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국 정치철학자
이형국 정치철학자

2014 년 11월 17일, ‘공정한 입학을 위한 학생회’(SFFA)는 하버드대학(Harvard)과 노스캐롤라이나대학(UNC)을 상대로 그들의 인종 기반 입학 프로그램이 각각 1964년 민권법 조항 6과 수정헌법 14조의 평등한 보호 조항 2를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별도의 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의 배후에는 SFFA '대표 길잡이 별(lodestar)'인 보수 운동가 에드워드 블럼이 있다. 그는 1992년에 텍사스 18선거구에서 흑인 민주당원에게 선거에서 패한 후 미국 전역에서 인종보호 문제를 해결하는 데 평생을 바친, '귀찮은 변호사' 출신이 아닌 변호인이다. 

필자는 원고인 이 단체가 하버드 입학정책에 도전하고 있지만 승소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2018년 워싱턴 한국일보 칼럼에서 피력한 적이 있다. 이미 여러 차례 이와 유사한 플로리다 · 텍사스 · 미시건 주 케이스 소송 등에서 대학 측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연방대법원의 전임 대법관들은 1954년 Brown v. Board of Education소송에서 ‘평등한 교육 기회보장’을 처음으로 승인해 주었고, 1978년 California v. Bakke 소송에서는 인종을 기반으로 한 입학정책이 평등보호 조항 또는 민권법 조항 6을 위반하지 않는다고 판결했으며,  2016년 Fisher v. Texas 소송에서도 대학의 자율권 보장과 선발 과정의 불투명성을 합법적으로 승인해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9년이 지난  6월 29일 연방대법원의 6-3 판결에서, 전임 대법관들의 반복적인 판결에도 불구하고, 6명의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은 대학의 입학정책에서 인종을 고려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뒤집어버렸다. 교육의 기회균등 보호를 백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인종차별로, 교육적 다양성을 흑인·라틴계 특혜 보상으로 보는 판결은 분명히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서 있는 결정이다. 불행하게도 적어도 필자가 보기엔 미국 최고법원이 당파적·정치적 견해에 근거한 판결을 내렸다. 이것은 우려스러운 파벌이 이끄는 편파적 결정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트럼프 판사' 즉 트럼프에 의해 임명된 판사들이 있다. 

공화당 상원의원이 미국 중도파로부터 대법관 2석을 빼앗기 전에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자신에게 편안한 5 대 4의 보수 다수파와 함께 '볼과 스트라이크를 선언'하는 척할 수 있었다. 그는 이제는 그들의 선배 대법관들의 선례를 파쇄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5명의 극우 이데올로그인 트럼프 판사들 옆에 앉아서 동조하며 우스꽝스러운 결정 인용문을 썼다. 로버츠는 인종을 차별로 사용해서는 안 되며, 고정관념으로 작동해서도 안 된다는 두 가지 명령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대입은 제로섬이다. 일부 지원자에게는 제공되지만 다른 지원자에게는 제공되지 않는 혜택은 필연적으로 후자를 희생시키면서 전자 그룹에 유리하다”라고 썼다. 그는 입학정책이 표준이 없고, 충분히 측정 가능 (sufficiently measurable)한 방식으로 인종기반 입학 프로그램을 운영하지 않았고, 부정확하고 광범위한 인종 범주(racial categories)를 사용하며, 인종적 고정관념 (racial stereotypes)에 의존하고, 비 소수집단에게 불이익(disadvantage)을 주고, 끝점(end point)이 없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모교인 하버드 대학 측 반발을 의식해 솔로몬 방식의 타협안도 제시했다. 대학이 여전히 인종을 비스듬히(obliquely) 고려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원자들이 개인 에세이에서 "차별, 영감 또는 기타를 통해 인종이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여전히 논의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 지원자가 인종 정체성과 관련된 성격 특성으로 판단되는 한, 대학은 지원서에서 인종에 대한 언급을 전면 금지할 정도로 색맹 (colorblind)일 필요가 없다고 의견을 썼다. 소니아 소토마요르 판사는 반대 의견에서 “대학이 경우에 따라 지원 에세이에서 인종을 고려할 수 있다는 이러한 인식은 돼지에게 립스틱을 바르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퓨 리서치센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 대법원의 결정에 52%가 찬성했고, 32%는 반대했으며, 16%는 모른다고 답했다. 공화당원은 75%, 무소속은 58%, 민주당원은 26% 찬성했다. 백인 60%와 아시아인 58%는 대법원의 결정을 지지하는 반면, 어퍼머티브 액션 수혜자 두 그룹인  흑인 75%, 히스패닉 60%는 이번 판결에 반대했다. 이와 별도로, 4000개가 넘는 대학을 상대로 한 대학입학상담협회(NACAC) 조사에 따르면, 대학의 3분의 2 이상이 인종이 입학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보고 있으며, 인종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답한 대학은 3.4%에 불과했다고 발표하고 있다. 입학을 결정하는 당사자 대학들은 대법원 판결과는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인종을 고려한 입학 정책이 위헌인지 여부가 아니라 고등교육에서 인종 중립적 ‘능력주의’(성적위주) 입학을 주장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차별철폐 조치에 대한 법원의 결정은 필자가 보기엔 정당성이 부족하다. 첫째, 로버츠 대법원장의 의견은 표면적으로는 평등보호 조항에 의도적으로 눈감아 버렸다. 그의 의견은 헌법이 피부색이나 인종에 따른 차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원론적인 '색맹 입헌주의'(colorblind constitutionalism) 이론에 근거하고 있다. 둘째, 고등교육의 다양성을 기각했다. 설득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량화할 수 없기 때문이란 변명을 했다. 이러한 정당화는 잘못된 것일 뿐만 아니라 제도적 겸손을 가장한 오만이다. 셋째, 미국 역사와 함께 시작된 구조적·제도적 인종주의에 색맹 원칙만 부과했다. 궁색하기 짝이 없는 판결이다. 이번 대법원 결정은 1954년 Brown v. Board of Education 소송에서 처음으로 인정된 ‘평등한 교육 기회보장’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판결이다.   

수십 년간의 학술 연구를 통해 수집된 수많은 데이터와 분석은 인종에 기반한 편견과 불평등이 미국 사회 전반에 걸쳐 발생했으며 여전히 발생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고등교육은 인종차별의 흔적이 많이 남겨져 왔고 여전히 남기고 있는 곳 중 하나이다. 미국 대법원은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미국에서 조직적인 인종차별이 지속되는 데 기여하기로 결정했다. 인종차별의 사실적 현실을 무시하고 제도적 불평등을 개선하는 구조와 프로그램을 공격하고 제거함으로써 대법원은 정의로운 사회라는 공동의 목표에서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고등교육의 다양성에 대한 여러 승리에도 불구하고 인종 중립적인 능력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유리한 특정 인종 그룹이 자신의 교육적 이점을 더욱 강화하면서 하위 인종그룹이 경험하는 체계적인 교육적 불이익을 영속화 하려는 역사적 패턴과 관행을 의미한다. 

재능은 어디에나 있지만 기회는 흔치 않다. 평등은 불평등에 대한 인정에서 출발한다. 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균등하게 제공되어야 한다. 더욱이, 소외된 소수민족 학생들은 빈곤층에 살며 빈곤층이 집중된 학교에 다닐 가능성이 더 크다. 지역 재산세에 크게 의존하는 주거 분리 및 학교 자금 지원 시스템과 결합하면 소수 집단은 덜 자격 있는 교사, 덜 도전적인 커리큘럼, 더 낮은 표준 시험 점수, 더 적은 과외 활동 학교에 다닐 가능성이 더 높다. 따라서 인종에 따라 성취도 격차가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적(intellectual)인 것은 지능·학업성취와 연관성이 있으며, 자질(qualities)은 성격·인성·리더십·시민의식· 공공봉사와 연관성이 깊다. 사회구조의 동력은 지적인 능력이 이끌며, 사회구조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자질의 능력이다. 모든 아시아인들에 비슷한 가장 중요한 고정 관념은 성적으로 모든 걸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편견에 불과하다.  예일의 역사학자 피어슨은 성적만을 좇는 학생, 시험 치르는 법을 배운 '너절한 녀석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 

인종을 고려하는 것이 시스템을 불공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인종적 불평등이 계속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바로 인종차별이며, 인종차별을 다루지 않는 것 또한 인종차별이다. 21세기 사회학의 창시자 미국의 찰스 틸리(Charles Tilly)는 '범주적 불평등’ (categorical inequality)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그같은 불평등은 "유리한 집단이 배제 과정과 기타 독점 통제 수단을 통해 기회 접근을 제한할 때 발생한다”고 지적하고 이를 ‘기회 사재기’(opportunity hoarding)라고 했다. 이는 반경쟁적 카르텔 행위이다. 

미국에서 양질의 교육에 대한 접근성 부족은 계속해서 계층화의 주요 엔진이 되고 있다. 백인 인종 카르텔은 노동, 주택, 교육과 같은 주요 시장 진입에 대한 반경쟁적 장벽을 만들기 위해 정체성에 대한 내면화된 사회적 규범을 사용했다. 엄연한 제도적 현실은 실업률, 소득 수준, 부와 주택 소유, 의료 접근성 등에 극명한 인종적 격차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거의 1세기 동안 국가의 강제 분리는 국가의 많은 지역에서 유감스러운 규범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의회에서 제안하고 각 주에서 비준한 수정헌법 제14조는 “미국의 법은 흑인에 대해 백인과 동일해야 하며 유색인이든 백인이든 모든 사람은 주의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어떤 주에서도 “누구에게도…인종이나 피부색에 따른 법의 차별을 허용해서는 안 되며 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은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이 법의 지지자들은 주장했다. 

이러한 초기 인식에도 불구하고, 남북전쟁 이후 거의 1세기 동안 사회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는 평등한 보호 조항을 훼손하며 1964년 민권법이 제정될 때까지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비열한 역사를 수행해 왔다. 100년이 넘는 정부 정책 시행 후 법에 의한 인종 분리로 인해 사회는 여전히 고도로 분리되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미국 법무부는  법률상 분리의 흔적을 제거하지 못한 학교에 대해 계속해서 인종 분리 법령을 시행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사회는 본질적으로 불평등한 상태로 남아 있다.

다양성이란 이상은 1859년 당시 19대 하버드 총장이던 펠턴이 주장한 이후 하버드의 중심사상이 되었다. 26대(1991-2001) 하버드 총장이었던 루딘스타인은 “다양성은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이해하며 지혜를 끌어내는 실체”라고 말했다. 인종적·사회적 다양성은 사회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모두 필요한 것이다. 평등하게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권력과 재력의 힘에 의해 불평등·불공정하게 대접받고 살아온 게 현실이다. 이러한 불이익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문화적·사회적·경제적 배경이 취약한 이들에게 대학의 문호를 일정 수준 할당하는 것이 통합적인 사회를 만드는 지혜이다. 

누구를 포용하고 배제시킬 것인가는 전적으로 대학의 재량권에 의해 결정된다. 명문 사립대학의 실질적인 선발과정은 다양성과 능력주의란 이상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며 입학허가 파이가 주요 이해그룹의 권력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농후하다. 갈고리(hook)를 가진 학생들은 갖지 않은 학생들보다 훨씬 큰 파이조각을 얻게 된다. 실제로 동문 자제나 체육특기자 또는 통 큰 기부자 자녀에게 꼬리표(tag or flug)가 달린 범주는 신입생의 거의 40%를 차지한다. 나머지 60% 자리를 놓고 절대 다수 지원자들은 그야말로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입학허가제도 중 많은 것은 비판여론에 따라 불리할 때는 포용하고 유리할 때는 배제를 반복하며 수정되어 왔다. 

매우 생소하고도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입학선발 과정, 나쁘게 생각하면 심각하게 부도덕한 것으로 비칠 수 있는 관행이다. 동문자제에 대한 특혜는 무엇보다 가장 문제가 크다. 이것은 상당히 정당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기회평등의 원칙을 심각하게 위배하고 있다. 소수민족 우대정책이나 빈곤층 자녀들의 소수 점유율은 권력과 재력을 가진 이들 자녀의 과도한 점유율에서 오는 반사이익의 결과일 뿐이다. 기회평등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그 이면에는 권력 배분의 흔적이 묻어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문 사립대학의 정체성의 핵심은 역시 공동체 리더십이었으며 공공봉사에 대한 지속적인 약속이었다. 대학의 사명은 선량한 시민으로 교육시키는 것, 다양한 계층의 학생들이 정부와 기업에서 일할 수 있도록 미래의 정치적·비지니스 리더를 길러내는 것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입학 결정에서 누구를 선발할 것인가에 대한 자유재량권을 대학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불균형의 가장 큰 피해자는 18-20% 입학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는 아시안의 똑똑한 학생들이 아니라 3%의 소수 입학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 소득 하위 20%의 저소득층 가정 출신 자녀들이다. 노동 계층과 빈곤 가정의 자녀들은 명문 대학에 감히 엄두를 못 낸다. 시급하고도 더 중요한 이슈는 인종을 고려(race-based)한 차별 철폐조처가 아니라 '계급에 근거(class-based)한 차별' 철폐조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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