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홍보물 속 한 문장, 감히 '정의'를 말하다니…

“정의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선관위가 집으로 보내온 김문수 후보의 대선 홍보물에 적힌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분노가 치밀었다. 감히 ‘정의’를 말하다니. 

감히 자신의 변절을 미화하다니. 이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를 넘어선다. 

기억을 조작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행위다. 

김문수가 젊은 시절, 진심이었던 시기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태일의 죽음을 가슴에 품고 노동 현장에 투신하며, 고문과 투옥을 견뎌낸 청년 김문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등불이었고 투사의 상징이었다. “노동이 존엄한 사회”를 꿈꾸던 시절, 그는 분명 시대의 양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배반하고 변절했다. 

그리고 과거의 투쟁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하며 권력의 계단을 밟아올랐다. 

대통령 후보자리에 오른 그는 지금 자신의 배신의 여정을 “정의의 길”이라 포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운동의 열정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었다”고 말하며 정치로 향한 선택을 합리화한다. 그는 또 “흔들림 없는 원칙의 길 , 김문수가 걷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묻고 싶다. 

정말 그는 현실을 바꾸었는가? 바꾸었다면, 그 현실은 누구의 것이었는가? 노동자의 것인가, 자본의 것인가?

자신의 과거에 침을 뱉은 그가  진정 흔들림 없는 원칙의 길을 걸어온 것인가?

삼척동자가 웃을 일이다.

국회의원 김문수, 경기도지사 김문수, 그리고 윤석열 정부의 경제사회노동위원장 김문수. 그의 행적 어디에서도 ‘노동자의 편’은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위원장으로 임명되자, 양대 노총은 즉각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유는명확하다. 김문수는 노동의 대화 상대가 아닌, 노동의 적이었다.

그는 노동문제를 협상과 타협으로 해결해야 할 ‘갈등’으로 보지 않았다. ‘장애물’로 인식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그의 구호는 자본의 언어이며, 노동자에겐 통제와 억압의 기조였다. 해고를 자유화하고, 노조의 권한을 축소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후퇴시키는 것- ‘노동자가 불편한 나라’ 그것이 김문수가 말하는 ‘좋은 나라’의 실체였다.

그런 그가 이제 와서 보상을 거부한 깨끗한 정치인을 자처한다. 

마치 자신이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을 자격이 있었지만 고사했다는 듯 홍보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민주화운동 보상은 연간 소득이 당시 금액으로 2,000만원  이하로  생계가 어려운  민주화운동 인정자들에게만 지급되었으며,

고소득자나 공직자는 원천적으로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국회의원이거나  도지사였을 김문수가 보상 대상이었을 리 없다.  민주화운동을 매도하는 정당에 들어간 그는 신청조차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고, 신청했다 하더라도 지급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보상을 거부한 것으로 둔갑시켜 유권자의 감성을 자극한다. 

이는 진실의 왜곡이자 위선의 극치이며,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논란까지 불러올 수 있는 사안이다.

결국 김문수는, 자신의 극우적 정치 노선을 ‘정의’와 ‘청렴’의 외피로 포장하여 중도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고자 한다. 과거의 노동운동 이력을 다시 꺼내어, 마치 여전히 노동자의 편인 양 분칠하지만, 그 껍질 속에는 20년 넘게 노동을 억누르고 자본 권력에 복무해온 실상이 감춰져 있다.

그는 지금, 정의의 가면을 쓴 채 표를 구걸하고 있다. 그러나 유권자는 기억한다. 노동자들은 기억한다. 그와 함께 싸웠던 과거의 동지들 역시 기억한다.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고, 누구를 배신했으며, 누구의 손을 잡았는지를 말이다.

정의는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삶의 궤적을 통해 드러나는 법이다. 김문수는 그 궤적 속에서 ‘정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