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죽은 이가 산 자를 구했다'는 말을 바꿔야 할 시간
대한민국의 운명을 가를 한 주가 시작됐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탄핵 선고를 과연 이번 주 안에 내릴 것인가. 그 질문은 현재가 미래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자, 또한 과거에 대해 답변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은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이가 산 자를 구한다”고 말했다. 내란의 시간에 대한 예언이자 계시와도 같았던 그 말은, 그러나 이제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현재가 과거를 돕고, 산 자가 죽은 이를 구한다”로 바꿔야 한다.
지난해 12월 3일, 계엄의 밤에 국회로 달려간 시민들의 숭고한 행동은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고,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분출이었다. 1980년 5월, 비상계엄 속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시민들의 절규가 40여 년이 지난 현재의 사람들의 가슴에 용기로 살아나 ‘산 자’들과 ‘현재’를 구했다. 죽은 이들이 누워 있던 무덤에서 몸을 일으켜 산 자를 도왔다.
4개월이 지난 지금, 죽은 자들과 과거는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는가. 아니면 구천을 떠도는 '중음신'이 돼 돌아가야 할 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가.
과거는 확정돼 있지 않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서 과거는 오히려 현재나 미래보다도 고착돼 있지 않다. 자신을 스스로 주장할 수 없는 과거는 현재에 의해서 수시로 불려나와 안식을 훼방당한다. 지난 넉 달간에 벌어진 일들이 바로 그 같은 과거에 대한 유린이었고, 현재에로의 강제소환이었다.
광주에서 벌어진 비극이 44년 뒤에 되풀이되려 한 것에서, 탄핵 반대와 계엄령을 옹호하는 망언들에서, 80년 계엄령 때 수많은 시민이 죽어간 피와 살육의 현장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 수괴를 비호하는 주장을 펴는 것이 '5.18 정신을 계승한다'는 기만적인 언설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게다가 이런 주장이 다른 사람도 아닌 역사를 가르치는 이의 입에서 나왔다는 지독한 아이러니에서, 과거에 대해 현재가 가하는 폭압과 유린의 참담한 실상이 전개됐다.
윤석열 정권이 되살리려는 전두환의 망령, 부활하는 서북청년단, 죄인을 영웅으로 만드는 역사 왜곡의 망동, 과거를 다시 쓰려는 위험한 시도들이 횡행했다. 현재의 폭력과 억압이 봉인되었던 과거를 다시 짓밟고 역사를 광란의 춤으로 이끌고 있다. 현재가 과거에 대해 난타하고 발길질하는 폭력의 만행이 펼쳐지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의 현재를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과거를 구하고 죽은 이를 살리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87년 항쟁의 산물이며, 헌법에 대한 수호와 의결로서 육화된 기관이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좌절과 고난이라는 과거의 결산이자 미래의 다짐이다. 헌법은 현실의 반영이자 미래를 향한 당위이며 지향이다. 헌재의 판결, 헌법에 대한 해석이 과거에 대한 심판이자 미래에 대한 결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헌법재판소가 단순한 법률적 판단을 넘어, 시대적 소명을 다해야 하는 기관이라고 하는 것은 헌재의 판단이 단순한 정쟁을 넘어 공동체의 현재와 추구해야 할 미래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재의 헌법적 책무는 다른 말로 하자면 권력기관들이 제자리를 지키도록 조정하는 역할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헌재의 존재 이유는 '정치(正置)', 즉 올바른 자리에 놓이게 하는 것으로서의 정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과거와 현재를 제 자리에 놓이게 하는 것으로서의 ‘정치(正置)’이기도 하다.
헌법재판소가 현재에서 과거를 구해야 할 시대적 소명을 저버린다면, 그것은 역사의 정의를 철저히 외면하고, 과거의 희생을 헛되이 짓밟는 죄악이며, 미래를 향한 우리의 희망을 잔인하게 꺾는 행위다. 산 이를 죽이는 것이자, 죽은 이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현재로써 과거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행위다.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고,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인가 말했다. 인간의 역사에서도 이는 그렇기도 한 것은 물론 오히려 자연에서 그러한 것 이상의 철칙으로 작동해왔다. 역사는 과거에 미처 치르지 않은 비용을 현재에 대해 청구서로 들이밀지만 현재가 현재의 책무를 다하지 못할 때 그 청구서는 거꾸로 현재로부터 과거에로 향한다.
올해 뱀의 해에 우리가 취해야 할 뱀의 교훈도 그와 겹친다. 우리는 교활하고 사악한 존재로 뱀을 먼저 떠올리지만 또한 ‘뱀처럼 지혜롭게’라는 말로 칭송하기도 하는데, 그 지혜는 뱀의 움직임을 뜻하는 사행(蛇行)이라는 말에서, 즉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말에 담겨 있기도 할 것이다. 인간의 삶과 역사에서도 직선은 없다. 휘돌고 감을 때 모퉁이에서 새로운 동력을 얻고 전환을 이룬다. 인간은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이듯 강물의 흐름이 휘돌고 감을 때, 그것은 하나의 좌절인 동시에 하나의 도약이다. 직진이 아닌 굽이굽이 기어가면서 결국 앞으로 전진하는 것, 그 사행으로써 강은 더욱 깊어진다.
4월이면 떠올리게 되는 시 ‘황무지’에서 엘리어트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 때, 그 말에는 언뜻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 즉 '생명의 분출'과 '고통'이 동시에 담겨 있다. 4월은 겨울의 황량함을 딛고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때이지만 그 생명의 약동은 잔인한 것이다. 새 생명은 잠들어 있던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깨어나는 혼란과 괴로움을 겪어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4월로 접어드는 이번 주, 대한민국의 새 생명으로 거듭나기라는 갱생과 소생과 회생의 가능성을 묻는 시간 앞에 헌재가 서 있다. 촛불로 빛나는 광화문 광장과 헌재 앞에 모인 사람들의 위에서는 하늘의 별들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실 저 별의 빛은 몇만 년 전의 과거로부터 온 것이다. 그 과거로부터 온 빛은 현재의 우리에게 과거의 희생을 깊이 기억하고, 역사의 진실을 온몸으로 지켜달라는 요구를 보내오는 것이다. 몇만 년 전 태고의 과거가 보내오는 빛은 우리에게 미리 와 있는 미래이기도 하다. 과거와 현재는 서로에게 빛을 비추며 서로에게 빛을 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를 구함으로써 과거와 죽은 이를, 결국은 산 자를 살릴 시간, 헌재는 그 빛을 결코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 빛의 명령을 거역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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