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하게 살려고요
고추밭 풀 매고 있는데 휴대전화가 울린다. 은주 씨다. “형님, 오늘 저녁에 약속 없어요? 저희랑 식사 같이해요.”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요. 같이 회 먹으러 가요. 시숙님이랑 저희 집으로 여섯 시까지 오세요.”
은주 씨는 우리집 남자를 ‘시숙님’이라 부른다. 그녀의 남편이 ‘형님’이라 부르는 이들은 모두 그녀의 ‘시숙님’이다. 은주 씨의 남편은 바로 우리와 못자리를 함께하는 심 이장. 심 이장이 우리집 남자한테 ‘형님’이라 부르자 그녀가 따라서 ‘시숙님’이라 불렀고 엉겁결에 나도 그녀의 ‘형님’이 되어버렸다. 이거 참.
‘강은주’라는 이름은 그녀가 직접 지었다. “강하게 살려고요.” 성을 강 씨로 정한 이유란다. 본명은 ‘휜 티 투 야우’. 태어난 곳은 베트남 남동부 떠이닌. 호찌민에서 동북쪽으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다. 베트남 처녀 휜 티 투 야우는 스무 살에 한국으로 시집와 전라도 여자 강은주로 19년을 살았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전혀 다른 낯선 땅에 혼자 떨어진 스무 살 어린 신부가 겪었을 고충과 갈등, 외로움이 짐작된다. 많이 울었겠지. 그리고 다짐했을 것이다. 강해지자고. 강한 강은주가 되자고.
그녀의 식사 초대엔 이유가 있었다. 생일이란다. 그녀는 1985년 1월에 태어났지만 생일은 5월 19일이다. 그녀의 아버지가 5월 19일을 생일로 정해줬고 그녀는 평생 그날을 생일로 기념한다. “아버지가 호찌민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했어요.” 놀라워하는 우리에게 그녀가 덧붙인다. “베트남엔 태어난 날이 달라도 생일은 5월 19일로 똑같은 사람 많아요.” 호찌민 주석이 태어난 날이 1890년 5월 19일이다. 국민 다수가 기억하고 공유하는 특별한 생일에서 전쟁의 참화와 무수한 희생 끝에 이뤄낸 베트남의 승리와 자부가 읽힌다.
남의 생일 못 챙기고 내 생일도 누가 일러주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치기 일쑤지만 그녀의 생일은 잊기 어렵겠다. 호찌민 생일이어서가 아니라 5·18 다음날이라서. 43년 전 광주를 생각하면 가슴에 천근 돌덩이가 얹히는 느낌이다. 바로잡고 단죄하지 못한 역사의 후과가 너무나 크다. 학살자는 돈방석에 앉아 천수를 누렸고, 음험한 세력의 왜곡과 모욕은 집요하고 끈질기다. 기이하게 뒤틀린 한국 사회.
그녀는 6남매의 막내라 했다. 맏이인 큰언니와 20년 차이가 난단다. “큰언니는 오십구 살이에요. 저한테 엄마 같아요.” “그래요? 나랑 나이가 같네.”
뜻밖이라는 듯 그녀가 놀란다. 술 한잔 건배하며 무슨 말끝에 그녀가 나를 ‘언니’라고 부르더니 얼른 ‘형님’으로 정정한다. “언니라고 부르니 더 좋네요.”라고 대꾸했더니 그녀가 반색을 한다. 형님-동서는 남편들을 매개로 한 호칭이지만, 언니-동생은 당사자들이 직접 맺는 관계다. “그럼 언니라고 할게요. 언니 좋아요. 우리 큰언니랑 나이도 같고요.”
못자리하는 날
어린이날에 못자리를 하려 했는데 일이 어그러졌다. 주말과 연결된 휴일이라 멀리 사는 아들도 오기로 했고 심 이장댁 아이들도 학교 안 가니 일손 넉넉하다 싶었는데 웬걸, 5월 4일부터 연사흘 비 예보다. 비가 오면 논이 질척해 트럭이 들어갈 수 없다. 비 오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한다. 어쩌겠는가, 놉을 얻을 수밖에.
5월 3일, 모판(육묘상자)을 못자리로 옮기기 위해 심 이장댁으로 갔다. 모판을 감싼 비닐을 벗기니 하얀 싹이 잘 올라와 있다. 4월 말일 파종 후 대형 비닐로 모판을 감싸 ‘출아’ 온도를 맞춰준 덕이다.
출아란 종자가 복토한 흙을 뚫고 첫 싹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30~32℃로 온도를 맞춘 가온 출아실이나 전열 육묘기를 사용해 출아하는 경우도 많다는데, 우리 같은 일반 농가는 노지에서 무가온 간이 출아를 한다. 바닥에 비닐을 깔아 지면의 냉기를 막고 모판을 겹겹이 ‘상자 쌓기’를 한 후, 태양의 열기가 직접 닿지 않도록 부직포를 덮고 대형 비닐로 감싸 사나흘 노지에 둔다. 부직포 못자리를 할 때 출아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이 과정을 생략하면 못자리에서 싹 나는 기간이 길어지고, 볍씨가 물에 잠겨 썩을 확률이 높으며, 모가 균일한 성장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을 도우러 온 네댓 명의 이웃과 함께 모판 옮기기를 시작한다. 심 이장네 마당에 쌓인 모판을 두 대의 트럭 짐칸에 올려 싣고, 못자리 논으로 가서 내려 펼치는 일을 반복한다. 트럭에서 내려준 모판을 받아 못자리 두둑에 줄 맞춰 내려놓는데, 밀려드는 모판에 쉴 틈이 없다. 수없이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접는다.
잠시 멈추고 쉬는 사이 오토바이를 몰고 휭하니 사라진 은주 씨가 새참 바구니를 싣고 돌아왔다. 농사일에 새참은 필수다. 논두렁에 둘러앉아 은주 씨가 가져온 치킨과 음료를 나눠 먹은 후 다시 기운 차려 일을 시작한다. 모판 1700여 개를 3시간 만에 다 내려놓았다. 역시 사람 손이 무섭다.
이제 부직포만 덮으면 된다. 두둑에 배열한 모판 위로 부직포를 당겨서 덮고 비바람에 들썩이지 않도록 삽으로 흙을 퍼 가장자리를 눌러주었다. 부직포 덮기를 마치니 심 이장이 하우스 관정의 호스를 끌어와 논에 물을 댄다. 쩍쩍 갈라진 마른 논으로 지하수가 콸콸 쏟아져 들어간다. 어린 벼의 생명줄이다.
빚지고 산다
어린 모는 한 달간 못자리에서 자란다. 못자리는 물관리가 핵심이다. 물을 줄 땐 상토 속까지 충분히 스며들도록 준다. 물이 모판 바닥까지 차올라 벼가 넉넉히 물을 빨아들이면 물꼬를 터서 다시 물을 빼준다. 수분을 주되 과습은 막는 것이다. 상토가 물에 오래 잠기면 곰팡이가 생기거나 모가 웃자랄 위험이 있다. 심 이장은 매일 모의 상태를 들여다보고 물을 대고 빼는 일을 한 달 내내 반복한다. 정성스러운 그의 손길로 어린 모들이 파릇파릇 자란다. “못자리가 벼농사의 절반”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못자리한 지 보름이 지나니 덮어둔 부직포가 팽팽해진다. 볏잎이 쑥쑥 자라 부직포를 밀어 올린 것이다. 가장자리의 흙덩이를 움직여 부직포를 느슨하게 해준다. 부직포는 모내기 일주일 전에 벗겨낼 예정이다. 그 무렵이면 냉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기온이 오르고, 모내기를 앞둔 어린 벼도 햇살과 바람에 적응해야 하니까.
부직포 못자리 육묘 기술은 19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그 전엔 활대를 꽂아 비닐로 덮는 ‘보온절충못자리’를 했는데, 외부 기온이 오르면 비닐 내부가 뜨거워져 반드시 통풍을 시켜줘야 했다. 부직포는 모판 위에 바로 덮어도 되니 활대 꽂을 일이 없고, 통기성이 좋으니 통풍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차광성과 보온성도 좋아 고온다습과 냉해 피해를 예방할 수 있고, 여러 번 재사용이 가능해 경제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종종 감탄한다. “대체 누가 이런 걸 개발한 거야?”
못자리에서 모판을 뗄 때도 비슷한 감탄을 한다. “이 신통한 모판을 누가 고안했지?” 구형 모판은 물구멍이 많아서 모 뿌리가 구멍을 빠져나가 못자리 논에 깊이 박힌다. 모판을 떼려면 모 뿌리를 뜯어내야 하니 힘이 몹시 들고 모 뿌리도 상했다. 신형 모판은 물구멍을 최소화하면서 바닥에 미세한 홈을 내, 물도 잘 빠지고 모의 뿌리도 밖으로 뻗지 않게 만들어졌다. 단순해 보이지만 혁신적이다.
불편을 개선하고, 효율을 높이기 위해 궁리하고, 실험하고 실패하고 재도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효과를 증명하고 상용화하기까지 고민과 시행착오를 거듭했을 것이다. 그 덕을 지금 우리가 본다. 관습의 경로를 틀어 흐름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제반 권리들과 제도화된 민주주의도 오랜 세월 수많은 이들의 고초와 노고, 희생 덕에 얻은 것이다. 평범한 일상조차 알게 모르게 많은 이들의 노고에 빚지고 있다.
사이공의 흰옷
“언니, 딸기 따가세요.” 봄 딸기 농사를 마무리하니 얼마든지 따가라는 은주 씨의 전화를 받았다. 플라스틱 바구니 3개를 챙겨 딸기 하우스로 갔더니 은주 씨가 기다리고 있다. 내가 바구니 2개를 채우는 사이, 은주 씨는 바구니 1개와 큰 스티로폼 상자 4개에 딸기를 가득 따서 내 차에 실어준다. 그녀가 따준 딸기는 내가 딴 딸기보다 훨씬 크고 실하다.
똑똑하고 부지런하고 일 잘하고 손도 큰 은주 씨. 하우스 농사 규모도 만만찮은데 1만 평 벼농사에 고추, 들깨, 참깨 등 갖가지 밭작물까지 짓는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일을 남편과 함께 척척 해낸다. 남편이 이장이니 마을 일 뒷바라지도 일상이다. 음식 솜씨도 뛰어나 마을 공동식사에 차려낸 나물과 밑반찬, 탕과 찜, 갓 담근 전라도 김치의 맛에 감탄사가 나온다. 이웃을 불러 밥 먹이는 일도 예사로 하고, 인정이 많아 남들에게 잘 퍼준다. 상황 판단력도 뛰어나고 한국말의 깊은 뉘앙스까지 잘 이해한다.
23일자 비행기표를 끊었다고 은주 씨가 말한다. “엄마 제사예요.” 남편은 농사일로 바쁘고 두 아들은 공부해야 하니 막내딸만 데리고 다녀올 거란다. “5년 전 엄마 돌아가셨어요. 코로나 땜에 제사 처음 가요. 일주일은 너무 짧아요.”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안 계신 옛집에 들어갈 때 그녀는 어떤 마음일까. 강은주가 아닌 휜 티 투 야우로 돌아가 눈물 쏟을 것 같다. 비행기로 오가는 이틀 빼고 딱 닷새, 아깝고 알뜰한 시간일 것이다. 해석이 필요 없는 모국어로 언니 오빠들과 수다도 실컷 떨겠지.
1986년 대학 3학년 때 읽었던 ‘사이공의 흰옷’은 내가 처음 만난 베트남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죽음을 무릅썼던 1960년대 베트남 학생들의 투쟁은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과 싸우던 우리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체포와 투옥, 고문, 강제징집과 의문사는 우리에게도 일상의 위협이었으니까. 두려운 싸움 앞에서 회피하지 않았던 이들이 이루고 싶었던 미래가 ‘지금’일까? 그럴 리가. 꿈꿨으나 여전히 먼 미래, 그러나 몸을 부숴가며 싸운 이들 덕에 근근이 여기까지 온 것도 사실이지. 사이공의 투쟁과 광주의 저항을 떠올리면 가슴 밑바닥에서 묵직한 통증이 인다.
베트남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사이공은 1975년 호찌민으로 이름을 바꿨다. 나는 언젠가 은주 씨에게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만행에 대해 한국인으로서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웃을 뿐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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