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에서 울먹이며 밝힌 구타와 고문의 고통
사실확인 내세우나 속내는 경력 깎아내리기
타인의 기억을 함부로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실증'의 폭력은 가해자를 희생자로 만들수도
"국회 운동장 근처에서 본청으로 한 발짝씩 내디딜 때마다 36년 전 1988년 9월의 밤이 마치 어젯밤 악몽처럼 떠올랐습니다. 새벽 1시 안기부에 잡혀 지금도 알 수 없는 서울 을지로 어디쯤 한 호텔로 끌려가 수건으로 눈을 가린 채 속옷 차림으로 4시간 동안 주먹질, 발길질로 고문 폭행을 당했습니다. 살아있음이 고통이었습니다."
지난달 25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심판 11차 변론에서 국회 소추인단 대표 정청래 법사위원장이 울음을 삼켜가며 이어간 최종 진술의 일부다. 정 위원장이 감정에 겨워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 법정에는 안타까운 침묵이 흘렀다
이런 정청래를 조롱하는 이들이 있다. 김근식 송파병 당협위원장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은 전통 미디어까지 자세하게 실렸다. "수건으로 눈 가리고" 울먹인 정청래에게 김근식은 "뻥같다"고 했다. 찾아보니 김근식 본인이 직접 쓴 표현이다.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기 전 학자인 그의 논문을 꽤 읽은 사람으로서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다.
정청래의 아픈 기억에 대한 조롱
정청래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그의 아픈 기억을 조롱하는 일은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이전에도 소셜미디어(SNS)에서 정청래의 학생운동 전력을 조롱하는 이가 있었다. 과거 학생운동 전력의 진실성을 뒤흔들어 현재의 정치적·법적·사회적 위상을 끌어내리려는 비열한 시도다. 먼저 조롱의 내용부터 살펴보자.
(정** 페이스북)
얼마나 대단한 지하혁명조직을 하셨길래 88년에 불법연행에 고문 폭행을 당하셨을까? 개뻥이지. 그시절을 아는 운동권은 이런 거짓말 함부로 못한다.
꼴랑 몇년 하다만 학생운동 경력 그만 팔아먹어라. 내가 다 부끄럽다. (2025.2.26.)
(댓글)
권** 살인의 추억 영화보고 지은 이야기 같습니다
김** 1988년 9월.. ; 김** 그렇네요. 딱 올림픽이네 ㅎㅎ
Ch* S* 81학번 내가 웃을 정도면 다 구라임. ^^ㅋㅋ
(김근식)
"1988년 9월에 정확히 무슨 사건으로 안기부에 끌려갔다는 건지, 자세히 설명해보라. 아무리 생각해도 정 의원님 뻥같다"
"그때는 계엄 상황 아니었고 민주화 이후여서 불법연행 고문이 불가능했다. 안기부가 일개 대학생을 체포 고문할 필요가 없었다"
"(이는) 오직 정 의원 자서전(거침없이 정청래)에서 정 의원 혼자만 주장하는 확인 불가능한 뜬소문에 불과해 보인다"
"꼭 관련 사건 기록이나 관련자 증언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밝혀달라. 제가 당시 학생운동과 건대 출신 주위 분들 수소문해 보니 이를 입증해줄 기억은 아무도 없다" (문화일보 2025-02-26)
타인의 기억 함부로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1988년 9월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과연 정청래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까?
역사학은 일반적으로 자료에 바탕해서 사실관계를 재구성하고 해석한다. 학자들은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교차 검증을 한다. 증언은 최근 구술사 등의 연구방법론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더 엄밀한 검증 대상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사건 서류만 믿던 캐릭터(서태윤)도 있지 않은가.
20년 전 오마이뉴스의 책 소개 기사 제목이다. ‘60년 전 40인이 바라본 '해방공간' 풍경 <8.15의 기억>’이란 부제목이 붙어 있다. 기자, 해녀, 미용사 등 다양한 구술자들이 8.15의 기억을 풀어놓았다. 8.15 해방 때 만세소리는 없었다는 이들의 주장은 혹시 거짓은 아닐까? 여기서 최소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8.15의 기억>에 등장하는 40인은 자신들이 만세를 부르지도 않았고 부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증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주장도 있다. 세계일보는 지난 2016년 8월 12일치 신문에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난 것에 만세를 부르며 환호하는 모습’을 담은 자료사진을 게재했다. 물론 세계일보가 보관하고 있던 자료사진이 1945년 8월 15일 당일이 아닐 수도 있다. 수집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거나 보관하고 기사화 하는 과정에서 왜곡됐을 수도 있다.
정청래의 기억이 잘못됐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지만 김근식이나 SNS에서 올라온 글 정도의 주장으로 정청래의 기억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정황 증거도 되기 어려운, 각자의 단편적인 기억에 의존해 타인의 기억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증언, 사실과 어긋나 진정성 더해
기억 활동가 임지현은 ‘기억전쟁’(휴머니스트, 2019)에서 심리학자 도리 라우브(Dori Laub)의 통찰을 소개한다. 1944년 10월 아우슈비츠에서 수감자 폭동이 있었다. 굴뚝 4개가 폭파됐다는 증언이 사실과 어긋나지만 오히려 더 진정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질 때 인간은 그것을 과장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실증을 기본 방법론으로 삼는 역사학에서 아직은 소수설이지만 유력하게 떠오르는 견해로 보인다. 당시 폭동 현장에 굴뚝이 하나뿐이었다고 해서 모든 증언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는 통찰이다. 임지현의 논의를 정리하면 이렇다. 실증의 ‘폭력’은 오히려 가해자를 희생자로 만들 수 있다.
정청래의 기억이 진실인지 판단할 자료는 갖고 있지 않다. 역사학을 비롯한 학계에서 밝힐 문제다. 그렇다고 해도 정청래의 아픈 기억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굴뚝 1개를 4개로 잘못 증언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의 비극이 없었다거나 고통스럽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앞에서 정청래의 ‘1988년 9월의 밤’을 부정하는 글을 조롱으로 단정했다. 처음부터 조롱이라고 단정지은 이유는 악의적인 비난이기 때문이다. 정청래의 발언을 내가 믿는다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1988년이 아닐 수도 있고, 9월이 아닐 수도 있고, 호텔이 아닐 수도 있다. 낮 1시였을 수도 있고 4분 정도 두들겨 맞았을 수도 있다. 진실은 알기 어렵지만 우리는 5월 학살에 대한 황석영의 기록(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이나 북한 수용소에 대한 강철환의 기록(수용소의 노래)을 대체로 신뢰한다. 세부 사항은 일부 어긋나도 참혹한 비극 자체를 전면 부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설혹 부정확한 기억이라도 그 누구도 조롱할 권리는 없다
헌재에서 윤석열 쪽 김계리 변호사는 국보법 전력이 있는 민주당 국회의원을 줄줄 읊으면서 정청래도 포함시켰다. 정청래는 1989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를 반대하기 위해 주한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폭탄 투척 및 방화를 기획한 혐의로 징역 2년을 살았다(더퍼블릭, 2025.2.2.). ‘1988년 9월의 밤’ 이후의 일인데, 양자를 연결하면 정청래의 증언이 오히려 사실에 더 가까워 보인다.
페이스북에 정청래의 학생운동 경력을 조롱한 글은 이미 2023년에도 발견된다(민** 페이스북, 2023.11.16.). 이에 따르면 정청래는 1988년 건국대 조통특위 위원장이었다. 민**는 ‘건국대 특위위원장은 굳이 연행해야할 이유가 많지 않은 애매한 위치였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정청래를 조롱하는 당사자들이 알지 못하는 거물급이었을 가능성을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 90년대에 목격한 학생운동 조작사건 중에 '반미불패'가 있다. 대자보에 ‘반미불패’라는 낙관을 그렸다가 조작사건으로 발전한 황당한 ‘해프닝’이었다. 지나고 보니 해프닝 정도로 회고할 수 있지만, 당시 연루된 사람들은 실존적 아픔이 상당했다.
한총련 의장 출신 수배자 선배에게 후원금을 걷어 줬다가 유학을 가지 못한 사례도 보았다. 계엄도 없고 그럴 때는 아니라고 하는, 민주화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열렬히 활동하던 후배는 독일에 갔다가 몇 년 전 의문사했다.
2024년 12월 3일에 계엄 난동이 버젓이 자행됐다.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의 아픔이 과연 없었다고 어찌 쉽게 단정할 수 있는가? 아직도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있는 숱한 열사들의 아픔은 어찌할 것인가? 설혹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더라도 섣부른 단정은 타당하지 않다.
설혹 부정확한 기억이라도 그 누구의 아픔을 조롱할 권리가 있는가? 또한 그 때문에 현재 감당하고 있는 정치적·법적·사회적 위상이 폄훼되어서도 안 된다. 학생운동 경력의 부정은 단순한 사실 논쟁이 아니다. 민주화와 분단 극복을 위해 노력한 역사를 부정하는 저열한 행위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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