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관민공동회에서 처음 국가를 위한 ‘만세’
한국 민중에 새 세상 염원하는 DNA로 각인돼
3.1혁명 때 목숨 바쳐 외쳤던 ‘독립만세’ ‘민국 만세’
탄핵 촉구 집회 청년들이 3.1혁명과 연결한 시천주
윤 파면 후 직접 민주 주민자치 권력 만드는 혁명을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연휴 중에 OTT드라마 <오징어게임>과 <중증외상센터>를 보았다. 내란 스트레스 해소할 겸 봤는데 세상 걱정을 피할 수는 없었다. 두 드라마가 설정한 공간은 각각 달랐지만, 두 드라마가 서있는 세상은 같았다. 모두 돈 때문에 생명을 포기하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었다. 일확천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거는 세상과 돈 때문에 골든타임을 포기하는 세상. 그런 헬조선이 창작의 상상력을 만들어 낸 무대였다는 점에서 가슴이 아렸다.
두 편 모두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는 메시지를 영웅을 통해 보여주고 있었지만, 내 눈길을 끈 것은 드라마 속 청년들의 모습이었다. <오징어게임>에서 사람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사수(핑크 가드) 역할로 나오는 청년들, 그리고 <중증외상센터>에서는 주변의 조롱 섞인 눈총을 받으면서도 응급환자들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의사와 간호사 청년들. <오징어게임> 속 청년은 서부지법에 난입한 청년들과, <중증외상센터> 속 청년들은 남태령에서 기층 민중들과 연대한 청년들과 겹쳐 보였다. 헬조선에 살고 있는 2030청년들을 어떤 부류의 청년들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어떤 부류의 청년들을 우리 사회의 주류로 만들어야 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남태령 대첩’에서 농민들과 연대한 2030여성들, 그리고 사회적 약자로서 용기 있게 자신을 드러내며 연대를 하고자 했던 청년들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받아안을 것인가에 대한 실천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2025년 다시 3.1혁명을 생각한다.
목숨 바쳐 민국(民國) 세운 ‘3.1혁명’
곧 ‘3.1절’로 불리는 3월 1일이 온다. 1919년 3월 1일 시작한 만세 시위를 ‘3.1운동’이라 부르지만 난 ‘3.1혁명’이라 불러야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이건 그 시대를 살았던 독립운동가 분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기도 하고, 한낱 임금의 성을 바꿔 왕조를 바꾼 사건조차 혁명 즉 역성(易姓)혁명이라고 부르는 판에 군주제를 민주공화제로 바꾼 대사건을 혁명이라 부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3.1혁명은 한반도에 수천 년 이어져 온 왕국(王國)을 민국(民國)으로 만든 최초의 사건이자 한반도 최고 최대의 혁명이다. 이 혁명을 생각하면 난 우리 선조들에 대해 한없는 감사함과 함께 한민족으로서의 깊은 자긍심을 갖게 된다.
1919년 3월 1일 첫 시위 후 약 3개월 간 전국적으로 연인원 200만여 명이 1500여 회 시위를 했고, 이 과정에서 7500여 명이 숨지고 1만 6000여 명이 다치고 4만 7000여 명이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참고) 이 숫자를 당시의 상황으로 상상해 보자. 3월 1일 시위 때 수많은 사람이 잡히고 다치고 죽었다. 왜놈들은 비폭력으로 나선 우리 선조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잔혹하게 살해하고 폭행하고 욕보였다. 그런데 며칠 지나고 시위에 다시 나간다. 또 다치고 죽는다. 저 시위에 나가면 일본놈들이 가만두지 않는다고 소문이 나고, 자신들의 눈으로 그 참혹함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또 나간다. 그렇게 수개월 동안 시위는 이어졌다.
단 하루를 살아도 나라의 주인으로 살고 싶다는 꿈
잠시 그 진압하는 왜놈의 입장이 돼보자. 그 조선인들이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미친놈들로 보이지 않았을까? 조선인들은 총, 칼에 찔려 죽고, 불에 타 죽으면서 ‘독립 만세’를 외치고, ‘공화국 만세’를 외친다. 그런데 이 조선인들은 독립된 공화국에서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 자신들이 살아본 적도 없고 자신들이 죽으면 살 세상도 아닌데 그 세상을 위해 만세를 부른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광신도가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진압을 하면서도 그 눈빛에 겁이 났을 것 같다. 다시 만세를 외쳤던 분들을 생각해 본다. 왕 밑에서, 이제 왜놈 밑에서 신음하며 비굴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내가 나라의 주인으로 사는 삶, 그 삶이 이 땅에 만들어져서 영원무궁하길 바란다. 비록 내가 새 세상에 못 살더라도 그런 꿈같은 세상에서 내 새끼들은, 내 가족들은 살기를 바란다. 그리고 단 하루를 살아도 그런 세상에서 살고 싶다. 그래서 난 ‘독립 만세’, ‘공화국 만세’를 외친다.
“사람된 양심의 발로로 말미암은 세계 개조의 큰 기운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것을 드러내는 터이니, 이는 하늘의 명령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므로,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것을 막고 누르지 못할 것이라.” (3.1독립선언문 중)
식민지 노예와 같은 처지에서도 우리 선조들은 세상을 구원하고 뒤엎을 호연지기를 보여줬다. “보지 않고도 믿는 자들은 복되다”고 했던가. 세상의 큰 기운과 함께 한 이 복된 기운이 어딜 가겠는가, 당시 인구가 2000만 명가량이니 일가 친족 중 혁명의 대열에 참여하지 않은 이가 없었을 것이며, 그 공분(公憤)을 나눠 갖지 않은 민중이 없었으리라. 그 ‘만세’의 복된 염원이 이후 우리 민족민주 혁명의 역사를 이끈 원동력이 되었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한류를 만들어낸 저력과 상통하지 않겠는가. 이런 감동적인 3.1 혁명의 의미를 곱씹으며 내가 주목한 또 하나는 ‘만세’ 구호였다.
전제군주 아닌 ‘독립 만세’ ‘공화국 만세’라는 놀라운 변용
지금은 우리가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사람 또는 상황에 ‘만세’를 외치지만, 주지하듯이 옛날에는 황제에게만 붙이는 구호였다. 왕에게는 ‘천세’를, 황제에게는 ‘만세’를 외쳤다. 그래서 조선 왕은 쓸 수 없고 중국 황제만이 독점했던 구호가 ‘만세’였다. 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고 조선의 왕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우리도 만세 구호를 사용하게 됐다. 그렇게 전제군주 시대 때는 함부로 쓸 수 없는 구호였다. 황제가 아닌 자에게 ‘만세’를 외쳤다간 대역죄로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충성의 의미든, 아부의 의미든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외쳤을 ‘만세’ 구호. 나에게 부와 권력을 줄 전제군주를 추앙하며 외쳤을 ‘만세’ 구호를 오히려 전제군주를 폐하는 ‘공화국’ 뒤에 붙이는 창조적 변용을 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더구나 나를 죽게 할 지도 모를 ‘독립’과 ‘공화국’ 뒤에 붙여 사용하는 공공적이고 헌신적인 변용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궁금했다.
그 시대의 자료들을 찾아봤다. 1898년 10월 29일 종로 보신각 네거리에 수만 명의 민중이 모였다. 대한제국이 철도, 광산 등 나라의 각종 이권을 외국에 넘기는 것을 막기 위해 독립협회와 민중들의 거센 요구로 정부의 각부 대신들까지 불러내 개최한 혁명적인 집회. 바로 관민공동회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첫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후 고종 황제와 구체제의 변화를 이끌어 낸 독립협회와 민중은 그 여세를 몰아 정부의 각 부 대신과 민간 단체들 그리고 일반 평민들을 아우르는 관민공동회를 개최하기에 이른 것이다.
1898년 관민공동회 이래 민중의 DNA로 새겨진 혁명 구호 ‘만세’
지금의 각 부 장관들에 해당하는 대신들을 종로 네거리 광장으로 불러내 함께 민중대회를 연 관민공동회의 첫 연설자가 천민에서 해방된 백정이었다는 점이 놀랍다. 더 놀라운 것은 이날 관민이 협력하여 6개 조의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다. 바로 헌의 6조(獻議六條)다. 헌의 6조의 내용은 의회 격인 중추원을 강화해 국권과 국부의 침탈을 막고, 황제가 무소불위로 갖고 있던 예·결산권, 사법권, 인사권을 견제하고 법치 행정을 요구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바꾸고자 하는 제헌의회를 관민이 광장에서 평화롭게 만들어 낸 것이다.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차고 넘치는 지금도 하기 어려운 제헌의회를 마이크나 스피커도 없는 광장에서 127년 전 우리 조상들은 해냈다. 이 합의문에 모든 대신이 서명한 뒤, 참석했던 중추원 의장 한규설은 이렇게 말했다.
“금일의 관민협의는 오백 년 초유의 일이다. 의결한 바 6조는 모두 법률 내에 원정(原定)한 것들이다. 사람의 몸에 비하여 말할 것 같으면 정부는 피부이고 인민은 장부(臟腑)이다. 간절히 바라건대 관민이 합심하여 범위를 넘지 말며 영구히 하나가 되기를 기약하여 회중이 관민일심(官民一心)이 되었으니 부강의 기초가 금일에 정하여졌다. 국가를 위하여 만세를 부르자”
이에 그 자리에 모인 수만 명의 회원들이 기쁨에 넘쳐 만세를 부르며 정회를 했다고 한다. 이때 현장을 상상해 보면 마치 작년 12월 14일 윤석열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을 때의 광장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그 감격과 환호 속에서 함께 떼창을 했던 ‘다시 만난 세계’가 아이돌의 대중가요에서 전 국민의 민중가요로 각인됐듯이 1898년 10월 29일 오후 종로 네거리에서 수만 명의 민중이 함께 외친 ‘만세’는 황제 1인을 위한 구호에서 국가공동체의 만복을 기원하는 구호로 각인됐을 것이다. 황제의 것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오는 큰 감흥과 함께 그 ‘만세’는 우리가 함께 외치면 예전에 없던 세상을 불러내는 주문처럼 각인됐으리라. 그래서 21년 뒤 이 만세 구호는 ‘독립 만세’, ‘공화국 만세’로 부활했다. 1919년 3.1혁명의 ‘만세’는 21년 전 우리 민중들에게 심어진 혁명적 DNA가 부활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예전에 없던, 민주공화국이라는 세상을 불러내는 신들린 주문처럼 사용됐으리라. 그리고 실제로 없던 민주공화국을 불러냈다.
탄핵 촉구 집회에서 펼쳐진 시천주의 세상
3.1혁명과 만민공동회에서 보듯 우리 국민은 거리에서, 광장에서 새 나라를 세우는 헌의(憲意)를 만들어 낸 나라다. 지금 계속되는 탄핵 촉구 집회에서도 수많은 헌의들이 모여지고 있다. 특히 2030 청년들이 만들어 내는 연대의 목소리는 이제 우리 사회가 만들어 내야 할 새로운 세상의 헌의라고 생각한다.
한 달에 한두 번 외출을 할까 말까인 고립 은둔 청년이 6일째 집회에 나오고,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달고 산다는 트렌스젠더, 최저 임금과 노동법의 보호를 받고 싶다는 배달노동자, 불평등이 없는, 인간의 존엄이 보장되는 민주주의 사회를 원한다는 뇌병변 장애인, 언제 어디서든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다시 모이면 좋겠다는 청년,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환경이 될 수 밖에 없다. 소수자들이 ‘내가 이런 점 때문에 힘들다’라고 말하면 결국 나와 무관할 수 없다는 인식을 많이 하게 된 것 같다”는 한 여성의 인터뷰를 들으며, 난 동학 교주 수운 최제우 선생이 말한 시천주(侍天主)의 세상을 보는 것 같았다. 수운 선생은 시천주의 시(侍)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다.
시자, 내유신령 외유기화 일세지인 각지불이자야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모신다는 것은, 내 안에 신령이 있고 이를 바깥 기운으로 내보여, 한세상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인터뷰 속 청년들은 각자의 진심(내유신령)을 연대의 장에서 공론화 했고(외유기화) 이 세상에서 서로 무관할 수 없고 도움이 필요할 때 서로 도와야 함을 알고 있었다(일세지인 각지불이). 생각해보면 구한말 만민공동회 연단에 오른 평민들과 3.1혁명 거리에 나선 민중들도 모두 시천주의 실천을 한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시공간을 초월해 시천주의 실천으로 연결되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임을 연대와 공존의 장이 된 탄핵 촉구 집회가 보여주고 있었다. 12.3 내란 발발 이후 윤석열 탄핵 촉구 집회를 주도하고 있는 연대 조직의 이름은 ‘윤석열 즉각 퇴진, 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다. 이렇게 이름을 지은 것은 이 조직에 참여한 수많은 주권자와 단체들이 윤석열 파면 이후 사회대개혁에 대한 열망까지 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지금의 집회가 대한민국을 만들었던 시천주의 마음으로 사회대개혁을 하는 2025년판 3.1혁명의 광장이 되기를 바란다.
“권력은 나로부터 나온다”를 실감하는 사회대개혁 이루어야
나는 사회대개혁의 핵심은 직접 민주 주민자치의 확대와 강화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주권자의 삶이 다양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중앙에서 정보를 취합하고 권한을 나눠주겠다는 방식의 국가 운영은 정체현상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주권자가 삶의 현장에서 즉각적이고 자치적으로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지 않고는 민주공화국의 위기가 올 수밖에 없다. 주권자가 2016~2017년 촛불혁명 때 ‘이게 나라냐’라며 갈구했던 새로운 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촛불혁명 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노래를 함께 부르며 국민들은 헌법 1조 2항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뼛속 깊이 각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정말 국민들은 주권자의 권력을 실감했을까? 직접 민주의 확대와 강화를 경험했을까? 그렇지 않다. 다양한 국민들이,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가 광장에서 쏟아지고 있다는 것은 1987년 이래 유지돼 온 대의제 정치와 관치행정이 주권자의 뜻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이런 지체현상은 파시즘의 숙주가 될 것이다. 지난 서부지법 난동은 그런 배신 당한 주권자가 어떻게 파시스트들에게 선동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때문에 내란의 종식과 사회대개혁이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사실 2025년 대한민국 국민은 1894년 동학혁명 때 집강소를 설치해 운영하며 누렸던 주민자치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 일반 국민이 일상생활과 관련한 정책을 직접 결정하고 자신의 의사가 행정에 반영된다면 국민은 자신이 주권자임을 실감할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일반 국민이 일상에서 가장 자주 접하게 되는 행정기관은 읍·면·동 사무소다. 이곳에 가면 행정체계의 가장 하부 조직에서 말단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는 공무원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주권자로서 의견을 얘기하면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고 위에서 결정한 대로, 법이 정한 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얘기를 접하기 일쑤다. 이런 식이다 보니 선거할 때와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소리칠 때 말고는 도대체 나로부터 나온다는 권력을 실감할 방법이 없다.
직접 민주 주민자치 권력으로 새로운 3권분립 민주공화국을
그런데 만약 읍·면·동에서 필요한 법을 주민 토론과 숙의를 통해서 만들고 자체 예산으로 해당 지역에 필요한 일들을 처리하는 방식으로 자치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읍·면·동 단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기능과 역할을 상급기관에 보충적으로 위임하는 방식으로 국정이 운영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처럼 중앙정부가 권한과 예산을 지방에 내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주권자들과 일상을 접하고 있는 읍·면·동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자율적으로 먼저 하고, 할 수 없는 일들을 중앙정부가 하도록 위임하는 것이다. 미국, 독일, 스위스 등에서 하고 있는 방식이니 민주공화정에서 낯선 것도 아니다. 입법, 사법, 행정 중앙정부가 권력을 내려놓겠다고 마음먹으면 될 일이다. 지방행정과 정치인을 중앙에 줄 세우겠다는 생각을 바꾸면 될 일이다. 사고 현장에서 현장 책임자에게 실권을 주듯 주권자들의 삶의 현장에 실권과 자치권을 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방자치법이, 선거법이 또 어떤 법이 그리고 헌법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스템 속에서는 난망하다. 지난 촛불혁명 이후 마을 자치와 사회적경제 강화를 위해 마을공동체 기본법과 사회적경제 기본법을 제정하려 마을활동가들이 노력했지만 결국 안됐다. 과반수 의석을 몰아줘도 안 됐다. ‘대한민국 시도의회 의장협의회’는 2023년 3월 지방소멸을 막기 위해 농촌기본소득 시행 촉구 건의안을 여야 구분 없이 합의해 중앙정부에 제출했지만, 어떤 메아리도 없다. 이런 법이나 정책과 관련한 활동을 하다 국회에 진출한 의원들도 여의도만 들어가면 체제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생긴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헌정 수호 진영인 야당이 헌정 파괴 내란 옹호 정당을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으로 이기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는 사회 엘리트의 전유물이 돼버린 듯한 대의권력 입법부, 관치권력인 행정부와 사법부, 이 양대 중앙 권력을 견제할 직접 민주 주민자치 권력을 만들어 새로운 3권분립 민주공화국을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대의민주제와 입법·사법·행정의 3권분립만으로 명맥을 유지하는 민주공화제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 이번 내란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직접 민주의 개입을 호소하는 또는 선동하는 고장난 6공화국 시스템을 목도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옷을 입고 등장한 파시즘을 두렵게 지켜보고 있다. 대한민국은 이제 민주공화의 새 옷을 입어야 한다.
신 3권분립과 제7공화국 개념도
3.1혁명 정신은 양심과 연대의 시천주의 세상 아니었나
무려 127년 전인 1898년 광장에서도 전자기기 하나 없이 제헌의회를 열었는데 2025년에 그것을 못 할 이유는 없다. 국회의원들이 정치는 국민이 하는 것이고, 국민이 위대하고, 추운 겨울에 아스팔트에 나와 국민들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말이 진심이라면, 국민이 평상시에 주권을 편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사회대개혁, 즉 직접 민주 주민자치 권력 강화에 적극 나서주면 좋겠다.
3월이면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될 것으로 예측되고, 그러면 대선 이슈가 블랙홀처럼 다른 이슈를 빨아들일 것이다. 직접 민주를 확대 강화하자는 얘기는 대선 때 어느 정당 후보를 뽑느냐는 얘기와 같은 말처럼 취급될 수도 있다. 개헌을 얘기한다며 직접 민주 권력 논의는 쏙 빠지고 중앙 권력의 통치 형태를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겠냐, 라는 주제가 미디어를 도배할 수도 있다. 결국 또 대의 권력, 엘리트 권력끼리의 싸움을 무협지 보듯 보며 넋을 놓게 돼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징어게임>과 <중증외상센터> 드라마 속에서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상, 만민공동회와 3.1혁명을 일군 분들이 ‘만세’를 외치며 불러냈던 세상, 내란 종식을 위해 모인 주권자들이 바라는 세상은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각자의 양심을 용기 내 나누고 서로 연대해 만들고자 하는 시천주의 세상은 그게 아니었다. 12.3 친위쿠데타 때 국회로 달려 나가 군을 막아선 주권자들이 어느 정당의 집권을 돕기 위해 나선 것도 아니고, 누구를 대통령 만들기 위해 나선 것도 아니고, 어느 정치인의 지지자들이어서 나선 것도 아니다. 수많은 열사와 의인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대한민국 민주공화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즉각적으로 발동하는 마음. 그 마음이 바로 시천주의 마음이다. 그런 주권자의 마음을 일상적으로 실행할 수 있게 하는, 권력을 더 낮은 곳으로 분산하는 혁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내가 바라는 2025년의 3.1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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