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건 '판박이'…사법부의 '양식'만 바라야 하나

강기석 민들레 상임고문
강기석 민들레 상임고문

며칠 전 한 형사법정에서 우습다고 해야 할까, 민망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한 기이한 장면이 연출된 모양이다.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재판정 이야기이다. 김 부원장은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으로부터 불법적으로 돈을 받았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이날 재판에서는 돈을 ‘어떻게' 전달했는가가 쟁점이었다. 유 본부장이 골판지에 싼 1억 원 현금 다발을 쇼핑백에 넣어 건넸고 이를 김 부원장이 받아 자신이 입은 외투 속에 숨겨 갔다는 것이 유동규 씨와 검찰의 주장이다. 현금 1억이란 거액을 만져보기는커녕 본 적도 없었을 재판장의 판단에 도움을 주기 위해 검찰은 친절하게도 1억 원 현금을 마련해 유동규 본인에게 시연을 하도록 한 모양이다.  ☞ 유동규 "김용, 외투에 1억 '숨겨' 갔다"…시연해보니 '불가능'

법정을 웃게 만든 1억 원 현금 뭉치

이 기사는 나를 순식간에 13년 전으로 시간이동 시켜버렸다. 한명숙 전 총리를 겨냥한 정치검찰의 1차 공작, 이른바 ‘곽영욱 뇌물사건’의 그 유명한 ‘의자가 돈 받은 사연’이 떠오른 것이다. 이 사건은 공기업 사장이었던 곽영욱이란 인물이 횡령 배임 등의 혐의로 구속돼 수사를 받던 중 자신이 인사 청탁을 위해 한 전 총리에게 5만 달러를 뇌물로 주었다는 자백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곽 씨의 증언은 법정에서 계속 오락가락했는데 압권은 돈 전달 방법이었다. 처음에는 몇 날 몇 일에 돈을 드렸더니 그냥 호주머니에 넣고 가시더라는 것이었다. 한 전 총리는 기가 막혔지만 그 증언을 깔끔히 탄핵할 방법이 없었다. 여러 날 곰곰 생각해 보니 곽 씨가 말한 그날 어느 공군기지를 방문한 공식행사가 있었다는 기억이 되살아났다. 공식 행사였으니 혹시 사진이 있을지도 몰라, 이곳저곳 샅샅이 찾은 결과 드디어 찾아냈다. 그 날의 옷차림은 바지에는 아예 호주머니가 없고 웃옷 호주머니는 장식용 단추만 달린 것이었음이 사진으로 증명됐다. 머쓱해진 검찰이 마지막으로 꺼낸 시나리오가 관저에서 오찬 후 한 전 총리의 의자에 돈을 던져놓고 나왔다는 것이었다.

거짓말은 어설픈 거짓말로 들통이 나게 마련일까, 새빨간 거짓말로 오랫동안 통하는 걸까. 한 전 총리의 경우 ‘의자가 대신 돈 받은 사연’은 재판장이 과감하게 총리 관저 오찬장에 대한 현장검증을 강행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번 김용 부원장 재판에서도 불룩해진 외투에 방청객들의 웃음이 터졌다니 아마도 판사를 속이는 것에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한 사람을 오랫동안, 여러 사람을 한 순간 속일 수는 있어도 여러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기야 우리나라 검사들과 언론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을 잘도 속여 왔으니 그 말도 꼭 맞는 것은 아닐 터.

3월 14일자 <뉴스공장>에서 현근택 변호사는 검찰과 유동규 씨가 김 부원장에게 돈을 전달한 날짜조차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또 시간여행을 했다. 2011년 9월 19일, 한명숙 전 총리를 겨냥한 정치검찰의 2차 공작, 이른바 ‘한만호 사건’의 결심 공판장으로 달려갔다. 그때도 검찰은 한만호 씨가 3억 원씩 3번에 걸쳐 총 9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한 전 총리에게 건넸다고 하면서도 전달 날짜를 특정하지 못하고 4월 초, 5월 초, 9월 초라고 느슨하게 잡았다. 다른 혐의 사실들은 관계자들의 메모, 다이어리, 통신내역, T머니 사용내역, CCTV까지 총동원해 증명하려 했던 검찰로서는 극히 이례적이었다. 피고 측이 범죄현장부재증명(알리바이)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하려는 잔머리다.

 

한명숙 전 총리가 2010년 3월 31일 오전 '5만 달러 뇌물수수 혐의' 재판의 피고인 신문에 참석하기 위해 강금실 전 장관, 유시민 전 장관 등 참여정부 인사들과 함께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2010.3.31 연합뉴스
한명숙 전 총리가 2010년 3월 31일 오전 '5만 달러 뇌물수수 혐의' 재판의 피고인 신문에 참석하기 위해 강금실 전 장관, 유시민 전 장관 등 참여정부 인사들과 함께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2010.3.31 연합뉴스

돈 전달 방법과 날짜, 닮아도 너무 닮은 두 재판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재판 기간 내내 침묵으로 일관하던 변호인단이 드디어 결심공판 최후변론을 통해 완벽하게 알리바이를 증명함으로써 검찰의 불순한 의도를 산산조각내 버렸다. 검찰이 주장하는 3번의 전달 시기 중 9월 초(평일 맑은 날 오후)에 대한 변호인단의 알리바이는 다음과 같았다.

“8월 28일에 자금을 조성해 9월 초에 전달했다는 이야기인데 그 기간 중 휴일(1일, 2일, 8일, 9일)을 모두 빼고 29일, 30일, 31일을 넣으면 아흐레가 남는다. 그런데 5일부터 8일까지 한만호가 외국여행을 갔다. 그해 9월엔 유난히 비가 많이 왔다. 길거리에서 만나 돈을 줬다는 일산 지역에는 1일부터 6일까지 계속 비가 내렸다. 남는 날은 8월의 사흘과 9월 10일이다

8월 29일 오후 한 총리는 국회 대학생 정치체험단 행사에 참가

30일 오후 5시 YTN 생방송 대담에 출연

31일 제주도당 개편대회 등 제주도 행

9월 10일 민주신당 청주 합동연설회 참석”

이 대목에서 방청객 몇 사람이 박수를 쳤다가 법정에서 쫓겨난 것을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나는 2010년 1월 28일~2015년 8월 20일, 무려 5년 7개월 동안, 이명박 정권에서 시작해 박근혜 정권에서 끝난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한 특수부 검찰의 사냥극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 중 하나다. 많은 사람이 여전히 한 전 총리 사건이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한 전 총리 사냥극은 1막이 아니라 2막으로 이루어졌다. 2010년 1월 28일은 1차 사건 ‘곽영욱 뇌물사건’의 재판이 시작된 날이고 2015년 8월 20일은 2차 사건 ‘한만호 정치자금법 위반사건’에 대한 대법원 유죄확정 판결이 나온 날이다.

나는 지금 심한 기시감(처음 일어난 사건인데도 어디선가 이미 경험한 듯한 느낌)에 시달리고 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검찰의 전방위적 사냥몰이가 한명숙 전 총리 때와 똑같이 닮았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표 본인에 대한 기소와 재판이 숱하게 남았지만 김용 부원장에 대한 재판, 곧 개시될 정진상 실장에 대한 재판도 결국은 이 대표가 최종 목표일 것이다.

덮어 씌우는 검찰,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건 피의자 몫

증거를 남기지 않고 은밀하게 오고가는 뇌물사건의 특성상 돈을 직접 주거나 전달한 핵심 증인의 증언이 가장 중요하고, 그 증언을 믿을 수 있느냐 없느냐 여부는 돈이 전달된 날짜, 전달 방법, 장소, 정황 등에 대한 증언의 구체성, 일관성에 따라 판가름될 것이다. 그런데 김용 정진상 두 사람의 공소장에는 전달 날짜는 물론 돈의 액수마저 특정되지 않았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정진상 씨 공소장을 보면 “2014년 4월 경부터 2014년 6.4 지방선거 때까지 ‘수억 원’을 전달”이란 대목이 보인다. 한명숙 전 총리 재판에서도 한만호 씨가 “검찰이 처음에는 5억 원 정도로 하자 했을 때 내가 우겨서 9억 원으로 한 것”이라고 고백한 것과 일맥상통하지 않은가.

이밖에도 한 전 총리를 겨냥한 ‘곽영욱 사건’ ‘한만호 사건’에는 플리바게닝(검찰에게 유리한 증언 대가로 형을 감해 주거나 면제해 줌) 의혹과 심지어 수사 검사의 모해위증교사(증인에게 거짓 증언을 하도록 유혹하거나 위협)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재명 대표와 그 주변 인물들에 대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지금 유동규 씨의 극적인 증언 번복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한명숙 전 총리는 두 사건 모두에서 눈 밝은 판사 덕분에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곽영욱 사건’을 맡은 판사는 총리 공관에 대해, ‘한만호 사건‘을 맡은 판사는 제3차 돈 전달 장소로 지목된 일산 길거리에 대한 현장검증을 하는 등 철저히 공판중심주의로 재판을 이끈 끝에 결국 무죄를 선고했다. ’곽영욱 사건‘은 대법원까지 무죄 판결이 이어졌다.

그러나 ‘한만호 사건’ 2심은 달랐다. 2심을 맡은 ‘나쁜 판사’는 단 두 명의 검찰 측 증인만 부르고 재판을 끝낸 후 “한만호의 검찰에서의 증언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취지 하나로 1심을 뒤집어버렸다. “나는 한 총리님께 돈을 준 적이 없다”는 핵심 증인 한만호의 양심고백을 깡그리 무시해버린 것이다. 한명숙 전 총리는 끝내 2년의 징역을 살아야 했고 정치생명도 끝났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허위 발언을 한 혐의로 기소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2회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3.3.17. 연합뉴스
지난 대선 과정에서 허위 발언을 한 혐의로 기소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중앙지법에서 열린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2회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3.3.17. 연합뉴스

정치검찰의 사냥극에 몰이꾼으로 나설 셈인가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한 공판이 진행 중이다. ‘대북송금 의혹’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사를 진행 중인 모양이고 ‘대장동 사건’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국회에 체포동의안을 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민주당을 흔들기 위해 몇 번이고 반복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고 이에 대해 민주당 일각에서는 일단 판사 앞에 가서 영장실질심사를 받는 것이 옳다는 의견도 나오는 모양이다.

판사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인가. 검사들이 이토록 잔혹한 상황이라면 판사라도 믿는 것이 최후의 피난처일 수는 있다. 판사가 다 균일하게 제 직무에 충실한 착한 판사일 경우 그렇다. 그러나 한 전 총리의 경우에서 보듯 판사도 제대로 된 판사가 있고 ‘나쁜 판사’도 있다. 그렇다면 판사를 잘 만나기만을 바라자는 것인가. 그거야말로 '복불복'의 운에 맡기자는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특정 정치인을 잡기 위한 재판이라면 정치에 오염된 나쁜 판사를 만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는 것이 우리 사법사의 경험이다. 그럼에도 제1 야당 대표를 복불복에 맡길 것인가. 검찰의 사냥극에 몰이꾼으로 나설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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