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잘못 썼을까.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면 노동자를 포함한 이해당사자들 사이의 사회적 대화가 필요하고 이 대화는 탄소중립위원회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썼다(박태주·이정희, 2022. 「정의로운 에너지 전환」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물론 조건은 있었다. 탄소중립위원회의 사회적 대표성을 높이고 운영의 독립성이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윤석열정부 들어 누구도 사회적 대화를 들먹이지 않는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김문수라는 태극기 부대원이 장악해 노동계 공격에 열을 올리고 있다. ”탄소중립정책의 관제탑이자 참여·소통 중심의 사회적 대화기구“(윤순진, 2022)라던 탄소중립위원회는 또 어떤가. 윤석열정부가 핵발전 인사나 전문가들로 위원회를 재구성하면서 노동자나 농민 등 현장의 이해당사자는 물론 탈핵이나 적극적인 에너지 전환을 요구하는 환경단체도 배제했다.
법치가 협치를 대신하고 정치가 아닌 힘의 질서가 국정을 지배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탄소중립위원회를 통한 사회적 대화를 주장한다는 게 뜬금없는 일은 아닐까. 윤석열정부를 오독했거나 최소한 오해하는 정치적 문해력(political literacy)의 결핍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지금은 사회적 대화의 시간이 아니라 사회적 투쟁의 시간이지 않을까.
사회적 대화, 사회연대투쟁의 발화점이자 귀결점
민주주의가 갈등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라고 한다면 사회적 대화는 민주주의의 정치에 속한다. 이해당사자들이 갈등의 해결 과정에 ‘동등하고도 실질적으로’ 참가한다는 점에서 그렇고(참여민주주의) 토론과 숙의를 통해 해법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그렇다(숙의민주주의). 노동조합이나 사회단체가 정부를 상대로 직접 협의할 뿐 아니라 의사결정 권력을 공유(power-sharing)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대화는 경제민주주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전환과 갈등의 시대에 사회적 대화가 요구되는 이유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전략으로서 사회적 대화는 국제노총(ITUC)은 물론 UN 산하기구인 국제노동기구(ILO)나 유엔환경계획(UNEP)도 권장하는 사항이다. “사회적 대화는 (기후위기 대응의) 모든 단계에서 정책 결정과 이행을 위한 제도적인 틀에서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한다”(ILO, 2015). 정의로운 전환이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노동조합의 지배적인 담론이 되고 그 통로로 사회적 대화가 거론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적 대화가 노동 문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탄소중립위원회만 하더라도 사회적 대화를 통해 기후위기에 대처한다는 개념을 바탕에 깔고 있다. 탄소중립기본법에 따르면 탄소중립위원회 위원을 위촉할 때에는 청년, 여성, 노동자, 농어민, 중소상공인, 시민사회단체 등 다양한 사회계층의 대표성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윤석열정부의 법치는 이를 깡그리 무시했다). 또한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의사결정과정에 동등하고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기후정의’라고 규정하고 있다(이런 점에서 윤석열정부는 기후정의와 거리가 멀다). 탄소중립위원회가 사회적 대화기구라는 게 빈말만은 아닌 셈이다. 실제로 문재인정부 시절에는 ‘공정한 노동전환’을 지원하기 위해 경제사회노동위원회 및 탄소중립위원회와 협의하여 사회적 대화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도 있다(2021.12).
환경운동을 하는 많은 분들이 사회적 대화에 두드러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형식적으로는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 약자의 참여를 보장한다지만 기껏해야 성장과 경쟁력을 앞세운 지배집단(정부와 자본)의 논리에 들러리를 세우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가 지향하는 ‘합의에 의한 해결’도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체제전환을 어떻게 자본가들과 합의할 수 있는가?” 오히려 사회적 대화는 사회적 파트너십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의 무장을 해제시킴으로써 체제전환에 필요한 전투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탄소중립위원회를 바라보는 시각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문재인 정부에서조차 환경단체의 상당수는 위원회 참여를 거부한 채 위원회의 해체를 주장했고 일부 위원은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가 근본 목적에 충분치 않다며 위원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탄소중립위원회를 대체할 대안은 분명하지 못했고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재수립하라는 요구는 정부를 강제해 내지 못했다. 노동조합 및 사회단체와 정부 사이의 소통은 단절됐다. 노동·사회단체로서는 주체적으로 선택한 소외였다. 결과적으로 탄소중립위원회는 법적인 의사결정권을 온전히 유지한 채 정부와 자본 사이의 ‘사회적 대화(담합)기구’가 되고 말았다.
사회적 대화는 ‘갈등의 사회화’를 촉진함으로써 사회적 연대투쟁의 발화점이 된다(샤츠슈나이더, 2008). 사회적 대화의 장에서 갈등을 조직하고 이를 외부화시켜 사회세력을 정치적으로 결집하는 것이다. 사회적 대화는 그 자체로 사회적 권력관계를 반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투쟁을 사회화함으로써 사회적 권력(social power)을 형성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화와 투쟁은 나선적인 변증법으로 통일된다. 전쟁이 다른 수단으로 하는 정치의 연속이듯이 정치 역시 전쟁의 연속이다.
사회연대투쟁으로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를 복원시켜야
윤석열정부 들어선 후 기후문제는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원전 수명연장과 신규건설, 재생에너지 발전목표의 축소, 곳곳에서 부스럼처럼 들어서는 신공항, 탈석탄의 시대라면서도 아직도 짓고 있는 석탄화력발전소, 시행이 유예된 일회용품 보증금제도, 생태계의 파괴… 기후운동은 곳곳에서 솟아나고 있다. 하지만 자연발생적인 분산성과 규모의 협소성을 극복하지 못할뿐더러 정부를 상대하는 데도 한계를 보이고 있다. 기후문제를 전국적인 차원에서 공론화시키고 역량을 결집할 사회적 대화의 장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탄소중립위원회는 탄소중립 정책의 최상위 기구다. 지난해에는 ‘2030 국가온실가스 감축계획’(NDC)과 ‘2050 탄소중립 시나리오’를 심의·의결했으며 내년 3월에는 ‘온실가스 감축 이행 로드맵’과 ‘국가 탄소중립·녹색성장 기본계획’을 확정한다. 각종 기후문제의 주범이랄 수 있는 기후정책의 대강이 이곳에서 결정되는 셈이다. ‘불타는 지구’에서 큰불은 내버려둔 채 잔불만 잡는다고 될 일은 아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
정부가 사회적 대화를 포기했다고 노동이나 사회단체까지 지레 포기할 일은 아니다. 탄소중립위원회를 제대로 된 사회적 대화기구이자 탄소중립정책의 관제탑으로 복원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사회적 대화가 탄소중립위원회에 갇히는 것은 아니다. 지역별, 산업·업종별 사회적 대화 역시 가능하고 필요하다면 탄소중립위원회의 바깥에서 구성하는 일도 상상할 수도 있다.
사회적 대화의 틀을 갖추고 협의를 하기 위해서라도 지금 필요한 것은 사회적 연대투쟁이다. 윤석열 정부의 기후정책을 바꾸는 일 못지않게 기후정치의 장으로서 민주적인 공론의 장을 마련하는 일도 중요하다. 윤석열 정부는 그 자체로 기후위기를 상징한다. 기후정책을 윤석열 정부의 관료적인 결정에 맡겨놓는다는 것은 기후위기의 임계점을 앞당길 뿐이다. 인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은 인민이 참여하는 공적 통제 아래로 되돌려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면 사회적 대화는 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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