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⑲ '양민=적' 인식 주입

연구 결과로 민간인에 대한 적개심 정당화

적의 공격은 민간인 협력의 증표라는 사고

민간인 학살은 군사적 좌절감 표출된 결과

한국군은 적을 압도한다는 부추김의 비극

민간인 학살 증거와 증언을 부정하는 한국

 

'기우취적도(騎牛吹笛圖)'' (개인소장, 연합뉴스)
'기우취적도(騎牛吹笛圖)'' (개인소장, 연합뉴스)

위의 그림은 16세기 조선의 문인화가 김시(金視. 1524~1593)의 작품으로 알려진 '기우취적도(騎牛吹笛圖)'이다. 멀리 병풍처럼 산이 펼쳐진 시골 마을. 소년이 소위에 앉아 피리를 분다. 비상식적이다. 소의 무게가 1톤쯤 될 것이다. 아이의 몸무게는 30킬로 정도다. 위험한 자세다. 

말이나 소, 몸집은 커도 무척 민감한 동물들이다. 몸이 조금만 거북해도 길길이 뛴다. 그런데 고삐도 없는 소 등위에 앉아 피리를 분다?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눈을 크게 뜬 소도 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하다. 화가는 상식과 합리를 거부한다. 그래야 목가(牧歌)가 구성된다.

정글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에 인구의 80% 이상이 사는 남베트남. 여기서 전쟁을 벌인 미국은 모든 낭만적인 목가를 부정했다. 국방부의 관점에서 소 등의 소년은 공산 세력의 스파이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가 부는 피리는 미군 또는 한국군이 온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서인지도 몰랐다.

국방부는 베트남으로 가는 미군 병사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기묘한 우연인가? 이 작품에서 만나는 소는 황소가 아닌 뿔이 긴 남방 물소로 보인다. '기우취적도(騎牛吹笛圖)'가 미군에게는 '공산작전도(共産作戰圖)'였다. 

눈부시게 푸르른 베트남의 밀림에 속으면 안 된다. 그곳은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의 위장된 은신처고 전략 기지였다. 매일 아침 백악관 상황실에서 존슨에게 올라오는 베트남 전쟁 관련 보고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1966년 4월 4일. "한국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비행 중이던 미군 무장 헬리콥터 두 대가 지상으로부터 사격을 당한 후 우호적이라 여겼던 마을을 폭격했다. 민간인 14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당했다. 부상자들은 퀴논 병원으로 후송됐고, 미군 의료진을 파견해 치료했다."

 

한국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미군 헬리콥터의 폭격으로 민간인 38명이 죽고 다친 사건을 존슨에게 전하는 상황 보고서. 우호적인 마을로 분류됐지만, 누군가 총을 쏘았으니, 적의 마을로 간주했다. 자료 : 이길주 시민 기자
한국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출동한 미군 헬리콥터의 폭격으로 민간인 38명이 죽고 다친 사건을 존슨에게 전하는 상황 보고서. 우호적인 마을로 분류됐지만, 누군가 총을 쏘았으니, 적의 마을로 간주했다. 자료 : 이길주 시민 기자

이 사건은 미군의 실수를 말하고 있지 않다. 헬기가 공격을 받았으니, 그 순간 그 마을은 적진이 되었을 뿐이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마을 주민들은 단순한 농부로 보아서는 안 된다. 게릴라 또는 동조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헬리콥터의 추락이나 격추는 대형 피해다. 민간인인가? 적인가? 따지고 머뭇거릴 틈이 없다. 하늘에서 식별하기 어렵다. 총을 든 게릴라만이 적이 아니라고 주입했으니 민간인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미 국방부 교육 지침서에 포함된 삽화. 땅 위의 공산 게릴라, 또 그렇게 의심되는 동조자들을 향해 헬리콥터에서 M60 다목적 기관총 (General-Purpose Machine Gun)을 발사하는 모습이다. 민간 피해의 주원인으로 꼽히는 이 공격을 정당화하는 뉘앙스가 풍긴다. ('Know Your Enemy: Viet Cong, Department of Defense)
미 국방부 교육 지침서에 포함된 삽화. 땅 위의 공산 게릴라, 또 그렇게 의심되는 동조자들을 향해 헬리콥터에서 M60 다목적 기관총 (General-Purpose Machine Gun)을 발사하는 모습이다. 민간 피해의 주원인으로 꼽히는 이 공격을 정당화하는 뉘앙스가 풍긴다. ('Know Your Enemy: Viet Cong, Department of Defense)

1966년 3월 30일. 사이공 미 대사관발 워싱턴 국무부행 비밀 전문이 하나 도착했다. "도대체 민간인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공산 세력의 군사 작전에 투입된 짐꾼과 부상병을 나르는 들것을 옮기는 사람, 도로와 철도를 놓는 인원도 민간인에 포함시키나? 베트콩을 먹이기 위해 농사짓는 농민들도 포함되나? 전장에서 발견된 검은 옷을 걸친 시체가 베트콩인지 무고한 민간인인지 어떻게 판단하나? 어느 쪽이 초래한 사상자인지는 또 어떻게 분별하나? 이런 수치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이 전문은 마치 항명처럼 읽힌다. 미군의 군사 작전으로 민간인이 입은 피해를 보고하라는 워싱턴의 지시에 사이공의 미 대사관은 그 숫자를 정확히 파악할 수도 없지만, 알아서 또 뭐하겠냐며 받아치는 듯하다. 베트남 전쟁에서 민간인과 적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고가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베트남 전쟁이 더욱 비극적이었던 이유는 복잡하고 난해할 필요가 없는 '비전투원(non combatant)'의 정의가 흔들렸기 때문이다. 남베트남군 또 미군과 한국군이 주축이 된 외국 군대는 엄격히 따져 베트남에 '비전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과연 베트남 전쟁에서 누가 민간인이냐를 따지는 사이공주재 미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 (이길주 시민 기자 제공)
과연 베트남 전쟁에서 누가 민간인이냐를 따지는 사이공 주재 미 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 (이길주 시민 기자 제공)

90년대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입니다' 란 광고 카피가 인기를 끌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비슷한 전략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전쟁은 과학이다.'

1961년에서 68년까지 미 역사상 최장수 국방부 장관을 지낸 맥나마라는 정부나 사기업이 정책 또는 경영상의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데이터 분석이 전공이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회계학과 기업 전략을 가르쳤고, 포드자동차에서는 소비자의 심리와 선호도를 수학적으로 분석해 높은 수익을 창출했다. 왜 학력이 높고, 경제 능력도 있는 소비자들이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폭스바겐사의 '비틀(Beetle)'을 운전할까? 합리적 또는 진보적인 소비 형태로 느껴지기 때문이란 인터뷰 데이터가 나왔다. 맥나마라는 단아하게 느껴지는 절약형 차종을 선보여 크게 성공했다.

국방부 장관이 되어서도 객관적 데이터 분석을 정책 결정에 활용했다. 예를 들어 적절한 주한 미군의 규모와 베트남 전쟁에서 요구되는 군사력을 측정했다. 적의 공격 능력을 측정해 아군의 적정한 군사력 증강을 정했다. 그에게 과학적 분석 능력이 승전의 열쇠였다. 

맥나마라의 국방부는 정책과 상황 분석을 민간 연구소와 함께 진행했다. 미국의 '군산(軍産) 복합체'는 따지고 보면 '군산연(軍産硏) 복합체'였다. 맥나마라는 랜드(RAND)연구소를 제일 신뢰했다. '연구와 분석을 통해 정책 개선 및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비영리 단체'인 랜드는 맥나마라의 의뢰로 그 유명한 '펜타곤 문서(The Pentagon Papers)'를 작성한 곳이기도 하다.

랜드연구소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투쟁에서 민간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를 집중 조사했다. 수천 명의 공산 게릴라 포로, 또 전향자를 상대로 한 인터뷰 내용과 노획한 문서를 분석했다. 약 40개의 연구 보고서가 나왔는데 베트남 전쟁 연구자들에게 귀한 자료이다.

결론은 간단명료하다. 민간 지원 없이 게릴라 투쟁은 불가능했다. 달리 표현하면 민족해방전선의 민간 동조자들의 더 큰 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연구 결과는 정책 입안의 토대가 됐다. 베트남 전쟁에서 민간인에 대한 편견과 의심, 또 살상의 정당화는 객관적 연구 분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적이 아닌 척하는 민간인이 더 큰 위험 요소란 사고가 자리잡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 국방부의 의뢰로 민족해방전선 게릴라와 농촌의 민간인들과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 보고서들에 따르면 민간 조력자 없는 공산 세력의 투쟁은 불가능하다. 민간인이 곧 적이란 뜻이다. 작전 지역의 마을에서 민간 협력자들이 조사받기 위해 끌려가는 모습. (Public Domain)
미국 국방부의 의뢰로 민족해방전선 게릴라와 농촌의 민간인들과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 보고서들에 따르면 민간 조력자 없는 공산 세력의 투쟁은 불가능하다. 민간인이 곧 적이란 뜻이다. 작전 지역의 마을에서 민간 협력자들이 조사받기 위해 끌려가는 모습. (Public Domain)

랜드의 연구는 근본적인 문제를 던지면서 시작한다. 왜 평범한 농민들이 게릴라 또는 조력자가 되었는가? 등에 총구를 들이댄 공산 세력의 강압으로 해방 투쟁에 뛰어들지 않았다. 스스로 그 길을 택했다. 근본 원인은 남베트남 정부에 있었다.

구체적으로 32%가 개인의 경험에 따른 선택이었다. 남베트남 정부군과 관리들이 저지른 갈취, 강탈, 잔혹함, 오만함, 체포와 더불어 남베트남 사회에서 경험한 개인적 좌절감이 원인이었다. 다음으로 28%는 남베트남 정부 자체에 대한 반감을 이유로 들었다. 반국가 세력이라 할 수 있다.

또 20%는 민족해방 전선의 호소에 설득된 경우다. 공산 프로파간다의 효과로 볼 수 있다. 반제국주의 투쟁이 주는 역사적 정의감에 따라 행동한 경우가 11%로 나타났다. 다음 6%가 주위의 압력(Peer Pressure)을 느낀 경우였다. 게릴라들로 부터 공포심을 느껴서 할 수 없이 총을 들거나 동조자가 된 경우는 많지 않았다. 

호찌민이 남베트남군과 미군, 한국군을 포함한 외부 군대들이 열 배나 많은 공산 세력의 병사들을 사살해도 결국 전쟁에 패할 것이라 주장한 근거가 여기 있다. 랜드연구소의 지적대로 남베트남이 민간인들에게 안전감과 희망을 주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이 상황에서 북베트남에 대한 공폭을 포함해 공산 세력에 가해지는 엄청난 폭력과 파괴력에도 게릴라 전투력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베트남전의 원인은 베이징도, 하노이가 아니고, 사이공이란 뜻인데, 남은 선택은 더욱 압도적인 군사력과 강력한 폭력 수단으로 적이 군사행동을 못 하거나 투쟁을 포기하도록 해야 했다. 그 결과 평범한 베트남 주민들이 사는 마을을 게릴라들의 은신처 및 지원 베이스로 간주해야 한다며 집과 양식을 태우고 젊은이들을 끌고 갔다. 그 결과 더 많은 민간인이 공산 세력에 협력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미라이 (My Lai) 민간 학살 사건 당시 농부의 집에 붙을 지르는 미군 병사의 모습. 1968년 3월 발생한 이 사건으로 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됐다. 학살을 저지른 병사들은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피해자들을 살상했다. 불만과 좌절감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My Lai Massacre Museum)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미라이 (My Lai) 민간 학살 사건 당시 농부의 집에 붙을 지르는 미군 병사의 모습. 1968년 3월 발생한 이 사건으로 500여 명의 민간인이 살해됐다. 학살을 저지른 병사들은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피해자들을 살상했다. 불만과 좌절감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My Lai Massacre Museum)

"민족해방전선은 민간인 지원 조직의 연합이다(The Natinal Liberation Front is a collection of civilian support agencies)." 이 단순한 결론이 베트남 비극의 근원이다. 총을 쏜뒤 사라지는 게릴라보다 더 미운 존재였다. 게릴라세력은 군사 작전에 필요한 지원 요소의 75%를 민간인에게서 제공받았다. 물자 이동, 건설, 곡물 생산, 부상자 이동, 무기 제조, 필수품 대리 구매 등에 활용했다. 또 일종의 세금을 거두어 들여 군사 비용으로 충당했다.

 

남베트남군은 민족해방 전선에 비할 수 없는 풍부한 물자를 갖고 있다며 공산 게릴라들에게 투항을 촉구하는 심리전 포스터. 이 메시지가 효과가 있었다는 증거는 약하다. (Public Domain)
남베트남군은 민족해방 전선에 비할 수 없는 풍부한 물자를 갖고 있다며 공산 게릴라들에게 투항을 촉구하는 심리전 포스터. 이 메시지가 효과가 있었다는 증거는 약하다. (Public Domain)

그런데도 민족해방전선의 민간 협력 정도가 줄어든다는 증표는 없었다. 노동력이 가장 많이 필요한 추수철을 제외하고, 민족해방전선을 돕는 민간 인력은 게릴라 전술을 지탱할 수 있었다. 남베트남군과 외국 군대가 공산 세력과 민간인의 조력 관계를 끊기 위해 동원하는 전략이 효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릴라 은신처와 보급 베이스로 의심받는 마을의 파괴, 농작물 훼손, 민간인의 강제 이주, 마을 봉쇄 등은 반감만 불러왔다. 재정, 물자, 인력자원을 투입하는 지원(유화)책이 있었지만, 남베트남 정부의 부정부패, 무관심으로 역효과가 났다. 

종합하면,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지역에서 민간인들은 남베트남 정부에 협력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세금을 거두고 공산 게릴라 또는 조력자로 의심받는 마을 사람을 체포해 가는 일 외에 남베트남의 정부 기능은 없었다. 미군과 한국군은 이런 남베트남을 돕고 있었다.

다급해진 미군 당국은 한국군에게 같은 동양 사람이니 대민 사업도 군사 작전과 병행하라는 주문을 했다. 결과적으로 한국군을 민간인의 삶에 더 깊이 개입하는 점령군으로 느꼈고, 반감도 커졌다. 한국군을 제2차 세계대전 때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일본군으로 간주했다는 기록도 있다. 

 

민족해방전선은 게릴라 병사들이 민족주의, 희생정신, 또 훈련된 행동의 소유자란 메시지로 심리전을 폈다. 랜드연구소는 대다수 게릴라 병사들이 강압보다는 자의에 의해 해방 투쟁에 뛰어들었다고 분석했다. 남베트남군과 비교가 됐다. (Public Broadcasting System)  
민족해방전선은 게릴라 병사들이 민족주의, 희생정신, 또 훈련된 행동의 소유자란 메시지로 심리전을 폈다. 랜드연구소는 대다수 게릴라 병사들이 강압보다는 자의에 의해 해방 투쟁에 뛰어들었다고 분석했다. 남베트남군과 비교가 됐다. (Public Broadcasting System)  

민족해방전선은 이 상황을 투쟁에 적극 이용했다. 병사들에게 랜드연구소의 표현으로 거의 종교적 권위를 갖는 행동 지침을 내렸다. "열심히 학습하고 일(투쟁)할 것. 투쟁 현장의 조건에 부합하는 질서 있고 청결하며 단순한 생활을 할 것. 단정한 용모를 유지하고 사치는 삼갈 것. 규율과 질서를 지킬 것. 공공 재산을 소중히 여길 것. 가정과 사회에서 남녀평등을 실천할 것. 어떤 경우에도 노인, 여성, 전쟁 부상자, 어린이를 존중하고 도울 것."

랜드 연구자들은 민족해방전선이 "높은 행동 기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인정했다. 한 보고서는 "처음에는 강제로 징집된 한 가난한 농부는 베트콩이 최하위 사회 계층 구성원을 동등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나중에는 민족해방전선의 주장을 믿게 되었음을 증언했다"고 전했다. 게릴라 세력의 호소력은 소위 '삼위일체(三位一體)'에 있었다. 'Three Togethers'라고 불렸다. 함께 식사하고, 함께 살고, 함께 일(또는 전투)하는 것을 말했다. 남베트남군과 외국 군대가 적에게 거의 열 배의 피해를 주는데도 공산 세력의 투쟁 의지가 약화하지 않는 이유였다.

랜드연구소에 주목할 결론이 있다. 민족해방투쟁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공산세력 지휘부는 전력의 50%는 여성으로 충당해야 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여성들의 전투력도 간과할 수 없지만, 남성 게릴라들이 작전을 나가면, 마을과 동네를 지켜야 하는 책임은 여성들이 맡아야 했다. 또 여성들은 전쟁 물자 수송에 남자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랜드연구소 보고서는 전했다. ("Women laborers did better work than the men.")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한 오스트랄리아군에 잡힌 여성. 민족해방전선의 여성 의존도는 높았다. 따라서 잔혹 행위에 의한 여성들의 피해가 높았다. 
상대적으로 소규모의 병력을 베트남에 파병한 오스트랄리아군에 잡힌 여성. 민족해방전선의 여성 의존도는 높았다. 따라서 잔혹 행위에 의한 여성들의 피해가 높았다. 

여성이 확실하게 두각을 나타내는 분야가 있다. 선전 선동이다. 광신자 같은 여성 대원들(zealous female volunteers)을 만나면 지칠 때까지 선전, 선동을 한다는 전언이 랜드 연구에 나타난다. ("If they met you they would propagandize you until you were exhausted.")

랜드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민족해방전선의 특성은 다음과 같다. 1. 대다수 전투 병력과 조력자들은 강제로 동원되지 않았다. 2. 투쟁에 필요한 인적 자원의 대부분을 민간에 의존하니 보급의 부담이 적다. 3. 동네와 마을의 양민들은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의 훈련, 절제된 행동을 인정한다. 4. 여성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결론이 설득력이 있다. 공산 세력(민족해방전선과 북베트남의 지원 병력)은 특정 지역에 침투해 영향력과 협조 관계를 형성하면 민간인 조역자들에게 그 지역의 통제와 관리를 맡길 수 있다. 게릴라 병력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역을 옮겨가며 작전을 펼친다. 따라서 남베트남군과 외국 참전군이 전투에서 이겨도 공산 세력은 큰 타격이 입지 않았다. 아군의 승전보를 무색하게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베트남 농촌의 민간인은 민족해방전선의 위장한 게릴라, 또는 협력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고가 많은 주민들을 억류케 했다. 적으로 의심받아 한국군 병사에 의해 끌려가는 베트남인들. (Sai/AP, CNN)
베트남 농촌의 민간인은 민족해방전선의 위장한 게릴라, 또는 협력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고가 많은 주민들을 억류케 했다. 적으로 의심받아 한국군 병사에 의해 끌려가는 베트남인들. (Sai/AP, CNN)

공산 세력은 전투 능력이 떨어지면 작전 수를 줄이고 민간 협력자에 의지해 은신 상태에서 군사력을 보강했다. 어차피 게릴라의 준동이 없으면 남베트남과 외국 군대는 마을까지 오지 않았다. 쉽게 말해 베트남 전쟁은 밑 빠진 독과 같았다. 

이 상황에서 남베트남군과 미군, 한국군이 중심이 된 외부 참전국은 모든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 독 밑의 구멍을 막으려 했다. 포격, 폭격, 유린공격(蹂躪攻擊, Sweeping), 고엽제 살포, 심리전, 평정 사업이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베트남 민간인의 마음과 생각을 돌려놓지 못했다.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해방된 자유롭고 풍요한 삶의 환경을 건설하기 위해 먼저 지금 삶의 터전을 파괴해야 한다는 논리는 대다수 베트남 민간인에게 설득력이 없었다. 삶의 파괴였을 따름이다. 

결과는 좌절감과 무력감이 초래한 민간 살상에 대한 무감각이었다. 이미 양민은 베트콩 아니면 준베트콩이란 메시지가 뇌리에 박혀있었다. 심지어 어떤 공격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대상인 'Free Fire Zone'도 있었다. 더욱이 베트남 전쟁은 어떻게든 1년만 살아남으면 되는 전쟁이었다. 일단 쏘고 보는, 아니 쏘아야 하는 전장이었다. 베트남 전쟁 중에 발생한 다수의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이 같은 배경을 깔고 있다. 세뇌의 수준으로 민간인에 대한 편견과 증오심이 심어졌다고 할 수 있다.

민간인 피해는 예정된 비극이었다. 더욱이 한국군은 미군보다 더 잘 싸우는 군대여야 했다. 총질하는 적에 대한 반격에도 능하지만, 적이 준동하지 못하도록 군사적 도전을 원천 봉쇄하는 군대라는 인정을 받으려 들었다. 그러려면 우는 애도 그치게 한다는 공포의 군대가 돼야 했다. 게릴라 병사에게뿐 아니라, 민간인에게도 두려움이 대상이 되려 한 증거는 많다.

 

꽝응아이성 빈호아 학살 증오비. (한베평화재단)
꽝응아이성 빈호아 학살 증오비. (한베평화재단)

1966년 12월 5일 꽝응아이성 빈호아에 청룡부대원들이 진입했다. 그날 36명의 민간인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총격을 가해 죽였다는 증언이 있다. 다음날에는 인근 마을에서 학살이 계속됐다. 모두 430명이 살해됐는데 268명이 여성이었다. 어린아이도 182명 희생됐다. 시신을 우물에 던지고 불태웠다는 증언이 있다.

 

빈딘성 빈안학살 사건 위령제단. (한베평화재단)
빈딘성 빈안학살 사건 위령제단. (한베평화재단)

1966년 2월 맹호부대가 작전을 펼치던 남베트남 중부 빈안에서 약 1000명 이상 양민이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국군 관련 민간 학살의 최대 사건이다. 인명 살상과 함께 가옥과 식량을 불태웠고, 물소도 죽였다. 강간 살해 등의 만행도 저질렀다는 증언이 있다. 생존자들에게 일부러 보란 듯 행동했다는 인상을 남겼다. 

 

퐁니, 퐁넛 학살 위령비 74명의 피해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베평화재단, CNN)
퐁니, 퐁넛 학살 위령비 74명의 피해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베평화재단, CNN)

1968년 2월 12일. 다낭에서 남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베트남 꽝남성 퐁니, 퐁넛 마을에서 한국의 청룡부대 (해병 제2여단) 대원들이 주민 70여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공산세력의 1968년 구정 공세 이후 극도로 긴장된 상태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중 투렷한 근거 없이 게릴라들의 은거지도 아닌 전략촌의 민간인들을 모아 놓고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는 증언이 넘친다.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 (한베평화재단)
하미마을 학살 위령비. (한베평화재단)

열흘 뒤인 1968년 2월 22일. 역시 청룡 부대가 퐁넛, 퐁니 마을 인근 하미 마을에 들어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총과 수류탄, 유탄발사기로 학살을 자행했다. 피해자가 135명이었다. 시신을 불도저를 동원해 집단으로 묻어 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 살해 사건은 모두 약 80건이며 피해자는 적게는 3000명에서 많게는 90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에서 일어난 한국군에 의한 학살 사건을 인정하지 않는다. 추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한국 정부의 조사 문건은 아직 공개하지 않고 있다. 참전자 관련 단체들은 학살을 언급하는 그 자체에 대해 극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피해자의 증언, 미군 당국과 민간의 사건 조사 보고서, 또 현장에 있었던 일부 한국군 병사들과 인근에서 학살 현장을 목격한 미군 병사의 증언을 통해 모여진 증거는 반론을 무력하게 한다. 민간인 학살을 '주장' '추정' '논란' 등 몇 발짝 옆으로 비켜있는 표현으로 묘사하기 어렵다.

 

퐁니, 퐁넛 학살 사건은 없었으며 이는 베트콩의 심리전이란 채명신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의 주장이 담긴 미군 조사 보고서. (NARA, CNN)
퐁니, 퐁넛 학살 사건은 없었으며 이는 베트콩의 심리전이란 채명신 주베트남 한국군 사령관의 주장이 담긴 미군 조사 보고서. (NARA, CNN)

역사의 법정과 사법의 법정에는 공통점이 있다. 합리적 증거가 판결의 토대가 된다는 점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피해에 대한 방대한 증거 자료가 존재한다. 한국의 법정도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증거의 합리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의 반박 논리와 증거는 빈약하다. '베트콩'의 선전 선동 작전의 일환이라거나 가해 당사자의 확실한 증언이 없다는 수준이다.

비합리적 막무가내식 부정은 그 어느 나라와 민족보다 지나간 역사가 지금 살아 꿈틀대는, 그래서 과거가 현재를 살리는 역사성 높은 대한민국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국격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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