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평화적 정권교체 그날의 단상

"호남·김대중 총재도 하셔야지"

"공정 선거 관리가 YS 살 길"

내일부터 '진짜 대한민국' 시작

민들레 독자님들, 오랜 만에 인사 드립니다. 이 유 에디터입니다.

오늘은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21대 대통령 선거일입니다. 윤석열이 영구 집권을 위해 불법으로 군을 동원해 내란을 일으킨 작년 12월 3일부터 꼭 6개월 되는 날입니다. 그동안 다들 불면의 밤을 보내며 이날만을 꼽아오셨겠지요.

저도 그랬습니다. 우리 '빛의 시민들'이 단합해 내란 이후 중대한 국면마다 국회의 계엄 해제, 윤석열 탄핵 의결과 체포·구속,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파면, 이재명 죽이기 저지 등을 이뤄냈지만, 끝났다 싶으면 어김없는 '윤건희 내란 카르텔'의 집요한 되치기를 당하며 느꼈던 무력감과 공포, 울분과 분노는 삭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어젯밤만큼은 잘 주무셨는지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선거를 하루 앞둔 2일 서울 여의도공원 마지막 유세에서 연설을 마친 뒤 애국가를 부르며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2025.6.2 [공동취재]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선거를 하루 앞둔 2일 서울 여의도공원 마지막 유세에서 연설을 마친 뒤 애국가를 부르며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2025.6.2 [공동취재] 연합뉴스

'아기다리 고기다리'던 대선

오늘 새벽 일어나는데 문득 첫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뤄진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 때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누구에게나 대선과 관련한 추억이 있기 마련이지만 제겐 그날의 추억이 가장 생생하고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운명이 '빛의 시민들'과 '내란 카르텔' 간 정면 승부인 이번 대선에 걸려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느낌입니다.

1997년 12월 18일 밤 11시가 좀 지나서였을 겁니다. 투표 마감 직후인 저녁 8시부터 시작된 개표가 3시간쯤 됐을 때였습니다. 영남 지역 개표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그때까진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앞섰지만, 호남과 수도권 개표율이 높아지면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격차를 좁히더니 그때부터 역전했고 한동안 엎치락뒤치락했습니다. 29일 오전 1시쯤을 넘기면서 약 1%p 수준에서 김대중 후보의 우위가 계속 유지됐습니다.

개표 결과, 김대중 후보는 1032만6275표(득표율 40.3%)를 얻어 15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와 정권 찬탈 이후 37년 만에 첫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역사를 썼습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993만5718표(득표율 38.7%)를 얻었으며, 두 후보의 표차는 39만557표(1.53%p)에 불과했습니다.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492만5591표(19.2%)였습니다. 1990년 1월 22일 당시 민주정의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제2야당인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제3야당인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가 밀실에서 '3당 야합'을 해서 217석의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을 만들어낸 이후 수구·보수 집권 세력 표가 갈린 건 거의 8년 만에 처음이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2000.6.13. 연합뉴스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2000.6.13. 연합뉴스

첫 평화적 정권교체 그날의 단상

그날 연합뉴스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저는 15대 대선 개표방송을 김용태 청와대 비서실장 방에서 김광일 대통령 정무특보와 함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선거 결과가 나오면 이른바 '청와대 표정'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서였습니다. 실제 개표 집계 상황을 알려준 방송은 지금은 당연하지만, 그 당시 KBS가 최초로 도입한 탓에 주로 KBS에 집중했던 듯합니다. 지금은 두 분 다 고인이 되셨지요.

그날 KBS의 실시간 개표방송을 보면서 세 사람 모두 시종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을 위해선 한번은 평화적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고 여겼던 저와, 그래도 보수 정권 재창출해야 한다고 봤던 두 분의 표정은 서로 엇갈렸습니다. 이회창 후보가 앞설 때는 그 분들의 표정이 밝았고 저는 속으로 '역시나' '이 나라의 정권교체는 영원히 불가능하구먼'이라면서 얼굴이 굳었고, 그 후 엎치락뒤치락할 때는 그때마다 서로의 표정들도 엎치락뒤치락했습니다. 김대중 후보가 안정적 우위를 점한 때엔 그 두 분은 낙담한 듯했고 애써 억누르려 했지만 제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17일 광주광역시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 광장에서 열린 집중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2025.5.17 [공동 취재]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17일 광주광역시 서구 김대중컨벤션센터 광장에서 열린 집중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2025.5.17 [공동 취재] 연합뉴스

"호남·김대중 총재도 하셔야지"

이날 김광일 특보의 모습이 생생합니다. 김대중 후보의 당선이 '확실'해지자 김 특보는 제게 '술 한잔 하자'고 해서 인근 인사동 식당에 가서 같이 꽤 술을 마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 특보는 제게 "네 말이 맞다. 호남도 김대중 총재도 한 번은 하셔야지..."라고 말했습니다.

김영삼 정부의 핵심 인물로서 김 특보는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바랬지만, 당시 'DJ 죽이기'에 골몰했던 일부 경남고·서울법대 출신을 포함한 강경 보수세력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둘만의 일화가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얘기입니다. 관계된 다른 분들은 다른 스토리와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동안 가슴 한편에 묻어뒀던 일입니다.

대선을 앞둔 시기였습니다. 보통 점심을 하고 나면 으례 김광일 특보 방으로 찾아갔습니다. 당시는 기자들의 청와대 비서실 출입이 허용됐을 때입니다. 제가 알기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그해 5월 한보사태 비리 혐의로 아들 김현철씨가 구속된 이후 상당한 심적 고통의 시간을 보냈고, 국정의 주요 판단과 결정은 문민정부 첫 비서실장 출신이자 경남고 후배인 김광일 특보에게 많이 의지해왔습니다. 찾아가면, 김 특보는 30대 중반으로 '어린' 기자였던 제게 이런저런 의견을 묻기도 했습니다.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오른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왼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 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한 뒤 청와대를 나서는 모습. 2015.11.22. 연합뉴스 자료사진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가운데)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오른쪽), 김종필 공화당 총재(왼쪽)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 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 창당에 합의했음을 발표한 뒤 청와대를 나서는 모습. 2015.11.22. 연합뉴스 자료사진

DJ 수사 막은 김광일 특보?

그러던 10월 중순쯤이었지 싶습니다. 그달 7일 신한국당 강삼재 사무총장이 '주장'한 'DJ 대선자금' 의혹에 대한 수사 촉구 요구가 많은데 어찌 보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피선거권 박탈을 노린 '사법 쿠데타'에서 보듯이 그때도 강경 수구·보수 세력은 DJ의 대통령 당선을 막고자 어떻게든 검찰 수사를 밀어붙이려고 안간힘을 다했습니다.

저는 반대했습니다. 대선이 코앞인데 검찰 수사를 하면 안 된다고. 저는 몇 가지 논리를 댔습니다. 첫째, 지금 검찰 수사를 한다면 누가 봐도 'DJ 죽이기'란 사실이 명확해진다. 그렇게 하면, 호남은 선거 결과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그러면 1980년 전두환 정권의 '광주 학살'(광주 민주화운동)에 이어 영·호남 갈등은 영원히 치유 불가능하다. '공작'이 아니라 진짜 '혐의'가 있다면 선거 이후에 하면 된다. 왜 괜한 오해를 사려고 하는가.

둘째, YS는 DJ와 함께 오랜 민주주의 투사였지만 '3당 야합'을 통해 수구 군사독재 세력과 손을 잡았다. 1993년 문민정부를 세워 군 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는 등 성취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IMF 사태'를 초래해 나라를 존망의 기로에 서게 했다고.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훗날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받을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이대로라면 '변절한 민주주의자'와 '대한민국 망친 대통령', 그리고 평생 라이벌인 DJ 견제에 골몰한 '권력의 화신' 밖에 더 되겠는가. 참고로 김광일 특보는 1990년 '3당 야합'에 반대하며 YS를 따라 민자당으로 가지 않은 인물입니다.  재야변호사 출신으로 1939년 생인 김 특보는 71세의 나이로 2010년 별세했습니다.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윤석열, 한덕수, 김문수, 지귀연, 심우정, 조희대.
왼쪽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윤석열, 한덕수, 김문수, 지귀연, 심우정, 조희대.

"공정 선거 관리가 YS 살 길"

그러면서 제가 생각하는 '위기에 처한' YS가 그나마 훗날 '명예'를 회복하는 길을 말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공정하고 중립적인 선거 관리'를 확실하게 해낸다면 YS는 훗날 '대한민국에 최초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 첫걸음은 이번 대선을 앞두고 DJ 대선자금 의혹을 수사하지 않는 것이라고.

김광일 특보가 제 얘기를 들었는지, 또 그분이 실제로 결단에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결국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은 '대선 이후로 수사 유보'를 결정했습니다. 대선 12일을 앞두고 월북한 오익제 천도교 교령이 김대중 후보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의 일종의 '북풍 공작'도 결국 검찰은 손 대지 않았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선거를 하루 앞둔 2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마지막 유세를 시작하며 응원봉을 들고서 유세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5.6.2 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선거를 하루 앞둔 2일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마지막 유세를 시작하며 응원봉을 들고서 유세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2025.6.2 연합뉴스

많은 분의 수많은 노력의 결과물이었겠지만, 저는 당시 김광일 특보가 개인은 이회창 후보의 당선을 바라면서도 '공정하고 중립적인 선거 관리'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윤석열과 극우 광신 세력 주도의 '부정선거 음모론'이 횡행하지만, 몇 차례 정권교체가 이뤄진 데서 보듯이 선거 관리만큼은 우리나라가 세계의 톱 수준입니다.  이번 대선에서도 그러길 염원합니다.

27년 전 그날처럼 한편으론 떨리고 한편으로 설레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혹독한 겨울과 봄답지 않은 봄을 지내고 한여름의 초입에 있습니다. 지난 반년의 스트레스를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으면 좋겠습니다. 내일은 '진짜 대한민국'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35년 전 ‘지역주의 3당 야합’을 했던 수구 기득권 카르텔의 붕괴를 알리는 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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