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명이네 마을'과 '건희사랑' 사실상 똑같이 취급
부실한 기계적 균형, 진실에의 탐사에 크게 미흡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탐사언론의 '특집다큐'에 비판 쏟아진 까닭
탐사취재 전문 매체인 뉴스타파가 지난 29일 ‘팬덤 정치’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보도를 내보낸 것이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정치 양극화의 한 요인으로 정치 팬클럽의 과도한 팬덤을 지목하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팬클럽인 ‘재명이네 마을’과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씨의 팬클럽인 ‘건희 사랑’을 그 대표적 사례로 들었다.
뉴스타파의 이 보도에 대한 비판은 여러 측면에서 거세게 제기됐는데, 그만큼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탐사 전문 및 ‘진보’ 성향의 언론에 대한 기대와 바람이 크다는 것의 반증이었다.
그 비판은 요컨대 '특집다큐'라고 이름 붙인 것처럼 적잖은 인력과 자원이 투입된 이 역작에서 ‘탐사’가 제대로 이뤄졌는가에 대한 것이며, 그 탐사를 통해 매체의 이름처럼 ‘타파’해야 할 것을 제대로 타파했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현상적 사실 밑의 심층과 감춰진 진실에 얼마나 다가서는 탐사를 했느냐는 것과, 그 탐사를 통해 기성 유력 언론이 갇혀 있거나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협소하고 기득권적인 시각을 타파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팬덤정치에 대한 뉴스타파의 탐사 보도는 '탐사'에서 미흡했고, '타파'에서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팬덤 비판은 매우 필요한 주제
정치 팬덤에 대한 비판은 매우 필요한 주제다. 뉴스타파가 취재 취지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정치 팬덤은 긍정적인 기능과 함께 상당한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단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식이어서는 이 현상에 대한 탐사적 접근이 나오기는 힘들다. 정치 팬덤을 낳고 있는 한국 정치의 구조적인 특질, 정치에 대해 시민이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 통로의 다양성, 팬덤이 갖고 있는 정치참여의 의미와 한계 등에 대해 만약 ‘팬덤 정치’ 보도가 다각적이며 심층적으로 파고 들었다면 '정치 팬덤'의 진단과 과제에 대한 탐사보도에서의 수작이 나왔을 수 있다. 그러나 뉴스타파의 이 보도는 '특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국언론이 가장 손쉽게 애용하는 방식의 하나, 양비론과 기계적 균형에 기대버리고 말았다.
이 보도는 야당 대표의 팬클럽과 대통령 부인 팬클럽을 병렬적으로 비교하고는 사실상 똑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면서 이 원칙, 양비론과 기계적 균형이라는 원칙을 적용했다. 여기서 뉴스타파의 ‘팬덤 정치’를 비판하는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계적 균형을 취한 것을 잘못인 것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뉴스타파의 실패는 사실 기계적 균형을 선택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적 균형을 이뤄내는 데 실패한 것에 있다.
기계적 균형의 문제는 그것이 나태하고 안이한 방식이어서가 아니라 실은 오히려 그것이 제대로 구현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라는 데 있다. 철저하게 중립적 객관적인 기계적 원리에 의해 두 개의 사물이나 사안을 저울에 올려놓고 어느 한쪽으로, 단 1g도 기울지 않는 완전 기계적 균형에 이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기계적 균형은 그 사안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빠짐없이 수집하는 것이 우선적 조건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부터 기계적 균형은 사실상 이뤄내기 힘든 목표가 돼버린다. 수집하고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은 유한수에 그칠 수밖에 없다. 사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고 선택하는 것이다. 사실의 수집에서부터 기계적 균형은 이뤄낼 수 없는 것이다.
기계적 균형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설령 사실의 취사에서 기계적 균형을 달성했다 하더라도 그 사실들은 양적으로 같은 값일 수가 없으며, 그 속성에서 동질일 수가 없다. 중요한 사실이 있고 덜 중요한 사실이 있으며, 진실을 드러내는 사실이 있고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사실이 있다. 그러므로 수집한 사실에 대한 경중의 가감, 채택과 배제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정치 팬덤'은 두 개의 팬클럽의 성격을 결정 짓는 주요한 사실인 결성 과정에서 자발적이었느냐, 팬클럽 '스타'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느냐는 매우 중요한 차이를 쌍둥이와 같은 동형 동질의 것으로 취급해버리고 말았다. '건희사랑'은 김건희 씨가 만들라고 '시켰다'는 것이 이 클럽의 회장이 스스로 밝히고 있는 대로 드러나 있지만 '정치 팬덤'은 이에 대해 별 차이를 두지 않는다.
결국 기계적 균형은 양적 균형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가치 판단에서의 균형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기계적 균형, 양비론을 택하기로 했더라도 그 원칙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그것은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이상의 이유들로 인해 그것은 지극히 어려운 과제여서 대개의 경우 빠지게 되는 함정은 사실들의 수평적 나열과 동일시의 함정이다. 다른 것을 같게 해버리는 오류다. 결과적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없고 동일시만 남는 반쪽 비교가 돼버린다. 역으로 같은 것을 다르게 하는 것은 그 동일시의 이면이다. 결과적으로 어느 한쪽에는 지나친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 되고, 다른 한 쪽에는 지나치게 부당한 비판이 돼버린다. 뉴스타파의 '탐사'가 빠졌던 함정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치 팬덤'은 정치 양극화의 문제의 한 원인과 결과를 '정치인에 대한 과도한 지지'에 두는 것에서 취재의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바로 그 점에서부터 이 탐사보도의 표류가 시작된 듯하다. 정치는 상당 부분 지지자들의 응원과 열정에 의해 이뤄진다고 할 때 사실 그 열정이 적정하다, 지나치다는 것을 쉽게 나눌 순 없다. 지나치다는 것이 그 열정의 과잉을 얘기하는 것이어선 안 된다. 오히려 열정이 높을수록 그것은 강력한 정치발전과 성숙의 에너지가 된다.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그 열정에 대해 지지자 자신이 그것이 어떤 것인가를 스스로 알고 있느냐는 것, 그리고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에 대해 스스로 이성적 판단과 결정을 하고 있느냐는 것, 다른 지지자들과 그것을 어떻게 나누며 건전한 정치적 응원과 압박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느냐는 것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문제는 팬덤의 과잉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팬덤이 이성과 상식, 합리성에 기반한 것이냐인 것이다.
이는 흔히 민주주의의 부작용으로 부당하게 지적받는 포퓰리즘이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중요한 속성이라는 점에 대한 이해와 함께,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이든 팬덤이든 지지자 그룹 내부에서, 또 정치인과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성적인 소통과 상호 대화가 작동하는가라는 점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그 소통과 지지가 서로를 견인하고 성장시키는 것이냐에 있는 것이다. '정치 팬덤'에 대한 실망과 비판은 이 다큐가 그런 면을 과연 깊게 탐사해 들어갔는지에 대해 의문을 불러일으킨 데 따른 결과였다.
'탐사보도의 탐사화' 필요
뉴스타파의 ‘정치 팬덤’ 보도에 대한 호된 비판은 진보적 탐사 언론으로서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매우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정도의 문제의식과 인식으로 특집다큐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타는 뉴스타파가 그만한 역량과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탐사 매체에서 '탐사'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뉴스타파가 전범으로 삼고 있는 리영희 교수가 ‘종교처럼 숭앙하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키려고 하는’ 그것, ‘진실’은 단순히 사실의 집합으로는 이뤄낼 수 없다. 사실의 균형은 진실 추구의 수단이며 과정이지 목적이 아닌 것이다.
탐사보도는 2중의 탐사를 요구한다. 사안에 대한 탐사와 함께, 그 이전에 그 사안을 바라보는 기자 자신의 시각이 탐사적이어야 할 것을 요청한다. 그렇지 못할 때 탐사는 탐사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진실에 대한 접근을 막는다. 뉴스타파에 대한 높은 바람과 요구, 그에 맞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선 탐사의 탐사화, 뉴스타파의 자기타파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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