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 침탈 뒤 변질되기 시작한 '한국형 계몽'의 역사
산업 육성‧언론‧교육 나섰던 애국계몽, 때 이른 소멸
‘브나로드’ 사회변혁은커녕 일제 '품 안의 개량운동'
체제 변혁 의지 없이 체제 결속에 복무 '무늬만 계몽'
아는 게 힘? 우익 민족계열의 위선, 문맹률은 제자리
(본 기사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는 (12.3 계엄령에) 계몽되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변호인의 말이 많은 이들에게 경악과 실소를 자아냈다. <대한민국 보수는 왜 매국 우파가 되었나?>의 작가 이병권은 그러나 이 한마디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계몽주의의 성과와 한계를 짚고 그 뒤에 어린 파시스트의 관점을 포착해 냈다. 대한민국의 흑역사도 담았다. 세 차례로 나눠 소개한다. 편집자주
한국 사회에서 계몽주의는 서구에서 자본주의 성장기에 자연과학의 발전과 함께 합리적인 인간의 이성에서 출발해 새로운 근대국가 설립을 지향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그 첫 번째 양상의 핵심은 일본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침탈에 맞서기 위해 일반대중의 각성을 촉구한 선각자들의 저항운동으로서의 모습입니다. 두 번째 양상은 제한된 개량적 사회 각성 운동 차원입니다. 세 번째 양상은 박정희 정권에서 나타난 바 새마을운동으로 상징되는 관 주도 농촌 개조 운동입니다. 마지막으로 최근 윤석열 내란 국면에서 나타난 극우집단의 파시즘적 계몽 운동 또는 주장입니다. 서구의 계몽 운동과 달리 한국의 계몽 운동은 수세적이고 생존을 위한 각성적 측면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최근 극우집단이 자신을 계몽 세력이라고 지칭하는 모습은 파시즘적 의식 고양 운동으로 보입니다. 한국에서 계몽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국권 상실기 애국계몽운동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뒤, 일제가 침탈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됩니다. 민족 산업 육성을 목표로 한 산업개발 운동, 자주독립의 기반을 조성하려는 언론 운동, 국민교육 운동 등이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운동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합니다. 대한제국의 추동력이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이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대한민보> 등이 간행되어 국민 계몽과 애국심 고취에 큰 구실을 담당하였고, 양기탁(梁起鐸)·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장지연(張志淵) 등은 사설을 통해 일제 침략상을 폭로하고 전국적인 계몽 운동을 펼쳤지만 1910년 국권 상실로 막을 내립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계몽 운동의 근거지 확보를 위해 갑오경장 이후 정부가 관립학교를 전국에 설립하였으나, 이 또한 을사늑약 이후 역할이 제한됩니다. 오히려 민간 유지들이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 확대를 도모하였고 특히 기독교 계열의 학교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습니다. 한글에 관한 연구도 주시경(周時經) 등에 의하여 본격화되어 국문연구소가 설치되고, 한글 소설·한글 신문이 간행되었습니다. <을지문덕전> <강감찬전> <이순신전> 등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 영웅들의 전기와 <이탈리아 건국삼걸전 伊太利建國三傑傳>, <워싱톤전 華盛頓傳>, <피터대제 彼得大帝> 등 외국 지도자들의 전기가 출판돼 독립 의지와 역사의식 고양을 도모했습니다만, 이 역시 국권 상실로 인한 침체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 한계가 분명했습니다.
둘째, 우익 민족계열이 주도한 농촌 계몽 운동
1920~1930년대 중반까지 일제하에 전국적으로 농촌 계몽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일제의 엄혹한 탄압으로 독립운동의 중심이 이미 해외로 빠져나간 상황에서 국내 우익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합법적 영역 안에서의 민중 계몽 운동으로 자신들의 명분과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청년 학생이나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농촌지역에서 저녁 시간대를 이용한 강연회와 토론회, 독서회, 야학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학생들은 여름, 겨울방학을 집중적으로 활용하여 참여하며 문맹 퇴치와 위생 의식 고취, 생활환경 개선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국내의 우익 민족주의 진영이 농촌으로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농민 획득 경쟁’의 성격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20년대 들어 일제의 식민 경영과 지주들의 착취에 대항하여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됐고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이 결성됐습니다. 당시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사상 확산과 맞물려서 좌경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었습니다. 사회주의 계열 청년과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면서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우익 민족주의 계열의 농촌 운동은 대체로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을 통해 농민의 실력을 향상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가장 적극적이었고 성과가 있었던 것은 천도교 계열이었죠.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해 전국적으로 운동을 확산했습니다. 야학과 농민 계몽을 넘어 협동조합 운동, 공동 경작 운동까지 진행했습니다. 기독교계에서도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이들은 한글 보급과 농사 개량 강습회를 개최했고, 일부 협동조합 조직도 추진했습니다. 동아일보 계열은 1928년 문맹 퇴치 운동을 전개하려 했으나 사실상 실패로 귀결됩니다. 애초부터 독립운동이 아닌, 체제 내 개량운동이었기 때문에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농촌 현실을 구조적으로 개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전개된 우익 민족주의 진영의 계몽운동을 짚어보겠습니다.
'아는 게 힘이다' 브나로드 운동
1930년대 들어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김성수, 송진우 등 우익 민족주의 계열이 전면에 나서 진행한 게 이른바 브나로드(러시아어 ВНарод, ‘민중 속으로’) 운동입니다. 브나로드는 이후 민중 계몽 운동의 고유명사처럼 쓰였는데 하필 러시아어이기에 이념대결이 치열했던 당시엔 사회주의운동으로 오해받기도 했습니다. 브나로드 운동은 러시아가 공산화(1917)되기 전인 19세기 말 일어났습니다. 일제하 농촌 계몽 운동의 내용은 1920년대 천도교와 개신교계가 전개하였던 농촌 계몽 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라는 말이 핵심 구호였습니다. 1930년대 사회주의 세력은 농민과 연대하여 토지 분배와 계급 투쟁을 목표로 하는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또한 조선 총독부는 세계 대공황기 농촌의 피폐를 막아 다가올 중국침략의 병참기지로서 농촌의 생산력 증대가 필수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사회안정책으로서 민간 주도 농촌 진흥 운동의 필요성을 인식했다고 보입니다.
한편, 1930년 이후 서울을 비롯한 지방 각 학교에서는 동맹휴학 등 저항이 그칠 새 없이 일어났고, 날이 갈수록 일제의 조직적 탄압과 감시는 가중되었습니다. 분기탱천하는 학생들의 관심을 ‘현재의 투쟁’에서 ‘차분한 준비론’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했을지도 모릅니다. 1929년부터 학생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문맹 타파 운동을 전개하였고,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이 적극 전파하면서 긍정적인 호응을 얻게 됩니다. 김성수, 송진우 등은 대학생들과 대학 출신 지식인들에게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심훈, 최용신, 곽상훈, 박순천 등의 대졸 출신 인재들이 적극적으로 부응하여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 농촌 계몽 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당시 심훈은 중국 항저우 치장대학을, 최용신은 감리교 신학대학교를 각각 졸업한 당시로서는 대단한 엘리트였습니다. 1931년 7월, 학생들은 동아일보의 후원을 받아 ‘브나로드’의 기치를 들고 농촌 계몽 운동에 나서게 됩니다. 학생계몽대를 중심으로 하여 학생강연대, 학생기자대로 나누어 활동했습니다.
학생계몽대는 남녀 고교생으로 구성하여 한글과 산수를 가르쳤고, 학생 강연대는 지금의 대학교 이상의 엘리트 학생들로 구성되어 학술강연, 시국 강연, 위생강연을 전담했습니다. 학생기자단은 고등학교와 대학교 학생으로 구성되며 계몽 운동 여행 일기, 고향 통신, 생활 수기 등을 신문에 투고하였다고 합니다. 심훈(1901-1956)의 소설 <상록수>는 바로 이 시기 농촌 계몽 운동을 배경으로 합니다. 소학교와 농업학교에서 공부한 채영신과 박동혁이 언론사에서 시행한 농촌 계몽 운동 보고대회에서 토론하고, 자신들이 활동하는 농촌공동체에서 한글 교육, 환경 개선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내용입니다. 동아일보에 1935년부터 1년 남짓 연재되다가 일제에 의해 중단됩니다.
일제는 1933년에 들어서면서 만주사변(1931)으로 인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만주사변에서 벌인 만행 탓에 국제 여론이 비등해지자,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1937년부터 중‧일 전쟁을 준비합니다. 일제는 이 시기 군국주의로 무장한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접어들게 됩니다. 일제의 폭압 체제는 자신이 지배하는 식민지에서의 아주 작은 반발이나 이견도 철저하게 짓밟는 철권통치로 이어집니다. 우익 민족 계열의 ‘브나로드’가 막을 내리게 된 배경입니다. 일제의 통제 내에서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기본적 농촌 계몽 운동이라는 체재 내적 한계가 분명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회주의 진영이 주도했던 혁신성을 찾기 어려웠습니다. 특히 일제가 추진하던 농촌 진흥 운동의 하부운동 정도로 취급되면서 차별화에도 실패하고 기껏해야 관제 농민 운동인 농촌 진흥 운동에 포섭되는 수준에 그치게 됩니다.
혹세무민했던 이광수
혁명적 농민 운동을 전개하던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민족주의 계열의 농촌 계몽 운동을 일제와 타협한 개량 운동이라고 비판한 까닭입니다. 일제는 1933년 기존 농민 관련 단체들을 관제 농민 기구인 ‘조선농회(朝鮮農會)’로 강제 통합하는 등 농촌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관제 농촌 진흥 운동이 전면적으로 전개되면서 계몽 운동은 쇠퇴하게 됩니다. 사회주의 계열의 혁명적 농민 조합 운동도 일제의 혹독한 탄압 속에 1930년대 중반부터 쇠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제에 교묘하게 부역하며 혹세무민하였던 이광수를 짚고 가야 합니다. 이광수는 민족의 정신 개조가 선행되어야 장차 독립도 준비할 수 있다는 ‘준비론’과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동시에 펴내면서 노골적인 친일행각을 이어갑니다. 이광수는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기획과 운영, 기사화를 통한 홍보까지 사실상 브나로드 운동을 관장했습니다. 동시에 혹시라도 일제의 눈 밖에 나지 않을까 철저히 운동의 정치적 확대를 막고 철저한 민생운동으로 한계를 긋고 그 안에서만 활동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이광수의 한계와 의도는 ‘오로지 배워야 산다. 배우는 것이 곧 힘이다 !’ 라는 구호와 참가자들에게 신신당부했던 지침에 드러납니다. ‘글과 셈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운동에 혼합하지 말 것.’ ‘지방 지국의 알선을 받아 당국의 허가를 받은 후에 할 것.’ ‘동포에 대한 봉사이므로 품행에 주의할 것.’ ‘건강에 유의할 것.’
브나로드 운동(1931~1935)은 전국 1000곳에서 5,751명의 학생이 참여하여 97,598명에게 강습을 했습니다. 특히 1934년에는 만주와 일본 등 국외까지 운동을 확산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배부된 교재만 210만 부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외형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명백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첫째, 일제가 학생운동의 힘을 빼고, 농민을 순화시키려는 차원에서 제한적으로 허용했던 관제 운동이었다는 점입니다. 둘째, 가장 큰 목표였던 문맹률 저하조차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1945년 국세조사에서 한국인의 문맹률은 78%로, 1930년 문맹률 77%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문맹은 광복 이후 대대적인 퇴치 운동 뒤 개선돼 1980년 무렵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일제는 기초적인 문자 교육도 외면했습니다. 오로지 일제에 충성하는 식민지 신민을 길러내는 우민화 정책 때문이었죠. 읽고 쓰는 능력이 생기면 생각하고, 저항하고, 결국 일제에 반기를 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민족적 숙원이 담겼었다면 탄압을 받더라도 해외나 국내 일각에서 지하운동으로 전개되지 않았을까요?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과 마찬가지로 사회 발전은커녕 체제 결속을 강화하는 것으로 귀결됐습니다. 다음은 아직도 많은 이들이 향수를 갖고 있는 새마을운동을 살펴보겠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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