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간호법 거부하자 언론은 ‘거야 강행’ 탓 돌려
후보 시절 ‘간호사 처우개선’ 약속하고는 말바꾸기
양곡법 등 계속해서 말 바꿔도 언론은 질문 안해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플립-플롭’(flip-flop)은 ‘퍼덕퍼덕하는 소리’라는 뜻의 영어다. '퍼덕퍼덕 소리를 내는 슬리퍼'를 뜻하기도 한다. 정치 관련 기사에서는 ‘의견이나 태도를 바꾸는 것’ 즉 ‘말바꾸기’, ‘정치적 배신’으로 사용된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 관련 기사를 검색하면 ‘플립-플롭’이란 단어가 자주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말바꾸기를 풍자하기 위해 그의 얼굴과 말바꾸기 사례를 새겨넣은 ‘플립-플롭 슬리퍼’ 1천개가 만들어져 미국에서 완판됐다는 보도도 있다.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에서 통과된 간호법 제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다. 지난 1월 양곡관리법 거부권에 이어 두 번째다. 공영방송이 고질적인 정치후견주의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방송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란 예측이 나온다. ‘거부권 전문 대통령’이란 말이 나오고 있다.
국회를 통과한 양곡법이나 간호법은 쌀농사를 짓는 농민의 삶과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 대부분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주는 법안이다. 국회가 만들어 통과시킨 이런 법안을 대통령이 거부했다고 하니 국민은 궁금증이 커진다. 예전에는 잘 보지 못한 풍경인데다, 윤 대통령이 과거 이런 법안들에 찬성 의사를 밝힌 적이 있어 국민들은 더 혼란스럽다. 그래서 언론은 내용을 더 잘 따져 묻고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보도해야 한다.
언론의 보도는 어떠했나? 17일 주요 언론들은 이번 사안에 관해 대체로 ‘거야의 횡포’와 이에 맞서는 ‘대통령 거부권의 필요성’을 앞세워 보도했다. 주요 신문의 1면(일부는 정치면)에 보도된 관련 기사 제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윤, 간호법에 두 번째 거부권...야, 이번엔 ‘학자금 무이자 대출법’ 강행(동아), 윤 대통령, 간호법 거부권 행사 “국회 숙의 아쉽다”(중앙), 윤 대통령 “과도한 직역갈등” 간호법 거부권(한국), 간호법 거부당한 날, 巨野(거야) 학자금법 강행(조선), 윤, 간호법에 ‘2호 거부권’ “직역갈등·국민 건강불안”(서울), 윤, 간호법 거부권..“과도한 갈등 초래”(한경), 巨野, 노란봉투법·방송·특검법 단독처리 예고(헤경), 윤 간호법 거부한 날/야 또 票(표)퓰리즘 강행(매경)
거대 야당이 ‘힘으로’ 법안을 밀어붙였고, 대통령은 ‘직역간 갈등’이나 ‘국민 건강 불안’을 걱정해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논조다. 일부 신문은 간호법에 이어 또다른 법안 ‘강행’ 시도를 하고 있다고 썼다. 대통령을 감싸는 편향된 시각이 드러난다.
윤 대통령, 또 거부권/간호법 다시 국회로, “대통령 공약 깼다”..면허증 반납·PA간호사 ‘준법투쟁’ 채비(경향), 윤대통령, 간호법에도 ‘거부권’ 빼들었다, 갈등 조정 없는 ‘맞불 정치’...쟁점 법안 쌓여 충돌 이어질 듯/ 입법권-거부권 대치 되풀이(한겨레)
한겨레와 경향은 조금 달랐다. 1면 기사에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이유를 설명했지만 ‘거야의 강행 처리'와 같은 표현은 없었다. 또 ‘대통령이 공약을 깼다’는 사실도 제목에 넣었다. 사설에서는 한겨레가 ‘국회 무력화하는 윤 대통령의 거부권 상습화’를, 경향신문은 ‘사과 없이 간호법 거부한 대통령, 2년차 일방 국정 예고인가’를 제목으로 삼아 대통령의 일방독주, 국회무시를 지적했다.
여론시장에서 의제설정에 막강한 힘을 갖는 많은 신문들이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에 비판의 칼을 거두고 애완견 수준의 호의를 보여온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진보세력이 집권하면 사납게 물어뜯던 언론들이 수구 정당이 집권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해지는 편향성과 이중성을 시민들도 이제 웬만큼 알고 있다.
어차피 한국언론은 편향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한국 언론의 대부분은 중립을 가장한 채, 실은 시민의 이익이 아니라 기득권의 이익에 기울어져 있다. 그래서 편향성 탓하는 건 접어두고, 언론으로서 ‘최소한의 기본’에 대해 물어본다. 언론은 왜 최고권력자인 대통령 윤석열의 ‘말바꾸기’에 대해 철저히 따져 묻지 않는가? 언론은 대통령이 불과 1년 전에 한 약속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보는가? 그래서 국민은 더 혼란스럽다.
간호법에 대해 대통령 윤석열씨는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해 1월 대한간호협회를 방문해 “간호사님들의 처우를 대폭 개선하고, 간호사님들의 지위가 명확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2주 뒤에는 선대위 정책본부장이었던 원희룡씨가 “간호법, 우리 국민의 힘은 누구 못지 않게 앞장서서 조속히 입법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것을 후보께서 직접 약속하셨다”라고 말했다. (세계일보 5월 6일자)
이게 사실이라면, 언론은 ‘윤 대통령 간호법 거부권 행사, 국민과 약속 깼다’가 제목이 되어야 한다. 혹시 1년 전과 상황이 바뀌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된 사정이 있었다면, 언론은 ‘대통령의 사과가 우선’이라고 엄중하게 비판해야 했다. 하지만 주요 언론들은 대부분 대통령 윤석열의 ‘변명’(직역 갈등, 국민건강 불안)을 내세워 거부권 행사를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대통령 윤석열의 말바꾸기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도 아니다. 첫 번째 거부권을 행사했던 양곡관리법 역시 후보 시절엔 딴소리를 했다. 2021년 12월 윤석열은 자신의 SNS에 ‘정부는 30만 톤의 쌀 시장 격리에 나서주기 바랍니다...농민의 적정한 소득 보전은 국민의 가장 중요한 먹거리인 쌀의 안정적인 수급에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라고 썼다. 그랬다가 ‘농민의 적정한 소득 보전과 쌀의 안정적 수급을 위한 양곡관리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통령 윤석열 씨는 후보시절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난 자리에서 “반드시 일본의 사과를 받아내겠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얼마전에는 “100년 전의 일로 무릎 꿇으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지난해 4월 당선인 시절 신문의날 기념 행사에서 “(언론이) 권력이 부패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것은 기본이고, 쓴소리도 잘 경청하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몇 달후 본인이 말해놓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바이든-날리면’ 발언을 보도한 MBC기자를 전용기 탑승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비판 언론에 대한 고소고발과 압수수색 영장을 남발했다.
‘SNL코리아’라는 방송 프로에 나가 ‘자유롭게 정치풍자를 할 수 있도록 하겠냐’는 질문에 ‘도와주는 게 아니라 (정치풍자)는 권리’라고 했지만 자신을 풍자한 고교생의 그림 ‘윤석열차’에 대해서는 경고장을 날렸다.
‘야당과 협치하겠다, 의회와 토론도 하겠다’고 했지만 야당 대표를 단 한번도 만나지 않았고, 토론도 하지 않았다. ‘노동에 대한 가치가 존중받고 일하는 사람이 더욱 잘 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일하는 사람’ 즉 노동자를 ‘건폭’이라고 부르면서 구속하고 탄압했다.
대통령 윤석열의 말바꾸기는 이게 다가 아니다. 하지만 언론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묻지 않으니 비판이 있을 리도 없다. 그저 그가 한 말을 그 때 그 때 받아적고 중계방송하기에 바빴다. 기자로서 나태함인가 아니면 비굴함인가? 아니면 말을 바꾸는 이보다 더 심한 사악함인가?
언론은 대통령, 정부 고위직 인사나 정치인의 거짓말과 말바꾸기에 대해 묻고 따져야 한다. 질문은 국민이 언론에 준 특권이면서 동시에 책무다. 국민이 궁금해하는 데 질문하지 않는다면 언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왜 자꾸만 말을 바꾸고 있는지, 앞으로도 계속 말을 바꿀 것인지, 대통령에게 꼭 물어봐주길 바란다. 언론이 계속 묻지도, 따지지도 않다가는 우리나라에도 ‘윤석열 플립-플롭 슬리퍼’가 출시되어 완판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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