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5개월 전에 벌어지는 아수라장, 누가 만드나
대통령의 불쑥 발언 떠받드는 장관, 중계하는 언론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때의 '전봇대 뽑기' 발언과 흡사
대입 수능의 이른바 '킬러 문항'을 놓고 일대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소동 이상의 '아수라장'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그러나 이 소동을 아수라장의 대혼란으로 만들고 있는 것의 본질은 '킬러 문항' 그 자체가 아닌 다른 것에 있다. 대통령이 평소 다른 대부분의 사안들에서 그렇듯 불쑥 던진 정도의 말을 마치 수능 개혁, 교육 개혁의 '교지(敎旨)'처럼 받드는 교육부장관과 이를 연일 지면에 중계하는 언론의 행태다.
수능을 망치는 것이 킬러문항이라고 했지만, 수능을 망치고 교육을 망치는 것은 다름아닌 대통령과 정부와 언론이다. 수능을 150일 앞두고 벌어지고 있는 이 전대미문의 어처구니 없는 사태는 '수능 킬러 문항' 문제가 아니라 대통령과 정부와 언론이라는 '수능 킬러’ ‘교육 킬러' 사태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이번 사태의 발단이 된 윤석열 대통령의 말은 이명박 정부 때의 규제 완화에 대한 '공단의 전봇대 뽑기' 발언과 매우 흡사하다. 복잡한 문제를 극히 간단하게 보고 풀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전봇대 뽑기 소동이 보여준 바처럼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보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복잡해지고 헝클어진다. 그러나 윤 대통령의 1차원적이며 단선적인 사고에서 나온 말을 언론은 마치 '교육개혁'을 선도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대로 옮기고 키우고 있다.
복잡한 문제 간단하게 풀려는 1차원적 사고
현행 수능 제도의 문제들은 물론 넘쳐나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사교육에 의해 훈련된 '수능 기계'에 유리하다는 것, 그로 인해 서울의 강남 등 부유층에 절대 유리한 결과를 낳고 있다는 것은 풀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다. 역설적으로 그것의 극명한 사례들이 대통령이나 현 정권의 요직에 있는 이들 자신과 같은 이른바 시험 성적을 올리는 데 능력이 뛰어난 이른바 '학력 엘리트'를 낳고 '지배 엘리트'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이유들로 오랜 세월 수많은 개선과 (결과적인) 개악이 뒤섞여 얽히고설킨 문제의 누적이 바로 지금의 수능이다. 매우 다각적인 접근과 분석, 진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 개선안의 방향과 내용이 어떻게 되고, 그 개선 과정을 어떤 식으로 할지는 차치하고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수년 간 이 시험을 준비해 온 수험생들이 시험일을 불과 5개월 앞두고 '마라톤의 종착점으로 달려가는(성기선 전 한국교육과정평가원장)' 시점에서 대통령의 '불쑥 한마디'로 정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 지난 1년여간 숱하게 봐오고 있거니와 이번 윤 대통령의 킬러 문항 발언은 '혼잣말', 그저 뇌까리는 말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상대방의 대답을 들으려는 말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사안에 대해 최소한의 지식이나 숙고에서 나온 말들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선택할 자유’라는 책 한 권의 지식으로 경제시스템이나 자유주의에 대해 통달한 듯이 말하는 대담한 용기가 이번에도 발동됐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의 지식의 부재나 사고의 빈곤이 아니라 그나마 얇은 지식과 사고가 더욱 얄팍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비어가는 지식과 판단력의 공백을 채우는 것은 더욱 커져가는 자신감인데 그 자신감과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그 주변 인사들, 그리고 언론이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 대해 대통령의 수능 난이도 관련 발언을 잘못 전했다며 대통령실이 경고 처분을 내린 것도 실소를 자아내는 일이지만 이 장관의 언동은 더욱 가관이다. 교육 부처의 책임자인 그는 앞뒤 따지지 않고 “대통령의 지시를 제대로 이행치 못했다”며 고개부터 숙였다.
언론에 보도된 것을 종합하면 이 장관은 지난 15일 “윤 대통령이 수능과 관련해 변별력은 갖추되 학교 수업만 열심히 따라가면 문제를 풀 수 있도록 출제하고 그 외 내용은 출제에서 배제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물수능’ 관측으로 엉뚱하게 비화하자 대통령실은 하루 뒤인 16일 “윤 대통령이 이 장관에게 물수능, 불수능을 얘기한 것이 아니다”며 “변별력은 갖추되 공교육 교과과정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는 수능에서 배제하라는 취지였다”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장관은 “대통령은 일찍이 (‘킬러 문항’ 등의 문제를) 지적하셨는데 교육부가 관성적으로 대응해 근본적 해법을 내놓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무엇을 잘못 전했으며 무엇이 대통령의 말의 본뜻이었다는 말인가. 이 장관이 잘못 전한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 말은 누구보다도 수험생들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슨 말이었는지를 살펴볼 생각을 하지 않고 두 손 들고 '무조건 잘못했습니다'라고 빌기부터 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아예 더 나아가기로 작정한 듯했다. 대통령의 눈밖에 날 것이 두려웠던지 난데없이 대통령을 ‘수능 전문가’로 격상시켰다. “윤 대통령이 검사 시절 입시 관련 수사를 한 경험이 있으며, 입시에 대해 수도 없이 연구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급기야 “저도 전문가이지만 (대통령에게) 제가 많이 배운다”며 ‘대한민국 최고의 교육전문가’라고 자부해 왔을 그가 대통령이 검사 시절 대입 수사를 한 것을 교육 전문가이며 자신도 배운다고 지극한 겸손의 말을 내놓은 것이다. 이 말로써 그는 대통령은 수사한 사건마다 그 분야의 전문가이니 모든 내각의 장관들은 대통령에게 자신의 부처 분야에 대해 과외와 교습을 받으라고 권고한 셈이 됐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하는 것이 사태의 핵심
무엇보다 이번 사태의 핵심적인 측면은 대통령이나 언론이나 '문제'를 '문제'로 보지 못한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는 문제를 바로 보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기도 하고 못 본 척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들이 문제를 만들고 키우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인데, 불에 기름을 붓고 있으면서 왜 불길이 꺼지지 않느냐고 야단치는 격이다.
'킬러 문항'이라는 그 명명부터가 대입의 문제를 지극히 단순화한 것이다. 단순한 명명은 단순한 사고에서 나온다. 그 단순한 사고를 정부와 언론은 묵인하고 방조하는 것을 넘어서 조장하고 응원하며 심지어 우러르고 있다.
황지우 시인은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라고 사랑에 대한 후회를 하고 있지만 윤 대통령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그가 관심을 보이는 곳마다 폐허로 만드는 모습이다. '내가 책을 한 권 봤으니' '내가 수사를 해 봤으니' 그 분야를 잘 안다며 불쑥, 한마디 툭 내던진 말을 장관들이 충성으로 받들어 헝클어뜨리고 망가뜨리는 모습이다.
이것이 현 정권이 문제를 인식하고 판단하고 푸는 하나의 문화이며 공식이 돼가고 있다. 대통령의 방식을 주변 사람들이 따르고 배우고 있다. 국제 밀값 시세가 떨어졌다고 곧바로 라면값을 내리라는 '지시'를 해 라면업계를 압박한 추경호 부총리의말도 그런 배경에서 나오는 것이다.
대통령-정부-언론, 파탄과 파행의 삼각 공조
대통령이 나라를 망가뜨리고 있다면, 망가진 대통령을 그 주변 인사들이 더욱 망치고 있고, 대통령과 그 주변인들을 언론이 더욱 엉망으로 만들고 있다. 삼각 공조이며, 삼각 파행이다.
조선 중앙 동아를 비롯한 대다수 매체들은 킬러 문항 기사를 연일 쏟아내고 있다. 이들 신문들이야말로 지면과 ‘사업’들을 통해 사교육의 한 공범들이라는 점에서 적반하장이며 기억상실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이는 어제오늘 보는 일이 아니기에 지적과 비판을 하는 것이 별무소용일 것이다. 다만 그에 대해 제대로 방향을 잡아주는 데 상당한 역할이 주어진 한겨레는 그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수능 끼어들기'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이른바 보수 언론이 펼치는 '프레임'에 제대로 대응하고 있는가. 그 시각과 역량은 사소한 대목에서 나타난다. 지면 이상으로 한겨레의 내부 편집 방향을 엿보게 해 주는 창인 한겨레의 뉴스레터는 21일자의 제목을 <한문철도 못 푼 ‘킬러문항’>이라고 붙였다. 개정 여론이 일고 있는 ‘자동차 급발진 관련법’ 담당 기관이 어디인지를 교통사고 전문 변호사도 몰랐던 ‘킬러문항’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른바 보수 언론이 내보내고 있는 ‘킬러문항’ 명명을 굳이 써야 했을까. 그런 미세한 부분에서 스스로 의도하지 않은 보수언론의 프레임에의 동조가 되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한겨레 내부에서 점검이 되고 있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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