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혁명 뒤 미국의 고립정책에 따른 자립책

도시농업, 퇴비생산, 시골이주 등 '제2의 혁명'

농부 수입이 교수·의사의 3배 '농자천하지대본'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 전 마을이장

“동이 틀 무렵의 아바나를 본 적이 있는가?” 1937년 헤밍웨이 소설의 한 구절이다. 낭만과 아름다움이라기보다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이후 사실상 미국 식민지로 전락한 쿠바의 서글픈 모습을 묘사하는 맥락이었다. 지난달 평생 꿈에 그리던 쿠바를 조용히 다녀왔다.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이었다. 바라데로와 마탄사스, 아바나를 주마간산으로 체험했다. 쿠바혁명 65주년이라 나름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65년 전인 1959년, ‘카리브 해의 진주’로 불린 쿠바는 새 ‘공화국’을 선포했다. 우리가 아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혁명이 (숱한 희생 위에) 결실을 거둔 것! 그러나 쿠바혁명이 극도로 거북한 이웃이 있었으니, 불과 150㎞ 떨어진 미국이다. 미국은 쿠바에 대한 경제봉쇄와 더불어 탈쿠민(쿠바 탈출 부자들)을 조직, 쿠바를 침공하게 한다든지, 기상천외한 방식의 카스트로 암살도 기도했다. 오죽하면 (637회의 암살 공모와 164회의 실제 암살 시도를 딛고 살아남은) 카스트로(1926~2016)가 “만일 올림픽 게임에 살아남기 종목이 있다면 바로 내가 금메달을 땄을 것”이라며 껄껄 웃었겠는가?

 

가게 앞에 줄을 선 쿠바인들. 강수돌 촬영
가게 앞에 줄을 선 쿠바인들. 강수돌 촬영

소련 붕괴와 미국의 봉쇄, 이중고에 부닥친 혁명 쿠바의 사회주의

1950년대의 쿠바는 (한국처럼) 가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혁명 정부가 미국의 정유회사, 설탕공장, 담배공장, 전기회사, 전화회사 등을 국유화하고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 복지정책을 시행하면서 민중의 삶의 급격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으로부터의 각종 물자 지원은 쿠바가 사회주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었다. 해마다 식량, 석유, 고기, 비료, 농약 등이 소비에트로부터 쿠바에 유입되었던 것! 그런 지원이 30년 간 이어지면서 쿠바인의 ‘생물학적 삶의 질’ 지표는 오히려 미국보다 앞설 정도였다. 즉, 1989년 당시 유아사망률, 문맹률, 평균 수명 등 지표에서 쿠바는 세계 11위, 미국은 15위였다. 그리고 2008년에는 교육과 의료, 국민소득을 종합하는 ‘인간개발지수’에서 180개국 중 51위, 중남미에서는 아르헨티나·칠레·우루과이·코스타리카 뒤로 5위를 기록, 혁명의 성취를 지키는 데도 성공했다.

문제는 1990년경 소련과 동유럽 체제가 (고르바초프 식) ‘개방, 개혁’이라는 구호 속에서 사실상 ‘붕괴·몰락’의 길을 걸으면서 쿠바와 소련 간 유대가 단절된 점이다. 기존 수입 물량의 75%가 줄었고, 석유 공급도 절반 이상 줄었다. 쿠바 전체가 마비 상태로 내몰린 것!

설상가상으로, 미국은 쿠바 봉쇄조치를 강화하는 법령을 거듭 만들어냈다. 말로는 쿠바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 했지만, 실상은 사회주의 쿠바를 자본주의로 만들려는 전략! 단순히 식량이나 약품 등에 대한 무역봉쇄만 노린 게 아니라 미국에 사는 쿠바 탈출자들(수천 명의 부자들)이 쿠바에 두고 온(사실상 뺏긴) 재산에 대한 청구권을 갖게 하거나, 그 어떤 외국인도 쿠바 내에 투자를 못하게 법적 제약을 걸었다. 한마디로, 쿠바의 사회주의 노선을 철저히 방해하려 했다.

실제로, 1996년에 ‘헬름스-버턴 법’을 만든 제시 헬름스는 ‘솔직하게’ 이 법령의 목적이 카스트로 정부를 붕괴시키고 미국의 마음에 드는 새 정부를 세우는 데 있다고 했다: “금년이 쿠바인들이 피델에게 작별을 고하는 해가 되도록 합시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 혁명광장 근처 정부청사 벽을 장식한 체 게바라 조형물. 강수돌 촬영
쿠바의 수도 아바나 혁명광장 근처 정부청사 벽을 장식한 체 게바라 조형물. 강수돌 촬영

체 게바라 ‘집단기억’과 함께 시작한 제2의 혁명은 유기농 혁명

그러나 ‘산 입에 거미줄 치랴?’는 말처럼 쿠바는 사면초가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았다. 400년 간의 스페인 식민지 시절, 그 사탕수수 농장 노예의 상황과 수치의 세월들, 그리고 1902년 형식적 독립 이후 미국 자본에 의한 사실상의 신식민지와 새로운 노예 상황들, 미국 자본에 빌붙은 부패 권력층의 폭력과 오만 등, 이 모두를 극복하려는 것이 1959년 쿠바혁명 아니었던가? 요컨대 1959년의 혁명은 참된 자유와 참된 민주주의를 이루려는 쿠바 민중의 열망이 반영된 변화였다. 그런 ‘아래로부터의’ 집합적 열망과 용기가 없었다면 과연 피델 카스트로나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같은 빛나는 혁명가들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그러기에 강력한 구조 변화를 원했던 쿠바인들은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할 수 없었다. 쿠바 정부는 1991년 9월, ‘특별시기(Periodo Especial)’라는 이름을 붙이고, 전시 상황과 비슷한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전 사회적 전환을 시작했다. 특히, 1959년 혁명 이후 1965년까지 쿠바 혁명의 진전을 위해 노력하다 홀연히 떠난 체 게바라, 1967년에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산 중 게릴라 작전 중 생포되어 죽어간 체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와 노선이 달라 “영원한 승리의 그 날까지”란 말을 남기고 조용히 떠난 체 게바라를 사람들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이런 ‘집단 기억’이 작용한 탓일까? 1990년대 이후의 쿠바는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제2의 혁명을 하듯 활기찬 전진과 전환을 시작했다. 그것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바, ‘쿠바의 유기농 혁명’이다. 그것은 이른바 관행농업이었던 화학농(농약과 비료), 단일작물, 기계(트랙터) 사용 농업에서 소농, 가족농, 가축농, 공동체, 협동조합농 기반의 유기농으로의 변화였다.

첫째, 아바나(전체 인구의 1/5이 거주)를 비롯한 도시의 빈터 곳곳을 사각형 틀을 씌운 유기농텃밭으로 만들었다. 이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쿠바 농무부는 수도 아바나의 빈터를 유기농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도시농업과’를 신설했다. 1990년대 말이 되자 아바나엔 공식적으로도 8천 개 이상의 텃밭이 생겨났고 수만 명(개인, 가족, 이웃, 협동조합)이 도시농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텃밭의 종류도 인민 텃밭, 집약 텃밭, 노동자 텃밭, 특별 농장, 국영기업 농장 등으로 다양했다. 식량자급을 위한 텃밭이기에 당국은 경작용으로 사용하는 한 무료로 빌려 주었다. 참고로, 쿠바는 (일부 ‘투자 이민’은 가능하나) 한국과 같은 ‘부동산 시장’이 없다. 따라서 투기도, 시세차익도, ‘전세왕’ 같은 사기도, 개발이익도, 천문학적인 평당 가격도 없다.

 

쿠바 농민들이 밭일을 하고 있다. 2001. 1. 9. 연합뉴스 자료사진
쿠바 농민들이 밭일을 하고 있다. 2001. 1. 9. 연합뉴스 자료사진

삶터와 일터, 농촌과 도시 간 분리와 거리 줄인 집단 생존의 길

둘째, 석유와 비료가 없으니 사람과 소가 일을 더 하게 됐다. 쿠바 전역에 200개 가까운 퇴비 발효 센터가 만들어졌고, 매년 10만 톤 가까운 자연퇴비가 생산되었다. 게다가 도시농업은 석유나 전기를 소비하는 수송, 냉장, 저장의 필요성도 줄여 주었다. 이런 면에서 미국의 경제봉쇄와 소련의 지원 중단은 역설적으로 쿠바로 하여금 자본주의 산업화 이전의 단계, 즉 생산과 소비의 공간적, 시간적 거리를 줄이는 단계로 돌아가게 했다. 사실,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삶터와 일터, 농촌과 도시가 분리되고 상호 거리가 확대되는 경향이 있는데, 특별시기 내지 비상사태를 맞은 쿠바는 집단 생존의 길을 찾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그러한 분리와 거리를 줄일 수 있었다.

셋째, 정책 입안자들은 도시 거주민들이 가능한 한 시골로 이주하도록 장려했다. 유기농은 노동집약적이라 결국 사람 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골의 주거환경을 개선했고 도시민 중에서 굳이 도시에 있을 필요가 없다면 일정 기간 농장에 머물며 일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한국의 수도권이 전 인구의 1/2을 집중시키고 있는 데 비해, 쿠바의 수도권은 전 인구의 1/5만 집중시키고 있어, 수도라 하지만 비교적 한산하다. 아바나 시내조차 신호등이 별로 없고, 보행자들이 비교적 쾌적하게 걸어 다니며 관광하기도 좋다. 한편, 시골 지역 곳곳에는 경관과 분위기가 빼어난 휴양림 겸 생태공동체가 있다. 아바나 남서쪽으로 70여 킬로미터 떨어진 라스 테라사스(Las Terrazas)에는 약 1천 명이 거주 및 휴양하는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물론 이런 마을은 부자들이나 외국 관광객들에겐 저렴한 편이나 쿠바 현지인들에겐 ‘그림의 떡’이 되기 쉽다.

넷째, 예전의 관행농법에서는 살충제와 제초제를 썼지만, 이제는 과학자들의 지식과 기술에 힘입어 생물학적 해충 방제 프로그램을 가동하게 되었다. 천적을 활용한 방제였다. 소규모, 지역분산적, 협동적 방식의 생물학적 방제 시스템을 위해 200개 이상의 ‘해충통제 센터’가 세워졌다. 농민들은 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살충제 대신 천적이 되는 곤충을 활용하거나 벌레들이 특정 식물로 모이게 유도했다. 효율도 좋아졌고 무엇보다 농민들 건강도 좋아졌다. 토양이 더 살아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일례로, 바나나 줄기를 잘라 꿀을 발라 개미들을 꼬이게 한 다음 이걸 고구마 밭에 놓으면 고구마 좀벌레들이 개미들의 먹이가 되는 식이다.

 

쿠바 농촌. 가축을 이용한 밭갈이를 하고 있다. 1001. 1. 9. 연합뉴스 자료사진 
쿠바 농촌. 가축을 이용한 밭갈이를 하고 있다. 2001. 1. 9. 연합뉴스 자료사진 

식량안보가 만들어낸 쿠바의 ‘농자천하지대본’

다섯째, 예전엔 사탕수수나 담배와 같은 단일 작물을 대량으로 생산했으나 농업혁명 과정에서 윤작, 녹비, 간작, 혼합작, 토양보존 등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작물을 생산하게 되었다. 다양한 식물이 유기적 관련성을 맺는 것, 이것이야말로 유기농의 또 다른 강점이다. 생물종 다양성은 상호 생명력을 강화하는, 상보 효과가 있다. 원래 순수한 단일종보다 다양한 혼합종이 훨씬 튼실하지 않던가.

여섯째, 그 전에도 그랬지만 느닷없이 식량안보가 중요해지자 농업과 농민의 사회적 가치가 더 올라갔다. 약 20년 전에 쿠바를 방문한 분의 보고에 따르면 쿠바에서는 교수, 의사, 교사, 약사의 월급이 비슷해서 300페소(약 25달러)인데, 농부의 월 소득은 900페소(약 75달러)라 했다. 농부의 수입이 다른 전문가의 수입보다 3배인 셈이다. 설사 다른 직업과 비슷하다 하더라도 놀라운 일인데, 3배나 더 많으니 한국인으로서는 이해 불가 수준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다른 일은 하지 않아도 죽지는 않는데, 식량을 생산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으니, 농사짓는 사람을 가장 높이 대우하는 게 지극히 당연하다. 쿠바 농민의 절대 소득은 보잘 것 없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모습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물론, 이런 내용만 보면 쿠바는 “유기농 천국”(요시다 타로)이라 할 만하다. 나아가 미국식 자본주의도, 소련식 공산주의도, 석유와 기계, 화학비료와 살충제 등에 의존하는 정도가 높기에 쿠바야말로 ‘제3의 길’을 대안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개인들과 마찬가지로 각 나라 역시 ‘나 홀로’ 살아갈 수는 없다. 쿠바가 1990년대 이후 식량자급률을 95% 정도로 높였다고도 한다. 찬탄할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성취(생존, 전환, 혁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쿠바 사람들은 배가 고프다. 아바나 시내 곳곳에 있는 빵집(Panaderia) 앞에는 배급을 타기 위한 사람들이 수첩 같은 것을 들고 줄지어 서 있다. 하루에 바게트 같은 긴 빵 하나를 배급 받지만 그걸로는 불충분하니, 대개는 추가로 한 봉지씩 더 사간다. 빵은 찰지나 조금씩 먹으라는 건지 좀 짜다.

‘제3세계 네트워크’ 구축이 쿠바의 새 활로 될 수 있지 않을까?

외국 관광객에게 하룻밤 빌려주면 50달러 내외를 받을 수 있는 까사(민박) 역시 현지인들에겐 비싼 편이다. 역으로, 까사(민박) 사업을 하는 이들은 (30% 세금을 내더라도) 평균 한 달치 월급(약 25달러)을 하루 만에 벌 수 있다. 물론, 이들은 민박 허가를 받기 위해 냉장고, 에어컨, 화장실, 샤워실 등을 갖추어야 하기에 초기 투자비용이 꽤 든다. 그걸 감안하더라도 몇 달이면 순이익이 생기기 시작하니, 이런 식으로 빈부 격차가 벌어진다. 오늘날 관광객에게서 나오는 달러 수입이 아니면 나라 살림에 큰 펑크가 생길 정도다. 코로나사태 이후로는 100인 미만의 기업 운영도 비교적 자유로워졌다. 전형적인 자본주의 노동 착취의 여지가 생기고 있다.

물론, 스티븐 준스 미국 샌프란시스코대 교수가 말했듯(<녹색평론> 162호), “우리가 쿠바에 대해 들은 좋은 것들은 전부 진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쿠바에 대해 들은 나쁜 것들도 전부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된다.

바로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긴다. 만일 쿠바가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유기농에 집중하는 것과 더불어 ‘제3세계 네트워크’를 새로운 형태로 강화할 수 있다면, 외국인이 가져오는 달러에 의존하지 않고도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물론, 여기엔 미국이라는 변수, 특히 CIA가 세계 곳곳에서 벌이는 방해 공작이 있다. 그래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쿠바의 의학교육(그것도 무상으로)이나 쿠바 의료진들의 국제 연대는 세계적으로 소문나지 않았던가? 그런 연결고리들을 잘 활용하여 ‘제3세계 네트워크’를 제대로 구축한다면 탈제국, 탈식민, 탈자본의 새 세상을 활기차게 열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아르헨티나 의사 출신으로 멕시코, 쿠바, 콩고, 볼리비아 등 세계 곳곳에서 혁명을 꿈꾸다 불과 마흔에 하늘의 별이 되고 만, 체 게바라(1928~1967)! 그의 제안이 이 순간 강렬히 치솟는다. “우리 모두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엔 불가능한 꿈을 품자!” 그리하여, 완전히 새롭게 동이 트는 아바나를 다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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