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1월 10일은 의열단 창립 106주년

1919년 11월 20대 청년 10명이 ‘작탄투쟁’ 결의

김상옥 의사 등 23차례 식민 침탈 기관·인사 공격

일제 수형기록카드에서 보이는 기개있는 모습들

누가 목숨 걸고 싸운 이들을 테러리스트라 하는가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11월 10일은 의열단 창립 10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영화 <암살>이 천만 관객을 넘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을 때, 많은 분들이 김원봉이란 이름을 처음 알았다고 하셨는데요. 하지만 역사 교과서에는 그의 이름과 활동이 실려 있습니다. 영화에서 조승우 배우가 자신을 소개할 때,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라고 합니다. 실제로 의열단 창립단원 가운데에는 밀양 출신이 많았어요.

 

김원봉
김원봉

무장 독립투쟁 결의한 10인의 용사들, 4인이 밀양 출신

1919년 11월 9일 밤부터 이튿날 새벽까지 중국 지린시에서 창단모임이 열렸습니다. 그동안 창립 단원들의 숫자와 명단에 대해서 다양한 논란이 있었는데요,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 이래 13명으로 쓰여 있는 경우가 많으나, 최근에는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배동선, 한봉인, 권준 등 3인은 제외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밀양의 의열기념관에도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재기,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김상윤, 신철휴, 서상락 등 10인으로 전시되어 있어요. 워낙 비밀리에 움직였던 조직이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김원봉을 비롯한 당사자들도 기억에 의존하다 보니 수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고 할 수 있어요.

10명의 창립단원 가운데는 의백 김원봉을 비롯하여 네 사람이 밀양 출신입니다. 그들보다 선배 세대로서 이들에게 행동 방향을 제시하고 조언을 계속해 주었던 황상규, 김대지 고문도 밀양 출신입니다. 그들이 창단 후 밀양과 부산에서 첫 거사를 한 것은, 그곳이 그들에게 익숙한 지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창립단원 가운데는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많았는데요. 피를 나눈 형제처럼 굳은 의리로 뭉치고자 했고, 서로 의형제를 맺고 김원봉을 맏형이라는 뜻의 '의백(義伯)'으로 정했습니다. 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며, 무력항쟁 위주의 독립운동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었어요.

 

‘작탄투쟁’에 목숨 내놓은 10대·20대 조선 청년들

1919년 2월 27일 지린에서 대한독립의군부가 결성되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위한 주요 기관과 인물에게 총을 쏘고 폭탄을 던지는 ‘작탄투쟁’으로 방향을 설정했지요. 대한독립의군부 확대 조직인 조선독립군정사의 재정 책임자 황상규가 1919년 6월경부터, 소수 정예의 결사대 창설을 추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의열단입니다.

의열단의 결정적인 자금은 대구에서 온 이종암에게서 나왔어요. 그는 대구은행의 출납계 주임으로 근무하다가 은행돈 1만 900원을 가지고 만주로 망명해 왔습니다. 흔히 의열단 창립모임이 열린 곳으로 지목되는 ‘중국인 반씨의 집’은 사실 이종암이 빌려 살고 있던 집이었기 때문에 ‘이종암의 셋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열단은 이렇게 죽음을 무릅쓰고 암살과 폭탄 투척을 통한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행동대로 출범하였습니다. 당시 그들의 나이는 대부분 20살을 갓 넘은 청년들이었고, 가장 나이가 어린 윤세주와 강세우는 아직 10대에 불과했어요. 고문 역할을 했다고 하는 황상규와 김대지도 30살이 채 되지 않았어요.

그들을 출생연도로 정리하면 황상규(1890), 김대지(1891), 곽재기(1893), 서상락(1893), 한봉근(1894), 이종암(1896), 김상윤(1897), 신철휴(1898), 김원봉(1898), 이성우(1899), 윤세주(1900), 강세우(1901) 순입니다. 의백에 추대된 김원봉이 나이가 어린 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김원봉, 곽재기, 신철휴, 한봉근이 해방 후에도 살아 남았습니다. 처음 약속대로 단 한명도 변절하지 않았어요. 창립 단원 가운데 북한 정권에서 각료를 지내 국가보훈 기본법에 의거하여 서훈을 받을 수 없는 김원봉과 중국군 장교가 되어 이후의 활동을 알 수 없는 강세우를 제외하고 모두 서훈을 받았습니다.

23차례 의열거사 불구, 별로 남아 있지 않은 투쟁의 기록들

의열단은 창단한 지 얼마 뒤 근거지를 지린에서 베이징으로 옮기고 상하이 지방에서 단원들을 포섭하여 1924년 경에는 150여 명으로 단원이 늘어났다고 하는데요. 그들은 모두 23차례의 의열거사를 기획, 실행하면서 일제의 강압통치에 분연히 맞섰습니다. 대표적 인물로 김상옥, 김시현, 김익상, 김지섭, 박재혁, 이육사, 최수봉, 현계옥 등이 있지요.

그런데 일제에 의해 늘 체포의 위험에 처해 있는 의열단원들은 제대로 사진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젊은 시절의 기개있는 얼굴을 기억하기가 힘들었어요. 그런데 2015년 당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관장이었던 박경목 충남대 교수가, 국사편찬위원회가 소장하고 있는 서대문형무소 수형기록카드에서 찾아낸 사진이 주목을 끌었습니다.

1920년 7월 5일에 체포된 의열단 부단장 곽재기의 카드에는 사진란이 비어 있고, 뒷장의 기록에도 죄명만 ‘치안유지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런데 그의 카드 앞면 사진 부착란에는 그의 사진이 없는 대신 ‘(의열단원) 사진은 정이소(鄭利逍)를 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정이소의 카드에 바로 김원봉을 비롯한 의열단원 사진이 복사되어 부착되어 있어요. 그런데 정이소라는 인물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의 카드 뒷면에 아무 기록도 없다는 것인데요. 그가 체포된 신분이 아니었음을 말하는 것이지요.

 

배신의 기록물 속에 나타난 ‘멋진 친구들’의 모습

정이소의 수형기록카드에 의열단원 단체사진을 복사해서 부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명확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제 경찰이 당시 국내 잠입활동으로 맹위를 떨쳤던 의열단 단원들의 인상착의를 파악하여, 관련사건 발생 시 신속한 검거를 도모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김익상의 사진을 우측 하단에 따로 수록한 것도 그 이유일 것입니다.

사진 속의 인물 가운데 김원봉, 곽재기 이외에도 강세우와 이성우는 창립단원이었는데요. 1919년 11월 의열단 창단 직후 김원봉, 이성우가 상하이로 향하였고, 곽재기도 상하이에서 합류하여 폭탄 입수와 제조 활동을 펼쳤습니다. 1920년 3월 김원봉에 의해 김기득이 의열단에 참여하게 되었고 5월 중순에는 곽재기가 거사를 위해 국내로 입국했어요.

 

이 사진은 그간 알려지지 않은 의열단 결성 초기 단체사진입니다. 의열단 창단 직후 1920년 3월부터 5월초 사이에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사진관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의열단원들은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는 사격장에서 권총으로 사격연습을 하였고, 사진을 잘 찍지 않았지만 간혹 기념촬영을 하는 경우에는 원판을 꼭 회수하였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정이소와 함께 찍은 사진이 일제 경찰에 입수되어 1924년 1월 11일에 복사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사진 속 인물들의 이름 및 가명들이 특정되어 있는데요. 이는 누군가 이 사진을 밀고했거나, 아니면 체포되어 진술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정이소가 체포되어 사진 속 인물들을 자백하고 그 댓가로 석방된 것이 아닐까 추측됩니다.

의열단 투쟁은 민간인 학살 아니라 외세 침탈에 대한 항의

김영범 대구대 명예교수는 정이소가 김원봉이 창립단원 13인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배동선일 가능성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사진의 구도가 정이소를 중심에 두고 다섯 명이 둘러싼 모양새인데, 이는 의열단원 5명이 그를 매우 중시했음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이소가 배동선의 가명이거나 그 반대일 수 있지요.

<아리랑>의 저자 님웨일즈는 김산이 묘사한 의열단원들의 모습을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며,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의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다”고 기록했는데요. 위 사진에서 김원봉은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중국식 복장을 하였지만, 나머지 단원들은 깔끔한 양복에 잘 정돈된 머리 모양으로서, 책의 내용과 흡사합니다.

의열 투쟁은 일제 식민 통치에 맞서 개인이나 소집단 비밀결사가 뜻을 모아 일제 관공서에 폭탄을 던지거나 일제 고관을 암살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약자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지면서 항의하고 분노를 표출한 행위인 것이지요.

식민지 민중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행동이 테러인가

이들이 폭력을 사용했기에 테러라고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테러란 원래 권력자나 국가 같은 강자가 누군가를 발밑에 두고 지배하려고 공포심을 불어넣는 전략입니다. 약자의 전략이 될 수 없어요. 일제에 식민통치를 포기하라는 경고를 보내고 국내 민중에게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던 것입니다.

"일제 통치가 길어지며 변절자도 많이 생기고 민족정기가 흐려졌잖아요. 그럼에도 의열투쟁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체포된 뒤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이렇게 의로움을 위해 온몸을 바치는 모습은 조선 민중에게 올바름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면서 정의를 환기시켰죠. 꺾이지 않는 정신을 보여준 거죠." 김영범 교수의 평가입니다.

사실 독립운동을 다루는 영화 및 드라마를 만들 때, 의열단이 없었다면 소재가 매우 제한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목숨을 건 투쟁의 역사가 영화 <암살>, <밀정>을 비롯한 재미있고 다양한 콘텐츠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의열단원들의 개인적 특징을 이끌어낸 캐릭터들도 매력이 있어요.

 

2018년에 밀양의 김원봉이 살던 집 자리에는 의열기념관이 설립되었어요. 바로 옆에 살았던 윤세주의 집 자리에는 의열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런데요, 밀양시에서는 의열단 창립 기념식이 공식적으로 예정되어 있지 않다고 해요. 나름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남겨진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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