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룡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이 통탄할 것

나라를 빼앗겼을 때, 안동 일대에 지닌 재산이 어마어마한 양반 분이 독특하게 생각했다. 망국의 처지에 국내에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만주로 가야 독립운동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추위가 이만 저만이 아니고, 거친 땅에서 농사 지어야 하고, 중국 비적이 득실대고 일제의 힘이 뻗쳐 있는 만주에서 살려면 3가지를 생각해야 했다.

① 얼어 죽을 각오
② 굶어 죽을 각오
③ 맞아 죽을 각오

이런 생각을 하신 양반 분은 안동의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선생이다. 전통 유학에 정통했으나, 나라가 망한 국난을 겪으며 서양 근대 사상을 적극 수용하여 자유주의, 공화주의, 대동사상을 합친 실천적 독립운동을 대안으로 생각했다.

석주 선생은 자신이 쓴 책 「자유도설(自由圖說)」에서 "자유의 반대는 노예이니, 자유를 완전히 보존하고자 한다면 우선 노예의 습관을 혁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 땅에서 2천 년간 이어온 노예의 삶을 끝내고 참된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그 어마어마한 재산을 팔았고, 가기 전 자가의 노비문서를 불태워 노비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결단을 했다. 진정한 생각으로 숭고한 인생을 사신 분이었다.

나라를 "백성의 공공 재산"으로, 백성을 "나라의 주인"으로 규정하여, 왕조 국가의 군주 중심 사고에서 벗어나 국민이 국법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혁명적인 근대 정치사상의 선구자였다.

이에 완고한 안동 유림(儒林)은 상투를 자르고 신학문을 수용하는 석주 선생을 이렇게 비판했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했거늘 감히 머리카락을 잘라?”
“거기다가 공자·맹자는 버려두고 서양 오랑캐 교육을?”“상놈들은 물론이고 아녀자들까지 함께 공부를 하다니, 예부터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했거늘!”
“상놈들에게 권리와 평등을 주고. 아이와 아녀자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남자와 여자는 분별이 있어야 하고, 양반과 상놈은 엄연히 신분 차등이 있어야 하는데 가당찮다!”』

역사극 <서간도의 바람소리>의 대사 일부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일대기를 축약한 연극으로 실제 역사적 공간인 안동 임청각 안마당에서 펼치는 실경 역사극이다.

 

임청각 마당에서 열린 '서간도의 바람소리' 약식 공연. 담벼락에서 있는 이가 (사)안동문화지킴이 이사장 김호태 선생이다. 연극의 대사를 썼고 연극을 이끌어 가고 있다. 25명 이상 단체 답사를 오면 버스비, 숙박과 식비를 안동문화지킴이에서 상당 부분 지원하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 송필경
임청각 마당에서 열린 '서간도의 바람소리' 약식 공연. 담벼락에서 있는 이가 (사)안동문화지킴이 이사장 김호태 선생이다. 연극의 대사를 썼고 연극을 이끌어 가고 있다. 25명 이상 단체 답사를 오면 버스비, 숙박과 식비를 안동문화지킴이에서 상당 부분 지원하는 게 가능하다고 한다. 사진 송필경

<사) 안동문화지킴이>는 문화유산 보호·보존, 문화 교육·체험, 실경 역사극 주관 등을 담당한다. ‘안동문화지킴이’의 배려 덕분에 지난 토요일(10.18), 이 실경 역사극을 안동에서 있었던 민족문제연구소 수련회 답사 과정 중에, 임청각에서 보았다.

석주 선생은 나라를 빼앗기자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망명하며 "공자·맹자는 시렁 위에 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고 할 정도로 실천을 우선하는 혁신 유림의 면모를 보였다.

의병 항쟁 단계부터 국권 회복의 방법은 무장 투쟁이라고 확신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하고 서로군정서 등 독립군 기지 건설에 주력했다.

안동 석주 선생과 망국을 극복할 역사를 나란하게 생각한 분이 계셨다. 서울 종로의 우당 이회영(友堂 李會榮; 1867〜1932) 선생이다.

두 분 모두 조선의 명문가로 1911년 전 재산을 정리한 돈을 들고 만주로 떠났다. 석주 선생은 53세, 우당 선생은 44세였다. 당시로 보면 노인과 중장년의 몸이었다. 석주 선생은 이승만(1875년 생)보다 17세가 많았지만 훨씬 더 근대적이고 혁신적이고 실천적이었다.

두 분은 서간도 지역에 한인 자치 교육 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공동으로 조직하고,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만주 무장 독립운동의 핵심 산실이었다.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을 주도하며 일제에 대항하는 노선을 취했다.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마땅히 져야 하는 사회에 대한 책임과 솔선수범의 도덕성을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 한다.

이는 단순히 부와 명예를 누리는 상류층이나 사회 지도층이 베푸는 온정이나 시혜를 넘어, 그들의 높은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임과 의무를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철학적 개념이자 윤리적 규범을 의미한다.

석주 선생은 우당 선생과 함께 망국이란 짙은 어둠에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횃불을 밝히셨다.

우당 선생과 이육사, 그분들에 버금가는 많은 독립유공자가 즐비한 곳이 안동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안동은 가장 빼어난 지역이라 해도 한 치의 과장도 없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면서, 일본 통치에 무릎꿇지 않겠다는 뜻을 세운 저항을 <자정순국(自靖殉國)>이라 한다. 목숨으로 치욕을 씻은 고결한 분들이다. 전국에서 자정순국 서훈자가 61명이다. 안동을 중심으로 한 경북 지역 자정순국자는 17명이다. 다음 전북 11명, 전남 8명이다. 서울은 6명이다.

그러나, 지금 안동을 비롯한 경북 지역이 일제에 빌붙어 얻은 금력과 권력을 대물림하여 이어온 매국노 세력들의 정치적 텃밭이 되어 있다.

이 지역에서 지금 역사가 왜 이렇게 흐르는지를, 어떻게 그 숭고한 역사의 영광을 되찾을지를 우리는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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