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국민은 없고 윤석열 큰소리만 울린다
얼마 전에 한 전직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최근 “윤석열의 헌법 위반 재판을 보면 전 세르비아 대통령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국제형사재판이 떠오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밀로셰비치는 1990년대 초에 집권한 이래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내세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 등 발칸반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 전쟁으로 총 20만 명이 사망하고 300만 명이 난민이 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는 7개 소국으로 쪼개졌다.
국제형사재판소를 자신의 선전장으로 만든 ‘도살자’ 밀로셰비치
2002년부터 시작된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밀로셰비치는 자신이 직접 변론에 나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변호인들을 지도하였다. 그는 스스로 이 재판을 ‘승리자의 재판’이라며 자신이 재임 기간 자행한 잔혹 행위에 대해서도 유고 공화국의 분열을 막으려 한 애국적 행위이기에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런 재판의 풍경이 지속되자 국제형사재판소가 밀로셰비치의 선전장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재판 중에 극렬하게 반발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밀로셰비치를 영웅화하였다. 2006년에 감옥에서 사망한 밀로셰비치를 기리는 장례식이 지지자들에 의해 대규모로 치러질 정도로 극렬 민족주의의 현상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직접 자신을 변론하며 궤변을 늘어놓고 지지층 결집을 시도하는 윤석열의 행태가 바로 밀로셰비치의 부활이다. 어찌된 일인지 최근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탄핵 심판은 ‘가해자 관점’이 여과 없이 노출되어 국민의힘과 극우 시위대를 더더욱 결집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모든 권력의 원천인 국민이 헌법 재판의 주체가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위헌적인 계엄으로 국가가 당한 피해가 무엇인지가 심판의 핵심 내용이 되는 ‘피해자 관점’이 사라져 버린 거다.
피해자는 사라지고 가해자 관점의 서사만 붙들고 있는 헌재
비유하자면 윤석열은 누군가의 뺨을 때린 가해자지만, 재판에서 윤석열은 누군가의 뺨을 때린 적이 없고 다만 우연히 건드렸다고 말한다. 뺨을 때리려는 고의성이나 목적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이 가해자의 주장이 맞느냐, 아니냐만 따질 일이 아니라 실제로 뺨을 맞은 누군가가 나와서 자신이 당한 아픔과 굴욕을 말해야 한다. 지난 12·3 계엄 당시에 33살의 김동현 씨는 고양이에게 일주일 치 밥을 주고 집의 현관문 비밀번호를 지인에게 메시지로 발송하면서 여의도 국회로 향했다. 어쩌면 계엄군에게 잡혀갈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한 거다. 그 날 1공수여단의 장갑차를 맨몸으로 막으며 김 씨는 주변의 시민들에게 “계엄군을 막아달라”고 소리쳤다. 이런 김 씨가 왜 윤석열의 헌법 재판에 나올 수는 없는 걸까? 김 씨가 아니더라도 그 날 공포와 혼란 속에서 희생을 각오한 시민이나 용기 있게 행동한 국회 보좌진의 목소리는 왜 헌법 재판에서 들리지 않는 걸까?
조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신속하게 재판을 끝내려니까 막상 헌법의 주체인 국민의 목소리가 사라진 헌법 재판이 되고 말았다. 계엄이냐 계몽이냐, 의원이냐 인원이냐, 국회 봉쇄냐 질서 유지냐는 별의별 쟁점들은 가해자가 만들어 낸 수백, 수천 가지 물타기용 시나리오에서 나온 것들이다. 이런 식으로 가해자가 그럴듯한 변명을 만들어 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창작이 가능할 뿐더러, 그 변명을 다 합치면 윤석열 말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된다. 이를 국민의힘과 극렬 지지자들이 적극 수용하여 하나의 서사를 구성하게 되면 드디어 가해자 중심의 판이 깔리게 된다. 부정선거 음모론을 믿으며 윤석열 탄핵을 반대하는 여론이 거의40%에 육박하는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필자는 이를 ‘밀로셰비치 관점’이라고 부를 것이다. 단순히 헌법재판소만이 아니라 최근 언론과 유튜브 어디에서도 헌법의 주체인 국민과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과거 유고 내전에서 차마 필설로 묘사하기 어려운 비극적 상황은 비현실적인 희생자 숫자로 표백되고 밀로셰비치의 서사만 기억에 남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앞으로 진행될 서울중앙지법의 형사 재판에서도 윤석열은 자신의 방어권을 최대한 이용하여 같은 궤변으로 지연 전략을 펼치게 될 경우 한국 사회 역시 알 수 없는 영역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헌법 재판의 의미 간과하면 3차 폭동 벌어질수도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어쩌면 조기 대선이라는 정치 일정만을 고려한 나머지 헌법 심판과 재판의 의미를 간과하고 “빨리 진행만 하자”는 조급성이 문제 아닌가. 실제로 헌법재판소의 변론과 대규모 극우 집회가 열리는 날에 일베, 디시인사이드의 극우 갤러리 등에 윤석열 탄핵 기각을 촉구하거나 기각을 확신하는 게시물이 폭증하는 현상만 보아도 지금의 헌재 재판에서 누리는 윤석열의 선전 효과는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더 심각한 것은 국민의힘이 윤석열과 결별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윤석열을 희생자, 순교자로 묘사하는 국민의힘 정치인들이 극우 집회 현장으로 달려나가면서 극우 대중운동에 힘이 실리고 있다. 물론 3월 초순에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을 파면하고 야권과 시민사회가 새로운 정국의 주도력을 확보한다면 필자의 우려는 단순한 기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극우 세력은 헌법재판소를 습격하자는 선동에 이어 앞으로 치러질 조기 대선에서도 새로운 봉기를 획책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작년 12월 국회에 계엄군이 난입한 1차 폭동과 올해 1월에 서부지법에서의 난동이라는 2차 폭동에 이어 헌법재판소나 서울중앙지법, 또는 그 외의 장소에서 3차 폭동을 사실상 예고하는 흐름이다. 그 배후에는 일부 기독교 세력과 극우 유튜브 등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 상실과 적대감에 끌려가는 ‘분노 세대’가 말하고 있다는 점이 더욱 중요해 보인다. 자신의 소외된 처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은 분별력 있게 세상을 보는 지혜의 검을 녹슬게 한다. 자신이 만든 비합리적인 세계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자기 파괴적인 길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그간 정치권과 시민사회는 방관만 했다. 분노 세대가 희망의 세대로 바뀌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국을 뒤흔들 시한폭탄을 머리에 이고 불안한 시대를 살아야 할 판이다.
시민 법정 세우고 탄핵 연대 부활시키자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정치 공간에서 자신의 희생을 불사하면서까지 민주주의 회복을 지지하는 청년의 이야기들을 발굴해야 한다. 앞서 말한 김동현 씨 외에도 공동체의 선을 위해 희생하고 결단했던 계엄의 밤, 그 아름답고 숭고한 이야기들이 맨 앞으로 나와야 한다. 헌법 재판과 형사 재판에서 주인공인 시민이 사라진 채 진행될 수 밖에 없다면 우리는 시민 법정이라도 개최해야 한다.
아울러 계엄에 반대하고 윤석열 탄핵에 찬성만 한다면 그 어느 누구와도 연대할 수 있다는 사회적 합의를 추진해야 한다. 이를 통해 합리적 보수 세력이 있다면 극우 세력과 결별하도록 안내하고 이를 통해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이 극우와 결별하자는 최소 연합이 추진될 필요가 있다. 2017년 박근혜 탄핵 당시 탄핵 연대가 바로 그런 최소 연합이었다. 그 당시의 촛불 정신으로 되돌아가는 탄핵 연대의 부활, 그것이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 이루지 못했던 숙원을 완수하는 길이다.
관련기사
개의 댓글
댓글 정렬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