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 ㉑ 연재를 마치면서
미국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한국군
전략에 관해 목소리를 못 낸 싸움꾼 한국
베트남 전쟁의 아픔 치유에 국회 나서길
베트남 참전에 대한 깊이 있는 교육 필요
[베트남 참전 60돌] 시리즈는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과 미국의 동맹 관계를 1968년까지 살펴봤습니다. 그 후로 전쟁은 5년 더 계속됐지만, 1968년 봄을 베트남 전쟁 전반의 끝자락으로 다루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68년 존슨 정부가 끝나고, 1969년 취임한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 전쟁을 다른 차원에서 접근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더 많은 무기를 주고 남베트남군을 전진 배치하면서 미군을 뺐습니다.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Vietnamization)'를 대의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베트남 분쟁을 미국화 해놓고, 전쟁에서 승리의 가능성이 없으니, 그제서야 베트남 전쟁이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물건이 망가지고 나니, 이게 본래 네 것이었잖아 하면서 책임을 미뤘습니다. 전쟁을 본래 위치로 돌려놓겠다고 했는데, 이미 베트남은 극한 폭력의 장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닉슨은 역시 '교활한 닉슨(Tricky Dick)'이란 별명 값을 했습니다. 닉슨은 선거 때 한 감군 약속을 지키는 모양새를 갖추었습니다. 미군 병력은 줄이면서 폭력 수단과 행사는 더 늘렸습니다. 미군을 빼서 반전주의자들을 무마하는 척하면서, 실제는 전쟁을 심화해서 하노이, 베이징, 모스크바에 전의를 더 확실히 했습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전사자의 60%가 닉슨 정부 때 발생한 이유입니다.
베트남 분쟁 처음부터 지속된 문제였습니다. 남베트남은 공산 세력의 도전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습니다. 아니 능력보다 의지가 없었다고 해야 합니다. 수십만 남의 군대가 와서 싸워주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달러가 유입되어 나라를 지탱해 주는 상황에서 전쟁은 벌써 돈벌이 난장으로 변했습니다. 큰 아들은 민족 해방 전선에, 작은 아들은 남베트남 군에 소속되어 동생이 형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미군(또 한국군)이 떠나갈 때까지만 버티자고 가족이 의기투합했다는 얘기는 우스개가 아니었습니다.
결국 전쟁에서 향정신성 약품과도 같은 공중 폭격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상에서 해결책이 없으니, 공중에서 분풀이하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미식축구의 수비수인 라인배커(Linebacker)란 명칭을 단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공격이 최고의 수비란 뜻을 담은 작전명입니다. 북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를 중심으로 맹폭을 가하고, 하이퐁 항구 등에 기뢰를 투하해 외부 지원을 차단하려 했습니다.
남베트남의 공폭도 이어졌습니다. 베트남 비극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아이콘이 된 아래 사진 '전쟁의 공포(Terror of War)'는 1972년 남베트남 공군이 민간 마을에 잘 못 투하한 네이팜탄의 피해를 말해줍니다. 베트남 전쟁의 '베트남화'는 처음부터 그 효력을 의심했습니다. 전쟁 의지가 약한 군대에 무기만 많이 쥐여준 형국이었습니다.
확전의 절정은 1970년 캄보디아 침공이었습니다. 공산 세력이 중립국 캄보디아를 통해 병력과 군사 물자를 남쪽으로 침투시킨다며 거의 10만 명의 남베트남과 미국 연합국이 캄보디아에 밀고 들어갔습니다. 공중에서도 '융단 폭격'이라 부르는 맹폭을 가했습니다. 1969년부터 1973까지 50만 톤의 폭탄을 캄보디아에 투하했다고 추산됩니다.
닉슨의 이 결정으로 캄보디아 정국은 더욱 불안해졌습니다. 공산 세력으로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크메르 루즈(Khmer Rouge)'는 남베트남군과 미군 또 미국이 지원하는 론 놀(Lon Nol) 세력을 상대해 싸우면서 전력이 강화됐습니다. 결국 캄보디아 내전에서 승리한 크메르 루즈는 1975년 '킬링필드'라 불리는 캄보디아 집단 학살을 자행합니다. 800만 명 인구의 약 25%가 희생됐다고 추정됩니다. 이 비극에 대해 미국은 일정 책임이 있습니다.
닉슨은 감군이란 가면 뒤에서 확전하면서, 동시에 데탕트를 통해 북베트남에 압력을 가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오가는 자체가 하노이에 스트레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1973년 하노이는 휴전에 합의합니다. 돌아보면 하노이는 패배를 인정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체면을 지키면서 베트남을 떠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전쟁에서 벌어진 이 중대한 전략 변화 과정에 한국은 전혀 존재감이 없었습니다. 닉슨이 매크로(Macro) 차원의 전략을 추구하는 동안 한국군은 땅 위의 마이크로(micro) 싸움꾼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미국과 북베트남이 전쟁을 끝내는 과정에서 제2 참전국 대한민국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밀림의 용사들은 더 이상 전쟁의 결정적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감군이 이루어져도 지상전은 계속된다는 메시지 전달자였습니다.
타국에서 온 전략적 목소리 없는 싸움꾼 한국의 정체성은 이미 1968년 1월 드러났습니다. 1월 21일 북한의 무장 군인 31명이 한국의 대통령을 암살하려 서울에 침투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박정희는 응징을 원했습니다. 미국은 절대 반대였습니다. 베트남 전쟁도 힘겨운데, 한반도에서 군사 충돌이 발생하면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미국은 추가 군사 지원으로 박정희를 주저앉혔습니다. 응징을 위한 남한의 군사 행동을 완전 차단했습니다.
이틀 후 1월 23일 미국의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동해에서 북한에 피랍됩니다. 미국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푸에블로호 사건은 한국 정부와는 별개 사안이란 결론을 내립니다. 성탄절 전까지 북에 억류된 승무원들을 미국으로 귀환케 한다는 전략으로 북과 협상했습니다. (실제로 북한에 억류됐던 승무원들은 그해 12월 23일, 11개월 만에 귀환했습니다.)
논리적으로 억지입니다. 남북 분단과 대치라는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에 남한을 배제하기로 한 것입니다. 지금도 진행 중인 남한을 배제하고 미국과 직접 상대하려는 북한의 전략은 이미 1968년 윤곽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가 미국에 항의했습니다. 미국이 북한에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 자체가 한국의 방위를 위협한다고.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도발에 대한 응징과 억압보다 남한을 눌러 앉히는 게 더 중요했습니다. 박정희는 베트남에서 한국군을 철수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돌아온 답은 '한국의 주제를 알라'였습니다.
1968년 2월 17일 존슨 정부의 최고 외교·군사 정책 담당자들이 존슨과 백악관에서 두 시간가량 회의를 했습니다. 이 회의 기록은 '최고 비밀(Top Secret)'로 분류되었습니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는 박정희에 대한 성토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됩니다.
차기 국방부 장관으로 지명된 클라크 클리퍼드(Clark Clifford)는 "…남한 사람들 때문에 골치가 좀 아프다. 한국인들은 미국이 한국 방위를 위해 6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고 (한국전쟁 당시) 수천 명의 미군을 희생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성토가 이어집니다. "한국은 우리가 그들을 돕기 위해 한국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찌 된 일인지 그들이 우리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클리퍼드는 한국에 누가 시혜자인지 확실히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미국은 '잠깐! 미국이 당신들을 도우려고 거기 한국에 있고, 10년 넘게 여러분을 도와왔다'고 확실히 해두자"고 건의했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존슨의 불쾌감이 튀어나왔습니다. 미국의 1.21 무장간첩 침투와 푸에블로호 피랍에 대한 존슨의 반응에 불만을 표시한 박정희와 회담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사이러스 밴스 (Cyrus Vance) 국방부 차관에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박정희더러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미국의 당면한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베트남 철군 하겠다고 하면, 한국에서 미군 병력을 철수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러스크 국무부 장관 차례였습니다. "미국과 같은 강대국이 한국과 같은 작은 동맹국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나?" 한국이 미국을 향해 전략을 운운할 위치가 아니라는 말로 들립니다.
Clark Clifford: …I am getting a few pains in my tail about the South Koreans. They should remember that we have kept 60,000 men and lost many thousands of American lives in defense of South Korea.
It just seems to me that South Korea should know that we are over there to help them. Somehow, it seems to them that they are helping us.
We must say, wait just a minute, we are there to help you and we have been helping you for over a decade.
The President:…Park must understand our problems. Cy (Cyrus Vance) must make it clear to him that this talk of pulling out of Vietnam would cause us to pull men out of South Korea.
Secretary Rusk:…how does a great power like the U.S. avoid becoming a satellite of a small allied power, such as Korea.
위의 기록을 읽다 보면 다음 질문들을 억누르기 어렵습니다. 주한 미군이 한국을 위한 미국의 시혜라고요? 냉전의 최고 긴장 지역 중 하나인 한반도에서 대륙 공산 세력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자유세계의 보루로서 미군이 존재한다는 것이 전략적 근거 아니었나요? 자유세계를 향한 칼끝과 같다고 한 한반도에서 그렇게 쉽게 미군 철수가 이루어질 수 있나요?
또 베트남에 있는 한국군에 대해 미국은 감사해야 하지 않나요? 답은 나와 있었습니다. 한반도에서의 군사 행동에 대한 결정권은 오로지 미국에 있었습니다. 한국이 아무리 베트남에서 '혈맹'이어도 관계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때도 미국은 더 많은 한국군을 베트남에 투입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1년 임무를 마친 한국 병사들을 민간인으로 고용해서 후방 지원에 투입하려는 방안도 진행되었습니다. 1년 임무를 마친 장병들의 귀국을 늦춰 실제로 병력을 늘리는 꼼수도 논의됐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이 또한 '월남 특수'라며 응했지만, 미국은 "가격표가 너무 비싸다(much too high)"며 병력 추가 계획은 접었습니다. 이미 존슨 정부는 '구정 공세' 이후 아무리 폭력의 규모를 늘려도 적을 이길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존슨은 3년 지속된 북폭을 중단하고, 4월에는 재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어 파리에서 휴전 회담을 시작합니다. 이 와중에 북베트남이 '괴뢰군'이라며 논외로 취급한 한국의 목소리는 없었습니다. 어른들 말하는데 애들은 끼지 말라는 투의 메시지였습니다.
존슨 시대가 지나고, 1969년부터 닉슨은 공격 수위를 높여서 소위 명예로운 출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닉슨이 거시적 전략을 펼치는 동안 1969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 전사자는 2176명이 더 늘어났습니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 희생자 5099명의 약 42%를 차지합니다. 휴전 회담을 위해 지상에서 열심히 싸워준 형국입니다. 69년부터 73년까지 결국 한국군은 미국이 오라면 오고, 싸우라면 싸우고, 가라면 가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의 베트남 전쟁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일지도 모릅니다. 민족해방전선=공산당 팽창주의, 남베트남=남한, 호찌민=김일성, 베트남의 17도선=한반도의 38선이라며 맺은 남의 전쟁 베트남에서의 한미 동맹은 전략적 근거가 약한 피해망상이었습니다. 미국의 프로파간다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연상케 하는 현재 미국의 프로파간다는 'MAGA'라 불립니다.
이제 베트남 참전이 남긴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취재 경험을 나눕니다. 10년 전 필자는 주월한국군 사령부 부사령관을 지낸 김용휴 예비역 장군(이하 존칭 생략)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는 미국 뉴저지주에서 거주하다 2022년 사망했습니다. 그에게 베트남에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관해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답은 예상에서 크게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1. 양민과 베트콩(민족해방전선 게릴라)을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적 10명을 놓쳐도 양민 한 명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작전에 임했다. 2. 이 상황에서 불가불 민간이 군사 작전의 피해를 보았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웠지만 고의성은 없었다. 3. 공산 세력이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한다며 심리전을 폈다. 4. 한국군 자체 조사에서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필자는 구체적으로 청룡 부대원들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베트남 피해자 증언, 미 정부 및 민간 조사 결과는 물론 일부 부대원들의 사실 인정을 언급하면서 같은 질문을 거듭했습니다. 모르쇠로 버틸 수만은 없다는 판단에서인가? 김용휴는 어렵게 한마디를 던졌습니다. "청룡부대 그놈의 자식들..."
무슨 뜻이냐고 묻자, 그는 "골치 좀 썩혔다"며 더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하던 그의 표정을 오래 기억합니다. 마치, 골칫덩이 자식의 일탈이 문제가 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부모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미워도 내 자식 아닌가 하는 뉘앙스가 강했습니다. 꼭 일탈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 참전에 대해 한국 사회는 반세기 이상 '팔은 안으로 굽어야 한다'는 자세를 유지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명령을 받은 자식의 잘못된 행동이 초래한 아픔과 피해, 또 역사적 비난은 부인하거나 덮는다고 사라질 성격이 아닙니다. 자식의 행동을 공개하고 그가 남긴 상처에 대한 치유책을 찾아야 합니다.
이 과정에 국회의 역할이 요구됩니다. 참전 60주년, 베트남 전쟁 종결 50주년을 맞은 지금 입법부가 나서야 할 때입니다. 한국군은 국회 동의로 베트남에 갔기 때문입니다. 의회 민주주의의 책임이고 힘입니다. '결자해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국회의 베트남 참전 입법 청문회를 건의합니다. 베트남 전쟁 참전 문제 해결과 치유를 행정부와 사법부에 떠맡길 수는 없습니다.
제20대와 21대 국회 때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입법 시도가 있었고, 제22대 국회에서도 해당 법안이 발의될 전망이지만, '민간인 학살'에 강조점이 찍혀 있어 논란 속에 파묻힌 상태입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대한 진실 규명의 포럼이 되었던 일명 풀브라이트 청문회(Fulbright Hearings)를 모델로 삼을 수 있습니다. 1966년부터 1971년까지 5년에 걸쳐 미국 상원 외교 위원회(United States Senate Committee on Foreign Relations)는 다양한 증인들을 불러 전쟁의 원인과 전장의 실상, 참전 병사들의 체험을 텔레비전 중계를 통해 미국민에게 알렸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전 여론 형성에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습니다.
한국 국회가 청문회를 열어 네 개의 법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합니다.
첫째, 베트남 전쟁과 관련된 국가 문서의 공개 절차에 대한 입법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둘째, 베트남 전쟁 연구 기관 설립을 위한 입법입니다. 베트남에 파병된 병사들의 수당과 보상금을 국가가 일부 착복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자료 분석을 통한 연구가 이루어져 이 논란에 대한 확실한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트남 참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피해에 관한 연구도 더 체계적으로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연구소와 더불어 미국의 베트남 참전 병사들을 판단이나 심판없이 기억하기 위한 워싱턴 D.C. 소재 'Vietnam Veterans Memorial' 같은 장소도 같이 마련되었으면 합니다.
셋째, 베트남 전쟁 참전 당신 고엽제 피해를 연구하고, 피해자를 치료하는 국립 의료 기관이 필요합니다. 현재의 신체적 증상과 고엽제와의 인과관계 증명이 어렵다는 앵무새 답으로 여러 질병을 호소하는 참전 병사들의 실망과 분노를 누를 수는 없습니다.
넷째,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에 대한 치유, 보상책을 찾아 정책화해야 합니다. 베트남 전쟁 덕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다면, 대한민국 국가 재정으로 기금을 마련해 전쟁으로 입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피해를 당한 개인 또 공동체에 대한 구체적인 보상 또는 협력 방식은 연구하면 됩니다.
또 하나 치유를 위한 제안이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대학 강좌가 더 많았으면 합니다.
물론 미국과 한국의 상황을 평면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전쟁에서 한국군보다 10배도 더 넘는 미군 전사자가 발생했습니다. 거의 300만 명의 미군이 전쟁을 경험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나라는 지치고 사회는 분열했습니다. 아직도 전쟁의 아픔은 계속됩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앓고 있는 참전 병사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쟁의 의미는 꼭 투입한 병력과 사상자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치른 많은 전쟁 중 하나지만 한국에는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나라 밖으로 군대를 보낸 경우입니다. 의미가 깊은 역사입니다. 따라서, 더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베트남 전쟁이 독립 강좌로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날을 기대합니다.
이 시리즈를 읽어 주신 독자들과 연재를 위해 특별히 애써주신 시민언론 민들레 편집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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