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형(곡성에서 농사하는 작가)

새들의 행패에 지다

아침 햇살 쏟아지는 식탁 위로 아기 손바닥 같은 그림자 하나 휙- 지나간다. 본체만체하니 그 그림자, 샐러드 접시 위 햇살을 파닥파닥 방해한다. 슬쩍 웃음이 터진다. 돌아보니 유리창에 바짝 붙어 날갯짓하는 곤줄박이, 벌새처럼 파닥이며 집안을 엿보고 있다. 녀석이 뭘 찾는지 안다. 바로 나다.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는 안 잡고 사람을 잡는구나. 아침밥 내놓으라 협박하는 얼리버드에게 난 번번이 진다. 거실문 열고 땅콩 한 줌 내미니 잽싸게 날아와 손 위에 앉는다. 작은 땅콩 물었다가 얼른 뱉고, 제일 큰 땅콩 골라 물더니 휘리릭 날아간다.

 

호기심 가득한 곤줄박이.
호기심 가득한 곤줄박이.

온 뜰에 감시자 천지다. 내 옷자락만 보여도 앞산 뒷산에서 날아와 앞뒤 좌우를 맴돈다. 느닷없이 어깨에 날아와 앉기도 하고, 뒷짐 진 손을 건드려 놀래키기도 하고, 정수리에 앉아 머리카락을 헝클어놓기도 한다. 다 곤줄박이들이다. 녀석들이 스토커처럼 따라붙는 이유는 딱 하나다. ‘땅콩 내놔!’ 꽃 사진 찍으려고 휴대폰을 꺼내 드니 곤줄박이 한 마리 잽싸게 날아와 휴대폰에 앉는다. 두 손으로 받든 채 어정쩡하니 서 있자니, 못 참겠다는 듯 액정을 콕콕 쪼며 다그친다. ‘내놔! 내놔!’ 이쯤 되면 행패 맞지?

늦겨울, 테라스와 느릅나무에 모이통을 매달고 땅콩 한 줌씩 넣어두었다. 박새, 딱새, 곤줄박이가 아침마다 바삐 드나들었다. 마른 풀 헤쳐 풀씨를 찾고 썩은 나무 쪼아 애벌레를 뒤지던 새들로선 금광의 발견이었겠지. 허기를 견디며 겨울을 연명하던 새들에게 기름진 땅콩 맛을 과하게 들였으니, 다 내 잘못이다. 이제 봄, 꼬물꼬물 애벌레 기어 나오고 날벌레 윙윙거리니 새들 양식은 천지사방에 넉넉할 것이다. 여기서 끊어줘야 사랑이지. 단단히 마음먹지만, 저 천진하고 집요한 애정 공세에 맞닥뜨리면 굳은 결심이 흐물흐물 녹아버린다.

땅콩 물고 날아가는 곤줄박이.
땅콩 물고 날아가는 곤줄박이.

봄 햇살이 좋아 느릅나무 아래 앉았다. 먼 숲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나를 향해 활강한다. 중간중간 날개를 접고 공기를 가르며 파동 곡선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물고기의 유영 같다. 그리운 연인 본 듯 열렬히 날아와 머리 위 나뭇가지에 사뿐 앉는다. 박새다. 유혹한다고 쉽게 넘어올 새가 아닌데, 속내를 들켰구나. 골려주고 싶어서 주머니의 땅콩을 꺼낸다. 조잘대며 포르릉포르릉 날 뿐 다가오지 않는다. 곤줄박이는 헤픈데 박새는 수줍다. 바라되 노골적이지 않고 반기되 들이대지 않는다. 가까이 맴돌 뿐 손을 타지 않는 새, 경계에 서서 의심하는 자, 그게 박새다.

피난처이자 숨구멍

새의 작고 날카로운 발가락이 내 손가락을 꽉 그러쥘 때의 낯선 감촉이 경이롭다. 촉각은 오감 가운데 가장 강렬하고 원초적인 감각 같다. 종(種)이 다른 존재와 접촉하고 그의 신뢰를, 또는 기대를 받는 일은 몹시 설레고 기쁜 일이다. 반려동물과의 교감에서 느끼는 기쁨과 유사한데, 야생 새와의 교감은 희소한 만큼 더 짜릿하다. 저 작은 새한테 내가 ‘두렵지 않은’, ‘안심되는’, ‘기대되는’, ‘반가운’, ‘맛있는’ 존재로 인식되다니! 좋아하는 사람한테 인정받을 때 내가 가치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처럼, 새들한테(개나 고양이도 마찬가지지만) 안전한 대상으로 신뢰받는 경험은 특별하다. 사람한테 받는 인정과 사랑 못잖다.

그러나 인정과 사랑도 나의 해석이다. 새들은 이런 일에 아무 관심도 없다. 새는 나를 ‘움직이는 모이통’ 정도로 여길지 모르겠다. ‘저기 모이통이 나타났다!’ 인간 모이통이 돼도 난 흐뭇하다. 이 모든 일은 사랑하고 연결되고픈 나의 욕망이 벌인 일이다. 수컷 새가 암컷의 환심을 사려고 애벌레를 잡아 바치듯, 나도 몇 알의 땅콩으로 구애의 춤을 추었고 마침내 새들의 환심을 샀다. 고백하건대, 나를 위한 위로였다. 인간사의 절망을 견디려면 어디에라도 마음을 기대야 했다. 사람살이의 고통과 좌절감이 극에 달할 때, 인간의 잔혹성이 야만의 정치로 자행될 때, 조작된 가짜들이 진실을 조롱할 때, 공정의 이름으로 약자가 짓밟힐 때, 차마 눈 둘 곳 없어 새와 꽃과 곤충과 개구리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나의 퀘렌시아이고, 피난처이고, 숨구멍이다. 그러니, 이기적인 위로 맞다.

 

홍벚꽃에 날아든 꿀벌.
홍벚꽃에 날아든 꿀벌.

새를 만나는 동안 나는 우울과 좌절을 잊고, 날 만나는 동안 새는 배고픔을 잊었으니, 잠시지만 서로에게 쓸모 있었으리라. 이제 완연한 봄, 땅콩보다 좋은 것들이 봄 안에 가득하니 우리의 공공연한 밀회도 끝낼 때가 됐다. 스토커 곤줄박이도, 결심 물러터진 나도 당분간 금단의 고통을 견디도록 하자. ‘실망을 견딜 힘’과 ‘외면할 용기’가 필요하다.

꽃을 위해 기꺼이

실패한 기억들이 자동 재생될 때가 있다. 잘 살았던 기억, 남에게 좋은 사람이었던 기억은 왜 다 잊히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자책과 상처의 기억만 이다지도 끈질길까. 마음이 힘들 땐 심호흡하고 삽과 호미를 든다. 흙을 만지고 식물을 돌보는 동안엔 오로지 꽃과 싹과 흙만 생각한다. 어떻게 살릴까, 어떻게 도울까, 어떻게 북돋을까…. 자의식의 과잉엔 몸 쓰는 노동이 답이다. 식물들은 내가 무능하든 모자라든 못났든 못생겼든 개의치 않는다. 식물은 투명하고 밝고 열정적이다. 나는 식물의 성품에 매료된다. 뾰족뾰족 올라온 새싹들, 밤새 활짝 핀 꽃들 앞에서 탄성을 지른다. 흙을 돋우고, 퇴비를 뿌리고, 풀을 뽑고, 물을 준다. 어둡고 옹색한 자리에 웅크린 꽃을 햇살 자리로 옮겨 준다. 실패하고 초라하고 무능했던 나는 간 곳 없고, 돌보고 해결하는 힘센 나, 어른다운 ‘나’가 있다. 비로소 어깨를 편다.

 

새봄의 튤립.
새봄의 튤립.

지난해 꽃 진 자리에서 싹이 올라온다. 아무리 조그맣게 올라와도 어떤 꽃의 싹인지 나는 안다. 노루귀와 동자꽃, 튤립과 꽃양귀비 틈에서 개망초와 갈퀴덩굴, 지칭개와 소리쟁이를 찍어낸다. 내 호미질에 뽑히는 풀이라고 꽃이 아니겠는가. 식물의 생식기, 번식의 용광로가 꽃인데! 풀들의 왕성한 번식력은 무서울 정도여서 지금 뽑아내지 않으면 화초와 작물의 숨통을 누르고 머잖아 나의 정원과 텃밭을 장악할 것이다. 나는 편애하는 꽃과 채소를 살리려고 봄부터 호미를 쥐고 분투한다. 돌보지 않으면 야생에서 도태될 유약한 꽃과 채소들, 찰나의 개화를 담보로 중노동을 요구하는 오만한 꽃들, 이토록 이기적인 꽃들을 사랑하고 말다니.

살려야 할 대상, 돌볼 대상이 있는 한 기꺼이 노동한다. 이 노동엔 지향성이 분명하다. ‘무엇을 위하여’가 있기에 중노동을 견딘다. 사람이 사는 데는 ‘무엇’이 무엇보다 중요해서, 그로 인해 견디고 일하고 꿈꾸고, 기대하고 돌진하고 올인하며 사는 게다. 그 ‘무엇’이 무엇이 되었든 말이지. 그러므로, 살리고 싶다는 것은 살고 싶다는 것이다. 쓰이고 싶다는 것이다. 쓸모없는 존재라는 불안과 소외 대신 나도 한몫을 산다는 자부, 못난 나도 너에게 힘이 될 수 있다는 긍지, 나의 비루함조차 개의치 않는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의 힘으로 사는 것이다. 나는 식물을 살리려 내 어깨를 빌려주었지만, 기댄다는 것은 상호적이어서 식물이 나를 부축해 살리고 있음을 안다. 아무래도 나는 이 보드라운 흙 위에서 생을 마칠 것 같다. 식물처럼, 식물의 잔여물처럼, 퇴적되어 썩을 것 같다. 좋은 일이다.

 

마을 천변의 벚꽃 터널.
마을 천변의 벚꽃 터널.

슬프고 좋은 봄

벚꽃이 만개한 주말, 도시에서 온 차들이 섬진강 벚꽃길에 밀려든다. 나는 사람 많은 큰 도로를 피해 마을 샛길을 찾는다. 우리 마을 천변에는 이곳 사람들만 아는 벚꽃길이 있다. 물길 따라 끝없이 이어진 꽃 터널에 들어서니 만개한 벚꽃 가지 틈새로 오후의 양광(陽光)이 쏟아진다. 숨이 막힐 것 같아 심호흡한다. 숨조차 화사하다. 이 물가를 400년간 지켜온 왕버들도 봄기운으로 회춘하는 중이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꽃잎들이 분분히 휘날린다. 필멸의 봄이 아찔하다.

감이불취(感而不取).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 아무것도. 무엇을 못 가질 수 있을까. 아무것도. 벚꽃 바람 속에 서서 내일이면 흔적도 없을 이 순간을 생각했다. 지극히 짧으며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구나. 봄도, 나도, 당신도.

참 슬프고 좋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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