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인사 조선일보 기고·인터뷰 안타깝고 씁쓸
조선일보 역사와 안티조선 운동 벌써 잊었나
보수엔 행동지침, 진보엔 좌표찍기와 마녀사냥
안티조선 앞장섰던 강준만과 진중권의 '굴종'
지난 몇 년간 주목받는 진보적 청년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거나 글을 기고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나 안타깝고 씁쓸한 경우가 많았다. 조선일보의 역사와 성격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할 수 없는 행동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티조선’ 운동이 활발했던 2000년대 초반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때는 조선일보의 취재와 인터뷰를 거부하는 대규모의 지식인 선언이 몇 차례나 있었다. 민주노총, 전교조, 전국연합 등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조선일보 반대 시민연대’도 만들어졌다. 당시 ‘시민연대’는 “수구 신문 조선일보의 행태가 하도 도발적이고 기괴하여 이를 더 이상 방치해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 시절 보수우파 세력은 <동아일보>나 <중앙일보>도 있는데 왜 유독 <조선일보>에만 그러느냐고 ‘안티조선 운동’에 딴지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단지 ‘평범한 보수적 거대언론’이 아니라 ‘특별한 수구적 족벌언론’이었다. 조선일보는 일제 치하에서 친일 경제인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에 의해 처음 발간됐다.
일제 때 조선일보는 “이봉창의 폭탄 테러에도 불구하고 천황폐하는 무사히 환궁하시었다”(1932년 1월 10일자), “천황폐하의 생신을 경축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다”(1939년 4월 29일자), “한일합방은 조선의 행복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체결한 조약이다”(<월간조선>의 전신 <조광> 1940년 10월호) 등 차마 읽기 부끄러운 기사들을 많이 썼다.
나중에 조선일보는 일제 때의 정간과 폐간 사례를 들먹이며 마치 반일 민족지였던 양 주장했다. 그러나 일제가 정간 조치를 한 것은 박헌영·김단야 등 좌파 사회주의 기자들이 근무했던 1924년~1925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 1년 동안에 정간 조치 대부분이 몰려 있었고, 그 기자들은 곧 조선일보 경영진에 의해 쫓겨났다.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한 까닭은 ‘반일’ 때문이 아니었다. 조선일보는 1940년 8월 11일자 폐간사를 통해 스스로 “(우리가)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최선을 다하고 고민한다)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자랑하고 있다. 조선일보 폐간을 전후로 창간한 월간지 <조광>의 1940년 7월호 권두언 제목은 ‘일본 제국과 천황에게 - 성은 속에 만복적 희열을 느끼며’였다
조선일보는 이런 전력 때문에 해방 이후 특히 인쇄 노동자들의 거부로 복간되지 못하다가 점령군 미국 “군정청의 우호적 지지와 이해 있는 알선에 의하여”(1945년 11월 23일 복간사) 복간됐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 때 <조선일보>는 1972년 10월 유신을 “가장 적절한 시기에 가장 알맞은 조치”(1972년 10월 18일자)라며 환호했다. <조선일보>는 영구집권을 위해 국회 해산·대학 휴교·언론 검열 등 민주주의를 유린한 박정희의 비상계엄령을 “구국의 영단”(1972년 12월 28일자 사설)이라고 칭송하기까지 했다.
1980년 광주항쟁 때 조선일보는 광주 시위대를 “폭도”로 매도하는 데 앞장섰고 전두환을 “새 시대를 열고 새 정치를 펼칠 지도자”(1980년 8월 24일자)라고 찬양했다. 이러한 줄서기 덕분에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은 언론사 사장으로는 유일하게 전두환 정권의 ‘국보위’ 입법회의 의원으로 참여했고, 당시 편집국장 최병렬 등 조선일보 간부들이 전두환 정권 시절 권력의 핵심부에 대거 진출했다.
전두환 정권 7년 동안 조선일보는 초고속 성장을 거듭해 매출액 1위로 뛰어올랐고, 연평균 성장률은 328퍼센트나 됐다. 또 회장 방우영은 1983년 개인소득세 납부 순위 1백 위에서 단 1년 만에 20위로 도약했다. 조선일보의 사주 일가는 지금도 흑석동에 3천 748평짜리 대저택을 갖고 있다.
조선일보는 오래전부터 극우 반공적 주장을 펴는 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대표적인 조선일보 언론인인 조갑제는 “통일은 우리 국군이 평양의 주석궁에 탱크를 진주시킬 때 비로소 성취되는 것”(조선 노보.1997년 6월 5일자)이라는 호전적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북한 핵 문제로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던 1994년에 조갑제는 “북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자위적 선제기습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월간조선> 1994년 3월호)고까지 주장했다.
조선일보는 한국의 지배권력층 중에서 특히 친일파, 군부, 영남 출신 재벌과 정치인 등 권력의 핵심부와 긴밀했다. 한국의 최상위 권력자들은 뒤늦은 자본주의 발전을 이룩한 특성 때문에 민주주의보다는 권위주의에 친화적이었다. <조선일보>는 김윤환, 허문도, 최병렬, 주돈식 등 많은 장관과 정치인들을 배출했다.
조선일보는 보수우파 정치인들에게 행동 지침을 줄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예컨대 주필 김대중은 1999년 7월 31일자에 쓴 <이회창론>이란 칼럼에서 “이회창 총재에게 정확한 행동 지침을 제시(했고)···이 총재는 그 칼럼 내용을 그대로 따라”(미디어 오늘. 1999년 8월 12일자)했다고 썼다. 조선일보는 최근까지도 보수정당과 우파 정치인들에게 전략 전술적 지침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반면 <조선일보>는 자신들의 눈 밖에 난 정치인들을 낙인찍고 마녀사냥을 해서 쫓아내는 데도 열심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김영삼 정부에서는 한완상 부총리를, 김대중 정부에서는 최장집 대통령 정책자문과 이재정 여당 정책위 의장 등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고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좌표찍기와 몰아내기 행태는 여전하다. 안기부(국정원의 전신)와 같은 폭력적 국가기구와의 협력관계도 유명하다.
조갑제는 1980년대부터 안기부의 수사 발표문을 손봐 주고 고급 정보를 얻어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문수사로 악명 높던 정형근은 동아일보 기자에게 “내가 (안기부) 재직 시절 조갑제 씨는 우리 수사 발표문도 손질해 주고 자문도 해줄 정도로 능력이 있었다”(말. 1999년 1월호)고 털어놓은 바 있다. 이런 협력관계는 오늘날의 긴밀한 ‘검언유착’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추정을 하게 한다. 오늘날 정치검찰과 조선일보는 거의 한 몸처럼 보일 정도이기 때문이다.
보수우파 세력은 ‘안티조선’ 운동이 활발하던 당시에 그것을 ‘언론 탄압이자 언론 자유에 대한 도전’이라며 조선일보를 방어했다. 오늘날에도 시민사회의 ‘언론 개혁’ 요구를 ‘언론 탄압’으로 프레임화하는 것은 여기서 비롯됐다고 하겠다. 조선일보는 언론 자유를 탄압하며 언론 장악을 추진하던 보수우파 정부들과 언제나 긴밀히 협력해 왔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조선일보의 지향과 역사 자체가 ‘민주주의와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이런 조선일보에 맞서는 것은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지키는 과제와 분리되기 어렵다. 오늘날 조선일보는 윤석열 정부 들어서서 벌어지는 모든 반동적인 흐름에도 가장 앞에 서 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을 마녀사냥 했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10·29 이태원 참사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덮는 데도, 민주노총을 ‘폭력적 종북집단’으로 모는 데도 최선봉에 서 있다.
2000년대 초반에 ‘안티조선’ 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던 지식인들이 있었다. 강준만과 진중권이 대표적이다. 이들 지식인은 오늘날 그 태도를 180도 바꾸었다. 조선일보와 긴밀한 공조 관계를 보여주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것은 조선일보의 성격이 바뀐 게 아니라, 강자에게 비굴하게 고개 숙이고 마는 개탄스럽고 무원칙한 지식인의 변절을 보여줄 뿐이다.
사회의 진보와 개혁을 추구하는 청년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은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거나 글을 기고하려고 할 때 조선일보의 역사와 본질을 돌아보고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들의 행위가 조선일보의 역사적인 피해자들에게 남길 상처를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그걸 알면서도 조선일보의 영향력과 힘이 주는 유혹, 엄청난 원고료 등을 무시할 수 없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라면 더는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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