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과의 결별 종교개혁 방아쇠 되고

이혼 합법화 위해 의회 권한 비약 성장

외교 고립 타개하려 해군력 본격 강화

‘예측불가 역사’ 속 가장 인간적인 국왕

35년째 영국에 살면서 한국의 뜨거운 여름이 그립고, 한국에 가면 이번엔 런던의 흐린 하늘과 습기 섞인 공기가 그립다. 한국의 시끌벅적한 리듬이 좋다가도, 다시 영국의 차분하고 조용한 일상이 마음을 툭 건드린다. 두 나라를 오가며 느끼는 이 감정의 진폭은 이제 익숙해졌지만, 그만큼 낯설기도 하다. 나는 이중국적자는 아니지만, 감정의 진자처럼 두 문화를 오가는 ‘이중감정자’라는 사실을 자주 실감한다.

그런 나에게 이상하리만치 친숙한 인물이 있다. 바로 헨리 8세(Henry VIII, 1491~1547). 16세기 영국의 국왕이자, 유럽사 전체를 흔들어 놓은 문제적 인물이다. 왜 그가 친숙하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그는 한 여인을 향한 사랑(혹은 욕망) 하나로 종교를 갈라냈고, 제도를 바꿨으며, 한 나라의 정체성과 미래까지 뒤흔든 남자다. 감정의 기복이 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순간, 나는 묘한 친근감을 느낀다. 우리 삶도 때론 그렇게 예측 불가능하게 전개되니까.

 

핸리 8세
핸리 8세

사랑, 권력, 그리고 여섯 번의 결혼

헨리 8세의 사생활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그는 여섯 번 결혼했고, 그 중 두 명의 아내는 참수됐다. 요즘 같으면 당장 국제인권재판소에 넘겨졌을 인물이다. 첫 번째 아내 캐서린은 스페인 왕가 출신의 왕비였지만, 딸(메리 1세)만 낳았다는 이유로 이혼을 요구받는다. 왕위 계승을 위해 아들이 필요했던 헨리는 교황에게 이혼을 요청하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선언이 터진다.

“그래? 그럼 내가 교황 할게.”

장난 같지만, 그는 진심이었다. 헨리는 직접 가톨릭과 결별하고,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를 만들어 버린다. 이혼을 하겠다는 한 개인의 집념이 종교질서 전체를 뒤엎은 사건이다. 마르틴 루터가 교리의 순수성을 따졌다면, 헨리 8세는 그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솔직했다. 사랑, 욕망, 그리고 권력. 그가 손에 쥐고자 했던 것들은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그는 이후 앤 불린과 재혼해 엘리자베스 1세를 낳지만, 아들을 낳지 못한 데다 외도 혐의까지 받으며 참수당한다. 제인 시무어는 아들을 낳은 후 산욕열로 사망하고, 네 번째 아내는 초상화 보고 결혼했다가 실물 보고 “이건 아니야…”라며 이혼당한다. 다섯 번째 아내는 젊고 아름다웠지만 간통 혐의로 참수, 마지막 여섯 번째 아내와는 그럭저럭 평화롭게 살았다. 물론 이 시기 헨리는 이미 비만과 통풍으로 움직이기도 힘든 상태였지만 말이다.

개인적 욕망이 체제를 바꾸다

놀라운 건 이 모든 연애사가 단순한 스캔들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헨리의 개인적인 욕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영국사회 전반을 재편했다.

첫째, 교황청과의 결별은 영국 종교개혁의 방아쇠가 되었다. 물론 이는 마틴 루터식의 신학적 도전이 아니라 철저히 정치적이고 개인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국은 가톨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종교질서를 만들었고, 이는 근대적 국가정체성의 초석이 되었다.

둘째, 그는 이혼을 ‘합법화’하기 위해 의회의 승인을 얻는 방식을 택했다. 결과적으로 의회의 권한은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이 시점부터 절대왕정의 균열이 시작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제군주로서 욕망을 밀어붙였던 헨리 8세는 입헌군주제의 문을 연 인물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은 공유될 수밖에 없다’는 역사의 묵직한 패러독스가 아닐까.

제국의 뿌리, 바다는 감정을 닮았다

셋째, 그는 외교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해군력 강화를 본격화했다. 가톨릭 국가들,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전략이었지만, 이것이 훗날 영국해군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이 결정은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르는 밑거름이 되었고, 이후 대항해 시대의 대영제국 건설로 연결된다.

생각해보면 바다는 감정과 비슷하다. 얕은 듯 깊고, 잔잔한 듯 격정적이다. 헨리의 감정이 불러일으킨 해군력 증강은 대영제국 건설이라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이런 식으로, 한 남자의 사랑과 권력욕은 수많은 제도와 질서를 파괴했지만 동시에 새로운 질서를 창조했다. 그 변화는 의도된 것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흐름에서 파생된 것이었다는 점이 더욱 의미심장하다.

 

영국 런던 남서부 리치먼드에 위치한 헨리 8세의 옛 거주지 햄프턴 코트 궁전. 연합뉴스 자료사진
영국 런던 남서부 리치먼드에 위치한 헨리 8세의 옛 거주지 햄프턴 코트 궁전. 연합뉴스 자료사진

문제적 인간, 그러나 역사적 인간

헨리 8세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확실히 ‘문제적 인간’이다. 감정적으로 충동적이고, 반대자에게 무자비했으며, 국가권력을 사적욕망의 도구로 휘둘렀다. 토머스 모어와 같은 위대한 인문주의자도 그의 손에 처형당했다. 그런 점에서 헨리는 분명 폭군의 초상을 지녔다.

하지만 역사는 단선적이지 않다. 인간의 오류와 욕망은 때때로 체제의 균열을 만들고, 그 틈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흘러들어온다. 헨리 8세는 그 혼란과 전환의 상징이다. 그의 비합리성과 예측 불가능성은 영국을 중세의 종교권위에서 끌어내 근대로 향하게 했다. 모순적이지만, 그는 파괴자이자 창조자였다. 비극의 연출자이자, 제도의 개혁자였다.

역사는 감정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종종 역사를 체계와 구조의 문제로만 이해한다. 하지만 헨리 8세는 말한다. 역사는 때로 ‘감정’에서 출발한다고. 불안, 욕망, 집착, 그리고 사랑. 이 네 가지 감정이 한 국왕을 움직였고, 그가 움직인 탓에 영국사를 넘어서 유럽사의 물줄기가 바뀌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사회가 등장했다.

역사란 늘 그렇다. 웃기다가도 슬프고, 슬프다가도 웃긴. 헨리 8세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혹시 누가 묻거든 이렇게 답하자.

사랑 때문에 교황에게 퇴짜 맞고, 나라를 갈라버린 남자. 스케일이 다른 이혼 전문, 헨리 형님이지.”

그는 유럽사의 ‘트라우마 제조기’이자, ‘예측 불가한 역사’의 가장 인간적인 얼굴이었다. 헨리 8세가 없었다면, 대영제국도 지금의 영국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혼도 국왕급이면 그건 그냥 세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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