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참전 60돌]⑳ 용병인가 아닌가?
참전 대가 경제원조 요구 등 용병 해당
자유세계 지키기 위한 '동맹 전쟁' 포장
한국 '싸우며 건설했다'는 서사 만들어
한국에 대한 지원과 보상 미국에 혜택
용병 여부 놓고 이념 대결은 도움 안돼
"미국이 한국을 지원하는 것에 대해 갑자기 왜 이런 소란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I cannot understand why all of a sudden such a hullabaloo is raised over our assistance to Korea)." 존슨의 보좌관들이 1968년 1월 작성한 언론 대응용 문답지의 내용이다. 한국의 전투 부대가 베트남에 온 지 2년을 넘어선 시점이었다. 병력은 약 5만 명이고, 더 올 것이란 기대가 있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미군보다 더 활약한다는 뉴스가 자주 들려왔다. 민족해방전선 병사들은 한국군이 두려워 교전을 피한다는 소식도 있었다. 전투와 더불어 미군이 고전하는 대민 평정 사업에도 한국군을 투입하자는 제안도 나왔다. 한국군에 의한 양민 학살에 대한 증언이 있었음에도 말이다.
미국이 파병 대가로 한국에 어떤 혜택을 제공하는지 언론이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한국에 추가 군사, 경제 원조를 제공하는 동시에 한국 참전군의 해외 근무 수당을 제공했다. 이는 비밀은 아니었지만, 구체적인 내용과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다. 기자들이 정보를 원했다.
백악관은 언론의 관심을 겨냥해 '도대체 무엇이 문제냐'고 받아치는 대응 전략을 세웠다. 호들갑 떨지 말라고 일침을 가하고 나서, 다음 설명으로 넘어가라고 존슨에게 코치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이 135달러인 나라가 파병했는데, 여기에 수반되는 재정 부담을 스스로 감당하라 할 수 있나? 이것이 동맹으로서 할 짓인가? 이어서 정제되지 않은 존슨의 어투에 맞는 강력한 업어치기 발언을 준비했다.
"(한국군의 베트남에 파병으로) 미국의 젊은이가 베트남 전선으로 가지 않고 집에 남아있을 수 있다면 외국 병사를 지원하는 데 그 빌어먹을 비용이 얼마나 들든 상관하지 않는 미국인이 많다." ("There are lots of Americans who don't give a damn how much it costs to support foreign soldiers so long as it enables an American boy to stay home.")
결론은 무엇인가? "스스로 자신들의 국익과 안보를 위해 장병들의 생명과 에너지를 헌신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have made the commitment of the lives and energies of their men for reasons of their own national interest and security, nothing more, nothing less)"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이 아니라는 백악관 공식 입장이라 해도 된다.
미국의 주장과 관계없이 과연 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32만 명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이냐는 질문은 계속된다. 이에 대한 깊고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한국 사회의 분열시키는 쐐기 역할을 한다. 그러니 베트남 전쟁 참전 역사를 논쟁거리 수준에 머물게 한다. 깊은 이해 대신 말다툼, 진영 싸움으로 고착됐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병사들을 싼값에 미국에 이용당한 용병으로 이해하면 이념 잣대의 중심에서 좌측으로 분류된다. 용병이 아니고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민족을 위해 희생한 용사였다는 주장을 하면 우파로 여긴다. 참전 60년, 남베트남 패망 50년이 지난 지금 이 문제에 대한 나라와 국민 차원의 공감대를 추구할 필요가 있다.
정확히 용병은 누구를 말하나? 먼저 국제법과 규약상의 정의를 검토해 보자.
"자국을 위하여 싸우는 대신 상당액의 금전적 보상을 받고 다른 국가에서 정부나 조직을 위해 군인으로서의 용역을 제공하는 자이다. 이들 용병 중 상당수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박애주의, 이념 또는 종교적 이유로 지원했다고 주장하지만, 고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위하여, 혹은 전쟁을 위하여 돈을 받고 고용되거나 공격을 감행하도록 고용되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용병 활동이 국민의 자결권에 미치는 영향' 유엔 인권 해설집, 국가 인권위원회 번역)
다음은 제네바 협정 제47조 용병에 관한 규정이다.
"1. 용병은 전투원 또는 전쟁포로가 될 권리를 가지지 아니한다.
2. 용병은 다음에 해당하는 모든 자를 말한다. 가. 무력 충돌에서 싸우기 위하여 국내 또는 국외에서 특별히 징집된 자. 나. 실지로 적대행위에 직접 참가하는 자. 다. 근본적으로 사적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적대행위에 참가한 자 및 충돌 당사국에 의하여 또는 충돌 당사국을 위하여 그 당사국 군대의 유사한 지위 및 기능의 전투원에게 약속되거나 지급된 것을 실질적으로 초과하는 물질적 보상을 약속받은 자. 라. 충돌 당사국의 국민이 아니거나 충돌 당사국에 의하여 통치되는 영토의 주민이 아닌 자. 마. 충돌 당사국의 군대의 구성원이 아닌 자. 바. 충돌 당사국이 아닌 국가에 의하여 동국의 군대 구성원으로서 공적인 임무를 띠고 파견되지 아니한 자."
이 문건을 요약하면 상당 수준의 보상 또는 수입을 제공받고, 충돌 당사국이 아닌데도 다른 나라를 위하여, 특별히 징집되어 적대 행위에 참여한 병력이 용병이다. 때로 이들은 수입, 보상이 아닌 더 높은 가치를 위해 고용, 징집됐다고 주장하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다. 전투원 또는 전쟁 포로가 될 권리도 없이 나와 관계없는 싸움에 뛰어든 경우이다.
이런 정의를 적용하면 베트남에 참전한 한국군을 용병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몇몇 개념상의 이견이 가능하다. 용병인가 아닌가를 정하는데 다음 조항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고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위하여…" 그리고 "충돌 당사국이 아님에도…"이다. 근본적으로 병사들이 개인적 소득 외에 베트남에 갈 이유가 없었다면 용병의 전제 조건에 부합된다.
하지만 수입, 소득, 보상이 주된 원인이 아니고, 국가와 통치자가 부여한 정당성을 내면화하고, 이에 응했다면 그래도 '용병'으로 분류할 수 있나? 답이 간단하지 않다.
한국과 미국은 이 문제를 인지하고 피해 가기 위해 노력했다. 박정희 정부는 베트남 참전 병사들에게 제2의 한국 전선으로 싸우러 가는 것이라 주입했다. 병사뿐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남베트남은 멀리 있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나를 위해 지켜야 하는 나라로 인식시켰다. 인도차이나와 한반도를 한데 묶은 전략적 사고로 존슨도 자주 언급했다. 참전 병사들의 환영과 환송식을 대대적인 국가 행사로 치러졌다.
대의명분 쌓기에 주한미군 철수론도 이용됐다. 박정희는 한국군을 파병하지 않았으면 주한미군 2개 사단이 베트남으로 갔을 것이라며 결국 "한국의 국방을 위해서도 한국군이 월남에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미국에 밉보이면 주한 미군이 철수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베트남으로 간 한국 병사 32만 명 중 일부는 쓸데없이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간다고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파병 부대를 구성할 때 탈영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그래도 대다수는 파병을 국가의 부름으로 받아들였다. 화환을 목에 걸고,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시가행진을 하면서 베트남으로 오고간 군대는 한국군이 유일하다. 포장이 내용물의 성격을 규정한 역사였다.
미국은 남베트남 정부의 공식 군사 지원 요청으로 용병 논리를 빠져나갔다. 자존심 강한 남베트남 정부는 한국군 참전에 대해 적지 않은 반감을 갖고 저항했다. 미국 참전의 합리화를 제공한 SEATO 회원국이 아닌 한국의 참전은 법적 근거가 약했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공식 지원 요청이란 법적 토대를 만들기 위해 사이공 정부에 압력을 가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한국군 참전은 표면적으로는 자유세계 수호를 위한 희생이었지만, 박정희 정부는 처음부터 미국에 경제 보상과 혜택을 강하게 요구했다. 당연한 요구로 생각했다. 하지만 존슨 정부는 인색했다. 미국이 투입한 병력의 10%, 더욱이 미군보다 더 잘 싸우고, 전쟁의 진짜 승리인 대민 평정에도 뛰어나다고 인정한 한국군에 대해 쉽게 지갑을 열지 않았다. 용병 비난을 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역사의 경험 때문일 수도 있다.
미국 독립 전쟁 당시 약 3만 명의 독일 출신 병사들이 영국을 도와 싸웠다. 이들을 헤센 용병(Hessian Mercenaries)이라 부른다. 헤센(Hessen)은 지금의 독일 국토 중심에 있다. 독일의 금융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이 속해 있는 지역이다. 미국이 영국에 독립을 선언한 1776년부터 전쟁에 개입했다. 영국은 이들이 속한 지역의 영주에게 보상하고, 영주가 각 병사에게 보수를 제공하는 형태였다.
헤센 용병들이 받은 보상은 컸다. 전쟁에서 이기면 영주들은 전리품으로 토지를 받았고, 용병들은 영주로부터 농토를 하사받거나 더 큰 규모의 소작농이 될 수 있었다. 또 한 가지 혜택이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헤센 용병들은 전쟁 중에 현장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다. 전쟁에서 이기면 소득이 많았다는 뜻이다. 위에 인용한 유엔 인권보고서 문건의 용병 정의에 나오는 '상당액의 금전적 보상'을 받은 경우에 꼭 들어맞는다.
헤센 용병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잔혹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민간인과 포로들에 대한 만행이 문제가 됐다. 전쟁의 승리가 수익과 직결됐기 때문이다. 존슨은 한국군이 헤센 용병이 아니라 자유세계를 위한 십자군이 되길 바랐다.
베트남 전쟁 참전을 통해 폭넓은 경제 혜택을 노리는 한국의 속내를 물론 미국은 알았다. 어떻게 수용할지가 문제였다. 지나치게 과대한 보상 요구에 대한 경계론이 있었지만, 결국 전쟁 논리에 묻혔다.
사이공 주재 미국 대사 헨리 캐봇 로지 2세가 솔직했다. 그는 존슨에게 "한국과 같은 든든한 동맹국에 베트남 사태에서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이익을 보장함으로써 (한국이 바라는 대로) 참전에 대해 보상하자"고 건의했다. 서울의 브라운 대사도 한국의 참전을 경제적으로 보상하지 않을 수 없음을 인정했다. 베트남에 전투 병력에 대한 반대 여론을 무마하는 방편으로서 경제적 보상이 유효한데, 동시에 이는 한국의 "경제 문제 해결에 부분적으로 기여할 것"이라고 했다. 브라운의 제안은 일거양득 노렸다. 보상을 통해 박정희에게 정치적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경제 발전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하면 된다는 구상이었다.
1966년 미국의 요청으로 한국은 두 번째 전투 사단(백마부대)을 파병했다. 당연히 박정희의 반대급부 요구가 있었다. 미 대사관이 워싱턴에 보낸 전문이다. "한국 정부는 무상 원조 및 개발 차관을 대폭 늘려달라고 요청했으며, 미국국제개발처(AID)가 베트남에서 프로젝트를 위해 구매하는 특정 품목에 대한 입찰에서 향후 5년간 미국과 한국을 제외한 모든 공급업체를 제외해 달라고 했다."
한국 정부의 요구에 서울의 브라운 미국 대사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브라운 대사는 "한국의 경제 개발 문제가 베트남 전쟁과 연계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국 정부에 경고했다. 한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이 용병 수출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었다.
다음 해인 1967년 들어 미국은 더욱 다급해졌다. 한국군의 규모를 5만 명 이상으로 늘리는 논의가 진행됐다. 그해 7월 있었던 박정희의 제6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은 더 많은 한국군을 요구할 때 지급해야 할 청구서를 요약해 존슨에게 보냈다.
미국은 한국군에 추가 군사 장비와 한국군을 현대화하는 데 필요한 재정을 투입하고, 추가적인 경제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고 했다. 또한 베트남에서 전쟁 수행과 관련해 긴밀한 협의에 동의하고, 베트남의 대민 평정 사업에서 한국의 역할 확대를 요구할 것을 예상했다. 특히 대민 평정 사업은 민간인들을 돕기 위한 재정과 물자의 투입이 큰 만큼 달러 수입원이 될 수 있어, 한국 정부는 이 사업에 적극 참여하길 원했다. 한국군의 피 흘림에 대한 당연한 보상으로 여겼다.
베트남 전쟁 참전으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경제 혜택을 받은 사실은 명확하다. 흔히 베트남 참전 기간에 10억 달러를 벌어들였다는 분석이 일반적이다. 보상과 관련된 한미 간의 합의 내용은 '브라운 각서'에 비교적 상세히 명시돼 있다. 모두 10여 개 조항에 달하는 군사, 경제적 반대급부가 제공됐으니, 한국군은 용병이었다는 해석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한국군 현대화를 위한 원조, 베트남 파병에 소요되는 수당과 보상금을 포함한 경비와 장비의 부담, 파병된 한국군이 사용할 물자의 한국 내 구매, 베트남의 미군과 남베트남 군이 필요로 하는 물자 구매와 관련된 혜택 제공, 수출 확대를 위한 기술 협조 강화, 추가 차관 제공, 그리고 민간 기술자 고용을 포함하여 용역 기회 제공에 대한 이해도 있었다. 미국에 한국 젊은이의 피를 팔았다는 비판의 근거가 되는 조항들이다.
피를 팔았는데, 그나마 싼 값에 팔았다는 비난이 나왔다. 근거는 한국군에게 지급된 수당과 보상금이 미군, 남베트남군 심지어 전투병이 아닌 소규모 지원부대를 파견한 필리핀이나 태국 병력에도 미치지 못한 사실이다. 헐값 파병 증거는 1970년 미 의회 청문회를 통해 드러났다.
하지만 달러를 얼마나 받고, 벌어들였나에 집착하는 역사 해석을 넘어서야 한다. 이들 문건에 담긴 한국과 미국의 정책과 전략을 읽어야 한다. 더 중요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과연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과 한국을 이어준 매개체는 달러가 전부였나? 미국과 한국은 브라운 합의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 한 것인가? 신화와 서사였다.
베트남 전쟁은 처음부터 정당성이 약했다. 호찌민이 이끈 베트남의 민족해방 투쟁이 반제국주의 전쟁에서 승리해 식민 통치자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떠났다. 하지만 베트남은 북과 남으로 갈렸다. 국민 투표를 통한 통일 절차에 대한 합의가 있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분단이 굳어졌다.
남베트남을 지원한 미국은 호찌민의 북베트남을 중국(중공)과 소련의 꼭두각시로 보았다. 남베트남 내의 민족해방전선은 하노이에 의해 조종되는 테러리스트 조직이 됐다. 베트남 분쟁은 자유세계를 붕괴시키려는 공산 세력의 전략지로 격상됐다. 미국은 자유세계가 지켜야 할 책임이 있다고 했다.
다른 나라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한국은 달랐다. 한국 전쟁에서 공산화 될뻔했던 절체절명의 순간, 자유세계가 연합군을 꾸려 나라를 구해주었다. 이제 한국이 그 역할을 할 때라고 한국의 지도자는 외쳤다. 미군의 10%에 달하는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다. 놀라운 희생이었다. 이것이 베트남에서 펼쳐진 한미 동맹의 신화였다. "정의의 십자군 깃발을 높이 들고 / 백마가 가는 곳에 정의가 있다"는 군가 '달려라 백마'를 미국과 한국은 쉬지 않고 불렀다.
신화는 서사를 통해 현실감과 역동성을 얻는다. 1960년대 후반 한국의 변화는 미국에 더 없이 역동적인 성공담을 제공했다. 한국은 가난했다. 미국의 원조에 의지해 살아왔다. 또 북의 위협에 노출돼 있었다. 심각한 문제가 또 하나 있다. 19세기 말에 열강들의 간섭과 침범을 경험하다, 20세기 초부터 일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이런 아픈 역사는 한국 국민이 바깥세상에 대해 의구심과 불안감을 느끼게 했다고 미국은 보았다. 매사에 자신이 없으니 후원국 미국에만 매달렸다는 뜻이다. 오죽하면 정신이 불안전한 미국의 의붓자식 소리를 들었을까?
한국은 이런 약점과 한계를 떨쳐 버리고 자유세계 수호를 위해 일어났고, 베트남으로 기꺼이 달려왔다. 베트남 파병이 나중에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 개발에 결정적 이바지를 했다는 해석이 있다.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보상과 혜택은 이 서사에 설득력을 더하기 위한 최소한의 투자였다. 투자자 미국은 높은 수익률을 누렸다. 한국 정부는 이 이야기에 '싸우며 건설한다'는 제목을 붙였다.
짧은 정책 제안서가 하나 있다. 1966년 6월 백악관 안보 보좌관 월트 로스토가 존슨에게 제출한 제안서다. 로스토는 한국의 1850만 달러의 개발 융자 요청을 인준하도록 조언했다. 1석 4조가 정책이라 했다. 1. 이 융자금으로 미국산 디젤 기관차 62대를 한국이 구매한다. 그러니 돈이 다시 미국으로 온다. 2. 1965년 5월 미국이 합의한 1억 5000만 달러 융자의 한 부분이니 미국은 약속을 이행하는 셈이다. 3. 2개 전투 사단 파병에 대한 보상이 된다. 4. 한국의 안정적인 경제 발전에 촉진제가 된다.
지금도 이런 차관을 박정희의 결단으로 파병해서 얻어낸 미국의 시혜로 보는 시각이 있다. 한국에도 도움이 되었지만, 미국은 한국의 후원국으로서 원하는 목적을 달성했다. 외교 성과가 미약했던 존슨 정부는 저 한국 좀 보라며 체면치레를 넘어 우쭐할 수 있었다.
베트남 신화와 서사에 32만 명 한국군이 동원됐다. 병사 개인에게 주어진 수당에 이끌린 경우도 있다. 베트남 전쟁 참전자들에게 이유를 물으면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오면 부모님에게 논밭 몇 마지기와 소 몇 마리를 사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고 하는 대답을 쉽게 만난다. "1년 고생해 동생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려 했다"고 회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파병은 국가적 결단이었고, 그 결단의 당위성은 뇌리에 깊이 주입됐다.. 국가가 심어준 사고 체계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미국의 달러가 병사들의 주머니로, 또 한국 사회로 흘러 들어왔다. 물론 이 돈의 대부분은 한국으로 송금됐고 국가가 관리했다. (박정희 정부가 미국이 참전 병사들에게 제공한 공식 수당 이상을 비밀리에 미국으로부터 받아 착복했다는 의혹은 지금도 제기되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한국 병사들을 용병으로 규정지으려면 국가, 국민의 공동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 베트남에서 흘린 핏값으로 한국의 '혈맥'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경제 개발의 주춧돌이 됐다는 관제 메시지 덕분에 참전 병사들과 국민은 '베트남 참전=애국'의 등식에 취하고 매달렸다. 이어서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란 노래도 불렀다.
한편에서는 베트남을 인간 개조의 현장으로 묘사했다. 평소 말썽 많았던 김 총각이 베트남에서 김 상사가 되어 훈장 달고 돌아오니 온 동네가 잔치를 벌였다. 같은 동네 한 여성은 폼을 내는 김 상사가 마음에 들었다. 베트남 참전 덕에 이 여성에게 장가도 갔을 것 같다.
그 시대 한국의 학생들은 베트남에 파병된 장병들에게 '위문편지'를 썼다. 선생님이 칠판에 몇 개 모범 문장을 적어 놓으셨다. 파월 장병 아저씨가 월남의 밀림에서 공산주의자들과 잘 싸우셔서 우리는 고국에서 편히 지낸다는 글도 있었다. 혹 베트남에서부터 답장을 받으면 칭찬이 쏟아졌고 우쭐해 했다. 이런 편지를 쓰게 한 나라가 이 국가적 용병 전쟁의 책임을 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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