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종 서울대 명예교수
우희종 서울대 명예교수

요즘 JMS 정명석의 비행과 다른 사이비 종교를 탐사한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이라는 다큐와 함께 학폭 및 가정 폭력과 여러 유형의 폭력을 담은 <더 글로리>라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전자는 사이비 종교의 현실로서 교주에 의한 피해 상황을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 줌으로써 많은 이들의 공분을 자아냈고, 후자는 드라마적 요소로서 권력과 돈을 가진 자들에 의해 자행되는 일상화된 폭력과 은폐를 보여 주고 이에 대한 복수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자아낸다. 국내외에서 인기 높은 두 작품은 외견상 전혀 다른 내용인 듯이 보이지만 공통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폭력은 폭력의 일상성과 중층구조 속에 합리적 관계의 단절이나 왜곡의 형태로 등장한다. 두 작품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폭력은 대상을 길들이는 것으로서 완성된다는 점과 더불어 가해와 피해의 상대성이다. 이는 폭력에 길들어진 자에게 폭력은 더 이상 폭력이 아니며, 그들은 폭력의 일부가 된다는 것. 반면 폭력에 순치되지 않고 저항하는 것만이 폭력을 드러낼 수 있기에 폭력에 의한 피해와 가해는 선악이 아니라 저항으로 규정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나는 신이다>를 통해 대부분의 시청자는 JMS의 정명석 씨를 악인으로 규정한다. 그는 분명 신도들의 믿음을 이용하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폭력을 행사한다. 현실적으로는 성폭력이 특징적이지만 이는 인간이 지닌 합리성을 파괴한 폭력이고, 이에 길들여진 이들을 보면 인간 삶에 있어서 이성이 우리의 생각처럼 절대적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데카르트식의 이성이 강조되면서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근대 사회야말로 인간이 제대로 발현되지 못하는 비인간적인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는 이성에 더해 감성과 초월성을 말할 수 있고, 위와 같은 폭력 유형은 그 영역 간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선다.

폭력은 인간이 지닌 이성, 감성, 초월성, 그 어느 영역이건 합리성이 깨질 때 발생함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초월성을 다루는 종교에서 비합리적 사례는 너무 많다. 어느 사회에나 본인을 하느님 수준으로 말하는 전광훈 류의 인간과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늘 있어서 이를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라 불렀다 (이단과 사이비 종교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해당 종교에 있어서 주류 집단에 속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후자는 종교를 가장한 사기 집단을 말한다.)

하지만 과연 초월적 영역의 비합리성으로 인한 폭력이 사이비 종교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기성의 주류 종교는 과연 다른 것일까? 주류 종교에서도 소위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에서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정신적으로 의존하고자 하는 신도들을 제대로 이끌어, 개인의 결핍을 넘어 차별과 소외로 가득한 현실을 개선하고 주변과 함께 하는 형태의 신앙으로 성장시키는 역할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주류 종교이건 사이비 종교이건, 믿는 이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주류와 이단, 사이비에서 보이는 폭력이 다르지 않다면 무엇으로 폭력을 규정해야 하는가?

흔히들 이러한 사이비 등장의 배경으로 소위 ‘심리적 결핍’이나 사회적 ‘소외’가 거론된다. 이는 심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합리적 관계 형성의 왜곡이라는 폭력에 놓인 이들이 또 다시 종교적 폭력에 노출되어 그 희생자가 됨을 의미한다. 종교라는 가스라이팅에 의해 길들여진 신도들은 스스로 피해자임을 인식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상태에서 평안함과 기쁨을 느낀다는 점에서 개인으로서의 그들을 피해자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싶다. 그들이 재산이건 몸이건 제공함으로써 평안함과 기쁨을 얻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래가 형성되면 더 이상 폭력이 아니며, 폭력 상황에 놓인 것도 아니다. 외부 제 3자의 눈에는 비합리적이지만, 그들에겐 나름 합리적 거래이자 평형 상태가 존재한다. 이것이 주류 종교가 취하는 방식이다.

이 모습은 사이비 종교의 교세나 교주의 비행 확산에 기여하는 과정에서도 잘 나타난다. 교주와 피해자들 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적극 방조하는 이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폭력에 길들여진 피해자가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폭력을 행사하는 가해자가 된 것이다. 진정한 피해자가 되는 것은 자신들이 사이비 교주가 행한 폭력의 희생자임을 인식하고 저항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쉽지 않다. 종종 사이비 종교 신도 중에 지식인이나 전문직 등 사회적 지위가 있는 이들이 많음에 놀라는 이들을 본다. 하지만 전문직이나 지식인들은 자기 확신과 생각의 틀이 강한 부류다. 경쟁 사회에서 내면의 힘듦과 외로움을 가진 이들이 많고, 가족과도 분리된 채 같이 공감하며 나눌 친구도 별로 없는 이들은 왜곡된 종교로부터 위로받으며 감정적으로 동화되는 순간, 스스로 자부하던 자신의 사리분별력과 판단, 확신이 작동해 더 이상 주변의 합리적 조언이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이 지닌 자기합리화라는 확증편향의 인지부조화는 이를 더욱 공고히 하면서 자신의 사고 틀과 믿음에 대한 강고한 성벽을 쌓는다. 그 단단함은 믿음의 깊이이기도 하다.

<더 글로리>는 이러한 폭력 구조와 특성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폭력의 대상이 된 피해자는 분명 가해자를 전제한다. 학교 폭력만이 아니라 가정 폭력, 공권력에 의한 폭력, 집단 위계에 의한 폭력, 권력이나 돈, 물리적 힘을 가진 자들에 의한 폭력 등 다양한 폭력 상황이 드라마에서 연출되지만, 길들여진 이들에겐 더 이상 폭력이 아니라 일상이 된다. 하지만 저항하는 순간, 진정한 피해자가 되어 폭력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피해자가 또 다른 가해자로 변신하게 될 수 있음을 살필 필요가 있다. 가해자는 상황이 바뀜에 따라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된다. 비록 공적 정의 실현이 어려운 학폭과 같은 상황에서 시청자에게 많은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주었겠지만, 사적 정의 역시 폭력으로 진행됨에 주목해야 한다.

이처럼 폭력은 선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폭력에서 가해와 피해는 순치되는가, 저항하는가의 상대적 상황에서 드러난다. 해당 드라마를 공적 정의가 실현되기 어려울 때 등장하게 되는 사적 복수로만 본다면 비현실적인 상상의 세계에서 얻는 카타르시스로 끝나겠지만, 그 안에 담긴 폭력의 모습과 상대성 및 일상성에 주목한다면 우리 삶 속에 숨 쉬고 있는 폭력의 실체를 보다 잘 살필 수 있고 본인도 모르는 폭력의 가해자 역할을 피할 수 있다.

학폭이나 사이비 종교에 의한 폭력 사례는 결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속성에 있어서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상황이며, 우리 모두가 피해와 가해의 경계에서 오가고 있음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현실 속 폭력의 일상성과 가해와 피해의 상대적 경계의 모호함으로 인한 폐해는 늘 존재하며, 이의 극복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집단 내지 사회의 몫이라는 점이다. 개인이 겪는 집단 층위의 폐해이기 때문이다. 폭력이 선악으로 규정될 수 없다면 사회적 합의로 접근해야 함을 의미한다. 굳이 두 작품을 길게 거론했지만 이처럼 일상의 폭력을 살피다 보면 우리 정치 현실이 얼마나 폭력적 상황인지 알 수 있으며, 왜 잘못된 정치 권력에 저항해야만 하는 지가 분명해지지 않을까 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