 제압하지 않으면 나중엔 ‘논다매’(예초기에 달아서 쓰는 논 제초날)로든 손으로든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논다매를 장착한 예초기를 매고 논에 들어가니 청둥오리 한 쌍이 파드득 날아서 달아난다. 포란을 방해한 게 마음에 걸려 예초 작업 마친 후 한동안 그 논에 가지 않았다. 나중에 논물 보러 가니 앙증맞은 새끼 오리들이 어미 오리를 따라 벼포기 사이를 옹기종기 헤엄치고 있었다. 휴대전화를 차에 두고 내려 사진을 찍지 못한 게 아쉽다.

중간물떼기 전 이삭거름을 뿌리다

6월 하순부터 시작된 장마가 7월 26일에야 끝났다. 평년 2배의 누적 강수량을 기록할 정도로 많은 비가 내렸다. ‘중간물떼기’(논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논을 말리는 것)를 보통 모내기 후 30~40일경에 하는데, 우리는 6월 10~11일에 모내기를 한지라 중간물떼기 시기가 장마 한복판에 걸린다. 물꼬를 터서 물을 빼도 장맛비에 논 마를 새가 없다. 게다가 장마 중에도 짬짬이 김매기를 해야 하니, 중간물떼기는 장마 이후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모내기 시기는 지역과 품종에 따라 다르다. 중부지방은 5월 중하순에, 남부지방은 6월 초중순에 모내기를 한다. 품종으론 조생종이 중만생종보다 모내기 시기가 빠르다.)

 

아들은 손으로, 아빠는 논다매로 김매기를 하고 있다.
아들은 손으로, 아빠는 논다매로 김매기를 하고 있다.

장마가 지나자 폭염이 시작됐다. 아홉 배미 중 여덟 배미는 김매기를 마쳤고, 마지막 한 배미가 남았다. 멀리 사는 아들이 휴가 중에 내려와 일손을 도왔다. 모자를 쓰고 팔토시를 끼었지만 작열하는 햇볕이 너무 뜨겁다. 지글지글 살이 익을 것 같은 폭염 속, 드넓은 들판에 사람이라곤 우리 셋뿐이다.

 

물옥잠 꽃.
물옥잠 꽃.

직선으로 밀고 가는 논다매는 모포기 사이의 풀까지는 없애지 못한다. 사이사이 난 풀은 손으로 매줘야 한다. 여뀌, 물질경이, 물옥잠, 물달개비, 방동사니, 올챙이고랭이, 여뀌바늘… 종류별로 풀이 많기도 하다. 풀 매면서 풀 공부를 한다. 잘 모르는 풀은 사진 찍어뒀다 나중에 찾아본다. ‘앎의 욕구’와 ‘기록 본능’을 타고났다. 김매는 와중에도 꽃이 보인다. 물옥잠과 물질경이 꽃이 군데군데 피었다. 작고 예쁜 꽃이다. 수면의 개구리밥 틈에 어린 참개구리가 숨어 있다. 벼잎에 앉은 물자라도 봤다.

​김매기를 다 마쳤다. 물질경이와 여뀌가 좀 남았지만 수확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다. 잘 자란 벼가 논바닥에 그늘을 만드니 작고 낮은 풀들은 쇠잔해질 것이다. 7월 하순에 김매기를 끝내다니 꿈만 같다.

 

개구리밥을 등에 얹고 벼잎에 앉은 물자라.
개구리밥을 등에 얹고 벼잎에 앉은 물자라.

물 떼기 전에 이삭거름을 준다. 벼 줄기 안에서 어린 이삭이 생길 무렵, 벼는 영양생장기에서 생식생장기로 들어선다. 이때 양분이 부족하지 않도록 주는 것이 이삭거름이다. 이삭거름을 주는 시기는 벼의 품종과 생육 상태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벼꽃 피기 25~15일 전이다. 이삭거름을 너무 일찍 주면 벼 줄기가 길어져 비바람에 쓰러질 위험이 높고 벼알도 많이 맺혀 부실한 쭉정이가 많아진다. 반면 너무 늦게 주면 이삭 목과 벼알에 질소 성분이 많아져 이삭도열병에 걸릴 수 있다. 이삭거름을 너무 많이 줘도 안 된다. 단백질 성분이 많아져 쌀 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삭거름을 통에 담아 뿌리고 있다.
이삭거름을 통에 담아 뿌리고 있다.

우리 논은 해마다 8월 중순에 벼꽃이 피는지라 이삭거름은 7월 20일경 준다. 화학비료가 아닌 유기질 비료를 사용하므로 비료 효과가 더딜 것을 예상해 좀 일찍 뿌리는 편이다. 20kg 유기질 비료를 비료살포기 통에 담고 논을 돌며 뿌리는데 통에 담을 수 있는 양이 한정돼 있으니 여러 번 반복해서 뿌려야 한다. 우두두두ㅡ 살포기 소음이 들판에 요란하다.

착한 짐승들의 무심한 발자국

이삭거름이 물에 녹아 논흙에 스며들기를 기다려 논물을 뺀다. 5~10일간 논 표면이 쩍쩍 갈라질 정도로 논을 말리는 ‘중간물떼기’ 과정이다. 중간물떼기를 함으로써 토양의 유해 가스를 배출시키고, 이삭을 못 올리는 헛줄기의 발생을 억제한다. 땅이 마르면 벼 뿌리가 땅속 깊숙이 뻗어내려 거름을 흡수하며, 뿌리가 튼튼해져 가을 태풍에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물을 떼니 논물에 떠다니던 개구리밥이 흙 위로 내려앉았다.
물을 떼니 논물에 떠다니던 개구리밥이 흙 위로 내려앉았다.

논흙이 말라 균열이 생기고, 벼 뿌리가 튼튼해지고, 푸른 볏잎이 힘차게 꼿꼿해진다. 중간물떼기까지 하고 나면 농부의 고단한 농사노동은 일차 마무리된다. 논매기 마치고, 이삭거름 주고, 이 마을 저 마을 아홉 배미 논물까지 다 떼고 나니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다. 논을 한 바퀴 돌아보니 우리 몰래 논을 다녀간 동물들의 흔적이 보인다. 논 가장자리를 사선으로 밟고 지나간 고라니 발자국, 얕은 논둑 모서리를 뭉개고 간 멧돼지 발자국, 우렁이를 찾느라 벼포기 사이를 사뿐사뿐 걸어 다닌 백로 발자국…. 착한 짐승들의 무심한 발자국들이 뭉클하다. 광폭한 인간사에 절망이 깊은 요즘, 투명하고 단순하고 악의 없는 존재들이 고맙다.

 

백로 발자국.
백로 발자국.

이제 입추, 곧 벼꽃이 필 것이다. 벼꽃을 기다리며 꽃물을 댄다. 꽃을 피워 이삭을 영글게 하는 물이라 ‘꽃물’이라 부른다.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벼 줄기 속에서 어린 이삭이 조금씩 머리를 밀어 올리고 있다. 이때가 벼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물이 필요한 시기다. 이삭이 줄기 속에서 만들어지는 초반엔 물을 얕게 대고, 이삭이 줄기 위로 올라오면 물을 깊이 대준다.

 

꽃물을 댄 논.
꽃물을 댄 논.

벼꽃이 피는 것을 ‘이삭이 팬다’고 말한다. 한자로 개화(開花)라 하지 않고 출수(出穗)라 한다. 출수의 ‘수’는 이삭 수(穗)다. ‘꽃보다 이삭’인 것이다. 꽃물을 먹고 핀 작은 벼꽃 한 송이가 미래의 알곡 한 알이다. 번식으로 대를 이어가는 생명살이의 절정이 입추를 앞두고 수천수만 벼포기 속에서 터지고 있다. 그렇게 벼는 대를 잇고 우리는 목숨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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